안식일 제도를 통하여 표명된 바 인간의 복지를 위한 하나님의 관심은 참으로 놀랍기 그지 없다. 안식일은 하나님의 임재를 통한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들을 효과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의 이와같은 관심의 표명에 대하여 인간은 어떠한 응답을 나타내야 되겠는가? 신도들은 안식일에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축복을 어떻게 기념하고 경험해야 하는가? 네째 계명은 두 가지의 중요한 제안을 내놓고 있다. 그것은 곧

   (1) 안식일을 기억하라

   (2) 6일동안 일하고 제칠일에 쉬어라이다. (86.1)
 1. 제칠일을 기억하라.
 네째 계명의 명령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8)로 시작되고 있다. 안식일을 기억한다는 행위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안식일을 “기억하는 일”“거룩히 지키는 일”은 서로 관련되어 있는가? “기억하는 일”은 안식일의 거룩함을 경험하는 데에 필요한 선행 조건이랄 수가 있을까? 날짜들은 개인과 국가의 생활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사람들은 생일과 결혼 기념일과 부모의 기념일과 국가의 독립 기념일, 그밖의 여러 날들을 기념한다. (86.2)
 그 날의 중요성은 그 날과 연관된 사건에 의하여 결정된다. 예컨데 어머니의 날에 당신은 시간을 내어 당신의 어머니가 당신을 세상에 낳아주신 것 뿐만 아니라 쉴줄 모르시던 그분의 보살핌을 기억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안식일도 우리가 단지 하나님의 첫번째의 완전한 창조만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계와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끊임없는 보살핌을 기억하는 것이다. 다시말해서 창조, 만나, 출애굽, 구속, 영원한 회복 등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들을 기억한다는 뜻이다. (86.3)
 시간을 내어 하나님의 역사적인, 그리고 직접적인 개입을 기억한다고 하는 것은 단순히 어떤 기억 훈련을 뜻한다기 보다는 하나님과의 의미있는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지극히 중요한 연습을 뜻한다. 관계라는 것은 피차간의 기억 위에 수립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밖에 나가 있는 동안에 저를 기억했어요?”라는 질문을 부인들이 남편에게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을 잊는다는 것은 자신의 생활에서 그 사람을 밀어내 버렸다는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은 오직 그가 하나님이 인간을 위하여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무엇을 하셨으며 무엇을 하실 것인가에 대하여 생생한 기억과 이해를 가질 때에만 하나님과 살아 움직이며 사랑에 넘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계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안식일에, 그리고 안식일을 통하여 우리를 초청하시어 당신이 최초에 우리를 완전하게 창조하셨으며 끊임 없이 우리를 보살피고 계시고 우리를 완전히 구속하셨고 궁극에 가서 우리를 회복시키신다는 기쁜 소식을 기억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86.4)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는 것은 온갖 자비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인정하고 찬양키 위하여 시간을 사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우쭐하는 자부심에 대하여 “아니”라고 말하며 안식일의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를 만나기 위한 준비를 함으로써 “네”라고 대답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자신의 업적을 신뢰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봉사를 인정하는 것을 뜻한다. 이것은 자신의 필요에 대한 염려를 그치고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마리아가 그리스도를 최대의 귀빈으로 모시고 자기가 하는 모든 일에서 그리스도를 인정했듯이 자신과 자신의 이익에 대하여 잊어버리는 것을 뜻한다. (87.1)
 예배를 드릴 때나 이야기를 할 때나 음식을 먹을 때나 걸을 때나 책을 읽을 때나 음악을 들을 때나 방문을 할때나 그밖의 모든 일을 할 때에라도 그속에 그리스도의 임재를 기억하고 그것을 배양하므로서, 믿는자는 안식일의 거룩함 즉 자신의 생활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개인적인 임재를 경험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이 하고 있다는 의식은 우리의 생활 속에 가장 순결하고 가장 선한 것을 북돋아 주며 또 가져다 준다. (87.2)
 2. 노동과 휴식
 엿새동안 일하라. 네째 계명은 또 안식일에 하나님의 거룩하게 하시는 임재를 기념하고 경험하는 수단의 하나로서 노동과 휴식의 계획표를 제안하고 있다. 무슨 이유로 엿새 동안에 “힘써 네 일을 행하고” 제 칠일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분명한 구분을 하신 것 일까(출 20:9, 10)? 엿새 동안의 노동은 안식일의 휴식에 대한 하나의 반정립(反正立)을 구성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앞에서 보았듯이 노동과 휴식이 모두 네째 계명 속에 포함되어있기 때문에 그것은 그렇지가 않다. (88.1)
 엿새 동안의 노동은 안식일의 쉼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자연적인 서막, 또는 필요조건으로 생각되어야 한다. 엿새 동안의 노동은 안식일의 쉼을 위한 예비적인 경험인 만큼 안식일의 기념에 한 몫을 감당하고 있다고 하겠다. 즉 한 주일 동안에 힘써 일을 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좀더 자유롭게, 그리고 충분하게 하나님과의 교통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는 안식일의 경험에 의하여 그리스도인은 그 주일의 엿새 동안에도 하나님의 임재를 계속해서 의식할 수가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안식일 계명의 노동과 휴식의 계획표로 말미암아 안식일에 특별한 방식으로 경험되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임재가 주일 전체에 그 영향을 미치게 된다. (88.2)
 제칠일에 쉬라. 무슨 이유로 네째 계명은 안식일의 거룩함을 경험키 위해서는 주일 동안에 하던 일을 중지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는가? 무슨 이유로 네째 계명은 안식을 누려야할 사람들의 계층에 대하여 그처럼 소상히 밝히고 있는가? 무슨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안식”을 안식일의 거룩함을 위한 범주적 명령으로 삼고있는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이 의미있는 활동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무위(無爲)로 지내는 것을 좋아하시는가? 어떻게 안식일의 쉼이 믿는자들로 하여금 그날을 거룩하게 지킬 수 있도록 할 수 있는가? 안식일의 휴식 속에는 무엇이 포함되어 있는가? (88.3)
 이같은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엿새동안의 노동과 제칠일의 쉼 사이의 분계선이라는 기능을 가지고 있는 안식일 휴식의 기능 그 자체에 의하여 얻게 될 것이다. 거룩한 시간과 비교가 되는 통속적인 시간이 없다면 어떻게 거룩한 시간을 구별할 수 있을까? 칼 바르트는 묻기를 “우리가 노동을 해야하는 날들에 대하여 이해하기에 앞서 거룩한 날을 참으로 이해할 수가 있을가? 인간은 먼저 하나님 목전에서 숨을 돌리고 휴식을 취하며 거룩한 날을 지키면서 자유를 즐기는 일을 경험치 않고도 하나님의 명령을 쫓아 자신의 일을 생각하며 이행할 수가 있을까? 인간은 자신의 일의 경계와 그 엄숙한 차단(遮斷)을 보지 않고서도 자신의 일의 진가를 옳바르게 인정할 수가 있을까? 이 차단(遮斷)이야말로 인간으로 하여금 다른 시간을 누릴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출처인 진정한 시간이 아닌가?”16라고 하였다. (88.4)
 안식일의 쉽은 더 작은 것과 더 큰것, 일반적인 것과 거룩한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지혜를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제칠일에 안식하심으로 안식일을 그 앞에 있는 다른 날들과 구별했듯이 믿는 사람은 안식일에 쉼으로서 안식일과 노동하는 날들 사이에 분명한 분계선을 굿고 있다. 노동과 휴식, 작업 시간과 거룩한 시간 사이에 분계선을 긋는 일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는 행위의 기초이다. 하나님에서는 주일의 여섯 날들과 일곱째 날 사이에 분계선을 그으시고 제 칠일을 당신의 임재로 인간을 축복하는 특별한 시간으로 삼으셨다. 하나님을 자신의 창조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창제 하신 것도 받아들여야 하며 또 그것을 다른 것으로 변경시키지도 말아야 한다. 그와같은 태도에서 하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믿는 자가 자신의 작업 계획을 중단하는 것(“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이다”출 20:10)은 하나님에 대한 존경심의 표시인 것이다. 그러나 이와같은 중단은 인간 자신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쉼과 평화와 영생을 발견하는 곳은 하나님의 존전(尊前)이기 때문이다. (88.5)
 

안식일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의 지식을 전달해주시고 또 그 지식을 이행할 수 있는 당신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날이다.
(89.1)
 범(凡) 안식일 주의 (Pan-Sabbatism).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 특유의 생활방식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통일시키기 보다는 분열시키는 영향을 끼친다하여 안식일 특유의 생활 양식을 배척하고 있다. 그 일례로서 하일리 H. 와드(Hiley H. Ward)는 자신의 저서인 우주시대의 일요일(Space-Age Sunday)에서 “주의 날”(主日)이란 관념은 오늘날과 같은 우주 시대에는 맞지 않은 낡은 관념이며 따라서 “주의 날(主日)” 대신에 “주의 주일(週日)”을 지키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한다. 와드의 기본적인 주장은 일요일이라고 하는 일일(一日)종교는 마땅히 매일같이(況 安息日主義) “기도하는 정신”, “아침 식사 전에나 저녁 늦은 시간에 그리스도인 친구들이 함께 모이는 매일의 회집,” 그리고 교회가 후원하여 날마다 제공하는 “전도와 교육”의 프로그램으로 대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18 (90.1)
 이같은 제안은 그럴듯하게 들릴지 모르나 실질적으로 이 주장은 비현실적이며 이 제안이 의도하는바 영적 생활의 특성 그 자체에 대하여 파괴적인 것이다. 또 이것은 그들이 그들의 주일(住日)로 여기는 날에도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좀처럼 시간을 내지 않은 사람들에게 수(數)야 많던 적던 간에 매일마다 모이는 예배 모임에 참석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에 비 현실적인 발상이라 하지않을 수 없다. 어떻게 그같은 매일의 프로그램을 시간에 쫓기며 사는 현대 생활에 도입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날의 전적인 예배 경험을 확장하는 형태로서가 아니라 대체시키는 형태로 제시되고 있기 때문에 더욱 파괴적이다. 만약에 이것이 특정한 시간에 행해지는 기도의 대용(代用)으로서가 아니라 그 반영으로서 제시된다고 한다면 “쉬지말고”(살전 5:17) 기도하는 일처럼 의미있는 일이 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개인적으로든 공중적으로든 매일같이 예배를 드리는 일은 만약 그 일들이 안식일에 이루어지는 전적인 예배 경험의 대용으로서가 아니라 그 반영으로서 행해지기만 하다면 가치있는 일이다.19 (90.2)
 예배라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전적이고도 질서있는 응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일에 속한 여러가지 긴급한 용무에 그렇듯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되는 주일의 평일 동안에 이같은 전적인 응답을 할 수가 있을까? 어떤 사람의 일요일에서 금요일까지 생활하는 동안에 경험할 수도 있는 하나님에 대한 잠재의식적인 자각 현상을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전적인 또는 적절한 응답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믿는 자가 행하는 것은 모두 일종의 예배 행위라고 하는 주장도 마치 모든 것을 하나님이라고 하는 주장(범신론)처럼 얼빠진 소리이다. 이 두 주장의 결론은 결국 아무것도 진정으로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는 한 번도 참다운 예배를 올리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상들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예배를 폐지시키기 위하여 교묘히 고안된 속임수들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날이 안식일이라고 하는 주장은 결국 아예 안식일은 없다는 주장으로 끝난다. (90.3)
 이같은 진실이 다음의 시(詩)를 통하여 날카롭게 나타나 있다. (90.4)
“이 새로운 개혁자들은 실로
똑똑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매일이 안식일이라고 주장한다.

기독교적인 이론이다!
그러나 그 비기독교적인 사실은 매 안식일이
그들의 실생활에서는 하나의 평일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20
(91.1)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일일(一日)종교, 아니 더 정확히 말한다면 한 주일에 한 시간의 종교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교회 출석할때 입고 간 의복을 벗어 옷장에 걸어 놓기가 바쁘게 마음 속에서 부터 하나님에 대한 생각은 제쳐놓고 마치 하나님이 존재하시지 않았던 것처럼 다른 주일(週日)을 위해 산다. 만연되어 가고 있는 이같은 도착(倒錯) 현상에 대한 해결은 안식일 계명을 총칭적인 태도나 프로그램으로 대체 시킴으로써가 아니라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안식일 계명의 본래적 의미와 기능을 재발견케 함으로 가능케 될 것이다. 전체적인 제칠일 안식일의 쉼을 위한 성경적 계획을 폐지시키고저 하는 이 안달이야말로 매일의 예배와 일주 일회의 예배를 등한히 하고 있는 현 세대에 적절한 설명이 된다고 하겠다.21 (9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