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25에서 특별히 중요한 것은 그 구절 전체를 꿰뚫고 있는 예수의 봉사와 제자들의 봉사 사이의 유사성이다. 그와 같이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처럼 오로지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들에게로만 가야 한다(10:5, 6; 15:24). 물론 그 명령은 연대기에 묶이어 있다. 부활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에게 모든 세상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28:18-20). 명백히, 예수께서는 후일 바울이 분명하게 제시한바,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그 후에는 이방인에게 그 기별을 제시하는 선교 원칙을 제시하고 계신다(예컨대, 롬 1:16; 행 1:8과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활동 방법을 보라). (143.2)
 제자들 또한 예수께서 전파하시던 동일한 기별-“천국이 가까웠느니라”(10:7; 4:17; 또한 침례자 요한에 대해서는 3:2를 보라)-을 전파해야 한다. 그리스도처럼 그들은 병든 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일으키고 문둥병자를 정결케 하고 귀신들을 내쫓아야 한다(10:8; 8:2-4, 14-17, 28-34; 9:18-26). 그들은 또한 이 도시에서 저 도시로 다니면서, 예수처럼 다른 사람들의 가정들에 머무를 것이다(10:11; 4:23-25; 8:20). 그 외에도, 그들은 종내(終乃)는 예수처럼 고난을 당할 것이다. 그들은 체포되고 총독들과 왕들 앞에 끌려 나오고, 채찍질을 당할 것이다(10:17-19; 26:57-27:31). 또한 예수처럼 그들은 그들과 가장 가까운 사이에 있는 자들에 의해 배반을 당할 것이다(10:21; 26:47-56). 마태는 이런 비슷한 점들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부분의 끝 구절은 학생이 선생같고 종이 그의 주인과 같을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10:25). (144.1)
 성경 학도들을 크게 당혹시켜왔던 10:5-25의 한 구절은 23절로서, 제자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서 인자가 오리라”(23절)고 말하는 구절이다. 얼른 보기에,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언급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해석은 명백하게 잘못된 것이다. 이는 마태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을 파송하신 지 수십 년 후에 그의 복음서를 기록했기 때문이며, 그가 재림이 아직 발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마운스(Robert Mounce)는 R. V. G. 태스커(R. V. G. Tasker)의 선도(先導)를 따라서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그의 해석은 이 구절에 관한 가장 만족스러운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 구절은 ‘그의 부활 후에 의기양양하게 인자가 오시는 것과 관련하여’ 이해되어야 제일 잘 이해된다”(Mounce, 95). 그의 제안은 위에 제시된 10:528:18-20에 대한 점층적인 해석과 조화된다. (144.2)
 예수의 설교의 제2. 사명에 관한 예수의 설교에서 두 번째 부분은 10:26에서 10:31까지 이어진다. 이 단락은 6:25-347:1-11이 산상설교에서 담당했던 것과 매우 흡사한 기능을 한다. 저 구절들이 그 설교의 요구 사항들로 말미암아 압도된 청중들이나 독자들을 격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10:26-3110:17-25의 박해 아래 있는 선교사들을 격려한다. (144.3)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은 이 단락(10:26-31)에서 세 번 반복되며, 왜 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지에 대해 세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진리는 마침내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다(10:26, 27). 어느 날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보도록 그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실 것이다. 제자들과 역사상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옹호될 것이며, 하나님의 왕국은 온전히 설립될 것이다. 이 약속은 세 번째와 여덟 번째 지복(至福)들의 위대한 종말론적(마지막 때) 약속들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다(5:5, 10-12). (145.1)
 예수의 추종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악의 세력들은 몸은 죽일 수는 있지만,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생명을 취해갈 수는(즉, 영혼을 멸망시키는 일—10:28) 없기 때문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만 그 일을 하실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왕 예수를 의도적으로 배척하고 그의 왕국에 대해서 반역을 계속하기로 선택하는 그런 사람들(영혼들)을 멸망시키실 것이다. 그 멸망은 철저하면서도 영원할 것이다. 요한계시록의 천년기 후에 지구를 정결케 하는 불에 의해 “소멸되고” 사러진 후에, 악한 자들은 그들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었던 것과 같이 될 것이다(계 20:9, 11-15; 또한 벧후 3:11-13; 말 4:1-3을 보라). (145.2)
 예수의 추종자들이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는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들 가운데 가장 미천한 것들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가 하잘것없는 참새들도 돌보실진대, 그가 그 왕국의 시민들을 돌보시는 것이 확실하다(10:29-31). 이 세 가지 논증들은 두려움을 쫓아내고 예수를 따르는 자들을 그의 왕국의 원칙들과 행위들을 두려움 없이 옹호하는 사람들로 만들기 위한 목적에서 주어진 것이다. (145.3)
 예수의 설교의 3. 선교에 관한 예수의 마지막 주요 부분(10:32-42)들 또한 세 가지 중심 사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사상들을 살펴보기 전에, 10:32-425-25절의 주제들 중 몇 가지를 되풀이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해야 할 것이다. 둘 모두 당국자들에 의한 박해, 친구들에 의한 조롱 그리고 가족들에 의한 반대 등과 같은 문제들을 부각시킨다. 그러나 이 반복은 단순히 배움을 위한 반복이 아니다. 10:5-25는 제자들 자신의 사명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반면에, 32-42절은 제자들과, 각 시대의 모든 신자 두 부류 모두에게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 변화는 “누구든지”(32, 33, 39절), 그리고 “어떤 사람이든지”(37, 38, 41, 42절) 등과 같은 단어들에 의해 포착된다. 그리고 5-25절이 유대인들에 대한 제자들 자신의 첫 번째 사명에 특별히 초점이 맞추진 많은 문화적 측면들을 갖고 있는데 반해, 32-42절은 그 장 첫 부분의 문화적 인습들 없이 원칙들을 다루고 있다. (145.4)
 산상설교에서처럼, 그 선교에 관한 설교는 최후의 상급과 형벌에 관계된 세 가지 담화로 끝을 맺고 있다. 첫 번째 담화는 공중 앞에서 예수를 시인하는 사람들은 아버지에 의해서 인정을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고 있다(32, 33절). 두 번째 담화는 예수를 첫 번째-심지어 그의 가족들보다도 위에-로 삼는 사람은 누구나 확실히 생명을 받을 것이다. 이 구절에 영생이 암시되어 있다(34-39절). 세 번째 담화는 왕국의 상급은 예수의 추종자들에게 친절을 베푸는 자들에게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한다(10:40-42). 그 주제는 산상설교에 암시되어 있으며(7:12; 5:7, 43-48), 마태의 심판날에 관한 비유인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아주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25:31-46). (146.1)
 그리스도의 생애의 위대한 역설(逆說) 중 하나는 그가 “평강의 왕”(사 9:6)임에도 불구하고, 그를 받아들일 때 그가 너무 깊이 찌르고 자르는 칼을 가져오시기 때문에 개심자들이 자주 그들의 가장 가까운 관계들이 붕괴되는 것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 역설의 토대는 산상설교에서 진술된 그리스도의 왕국의 원칙들(5-7장)이 이 세상 왕국들의 원칙들과 정면으로 배치된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가족이나 공동체의 몇몇 사람들이 이런 원칙들에 입각하여 생활하고 다른 사람들은 다른 원칙들에 입각하여 생활할 때, 증오심과 박해는 불가피한 결과이다.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은 그와 그의 원칙들에 최대의 충성을 바쳐야 한다고 주장하신다. 이런 입장이 분란(紛亂)을 가져올지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146.2)
 그리스도인들이 이생에서도 흔히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그들에게 있어서 영원한 평화를 온전히 누리는 일은 “평강의 왕”이 재림 때에 그 왕국을 완전하게 설립하실 때까지는 실현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그때까지는 하늘 왕국의 원칙들에 따라서 살려고 노력하면서 이 세상 왕국에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의 이중 시민권은 그 나름의 긴장을 가져온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하늘 구름을 타고 오실 그리스도의 강림을 고대할 이유가 있다. (147.1)
 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두 번째 설교는 첫 번째 것과 동일하게,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명하시기를 마치시고”(11:1; 또한 7:28; 13:53; 19:1; 26:1도 보라)라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다른 설교들에서처럼 11:1에서 마태의 구절은 예수의 가르침으로부터 그의 행동들에 초점을 맞추는 이야기 설명들로 이동한다. (147.2)
 ■ 말씀을 적용함
 1. 내 생애에서 그리스도의 권위를 경험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나는 그의 권위를 경험해 왔는가? (147.3)
 2. 어떤 방법들로 나는 그리스도께 가까웠는가? 나의 믿음은 예수의 능력을 부여잡고 그것을 나의 일상 생활에 적용해 왔는가 아니면 나는 믿음이나 축복 그 어느 것 하나도 받지 못한 채 예수와 접촉했던 믿음 없는 군중들과 같았는가? 어떻게 나는 예수를 믿는 나의 믿음을 강화시킬 수 있는가? (147.4)
 3. 나는 나의 공동체에서 그리고 내 가족권 내에서 나의 주님을 위한 나의 증언을 전하기를 두려워하는가? 나의 답변에 대하여 나는 어떤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나는 마태복음 10장에서, 전도하도록 내 용기를 북돋워 줄 어떤 통찰을 얻을 수 있는가? (147.5)
 4. 나는 나의 교회와 공동체에서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친절한가? 나의 대답에 대해서 나는 어떤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어떤 특별한 방법으로 좀 더 개선할 수 있을까? (148.1)
 ■ 말씀은 연찬함
 1. 완벽 성구사전을 사용하여 마태복음에서 믿음(faith)이라는 단어를 연구하라. 그가 믿음을 어떤 뜻으로 보고 있는지 기술하라. 그 말이 항상 마태에게 있어서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다른 성경 기자들도 항상 마태와 같은 의미로 그 단어를 사용하는가? 저 마지막 질문에서, 그 단어에 대한 마태의 사용과 디모데에게 보내는 편지들에서 발견되는 용례들을 비교하라. 이 편지서들은 믿음의 어떤 뉘앙스들을 마태의 용례에 첨가시켜 주는가? 그대가 발견한 것들을 성경사전에 제시된 것들과 대조하며 점검해 보라. (14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