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10. 엘 카나—질투의 하나님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
 하나님께서 과감한 처단을 내리실 때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향한 열성으로 불타는 지도자가 요구될 때, 배도자 시므리와 고스비의 처단을 위해 준비된 인물이 있어야 할 시각에, 하나님은 비느하스를 일으키셨다. 오늘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 비느하스가 필요한 경우가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보자. 어떤 부모들은 아이들을 금요일 저녁 교회 청년관에 맡겨 놓고 사라진다. 청년 목사는 9시 반에 집회를 마치고 아이들을 귀가시키려고 하는데, 어떤 아이들은 손을 들고 항의한다. “목사님, 우린 아직 집에 못 가요. 우리 부모님들이 아직 극장에서 돌아오지 않았거든요.” 이래서야 어떻게 안식일 준수의 본이 제대로 세워지겠는가? 아이들의 사상이 어떤 형태를 가지게 될 것인가? 이래서야 어떻게 건전한 성경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할 수 있겠는가? 혹시 우리는 이런 우매한 짓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우리를 바로 지도하시기 위해 온갖 온유하고, 조용하고, 평화스런 설득 방법을 다 사용하시지만, 만일 그것이 듣지 않을 때는 비느하스의 창을 쓰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것을 무자비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159.1)
 여호와께서는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내 백성의 영예와 구원을 위해 질투한다. 그러므로 나는 그런 악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들을 파괴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영생의 소망을 모두 잃는 것을 원치 않는다. 나는 교회 안에 시므리와 고스비 같은 왕자와 공주들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 까닭은 그들에 의해 타락한 생활의 모본이 세워질 것이고, 나의 요구가 내 백성들 앞에 노골적으로 거부당할 뿐 아니라 그들의 철학이 많은 내 백성의 믿음을 해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교회가 정직하고 순결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열성은 당신의 원수들을 향해서는 맹렬한 불길처럼 무섭다. 그는 당신의 그 감정을 질투(qaná)란 말로 설명하신다. (159.2)
 카나 가 사용된 다른 경우들
 그러면 이제는 성경에 카나 가 사용된 다른 경우들을 생각해 보자. 자기의 아내나 남편을 타인이 유혹할 때 느끼는 질투(민 5:14), 형제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것에 대한 시기(창 37:11), 투기(잠 6:34), 부러워함(잠 23:17), 등이 그것이다. 그러면 이런 모든 의미가 어떻게 융화되나? 다시 예화로 설명해 보자. 어느 날 공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갑자기 깔깔대며 웃고 떠들며 박수치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쪽을 바라보니 철없는 한 어린아이가 공원의 야전 식탁 위에서 비실거리며 일어서려는 것을 보고 어른들이 좋아라 환호를 올리고 있었다. 알고 보니 그들은 3-4세밖에 안 된 그 아이에게 맥주를 먹여 놓고 술취한 아이가 비실대는 것을 보고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그것이 그렇게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어른들이 아이가 떨어지지 않도록 손으로 막아 주며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것을 보고, 당장 달려들어 어른들의 머리를 주먹으로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 순간 나는 언젠가 당신의 어린 자녀들을 그렇게 남용한 자들을 심판으로 다스리실 하나님을 생각했다. 나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님을 알고 불쌍하게 생각했다. (160.1)
 질투! 의분! 도대체 왜 유아에게 그런 짓을 한단 말인가? 철없는 어린아이들에게 그런 무리한 짓을 할 때 하나님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감정, 분노, 그것이 바로 카나 이다. 그리스도인들도 그런 감정이 있어야 한다. 다른 하나의 예화를 들어보자. 독자는 아버지에게 성적 추행을 당한 14세의 어린 소녀를 상담해 준 일이 있는가? 독자라면 그런 경우에 당장 야구 방망이를 들고 쫓아가서 그 아비란 자를 내려치고 싶은 충동을 느끼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독자는 비느하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탈을 쓰고 짐승만도 못한 짓을 하여 어린것들의 순결을 더럽히고, 희망을 꺾고, 인생을 망치는 것을 보실 때 하나님의 분노가 어떠하리라 생각하는가? 하나님은 이점에 대해 분명한 기록을 남기셨다: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 “죄악이 결코 깨끗케 되지 아니하리라”(출 20:5; 34:14). 이것은 하나님 편에서 감정적 보복을 하신다는 뜻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다운 행동이며 하나님의 공의의 일면이다. 어린아이들을 실족케 하는 일에 관해 예수께서는 “실족케 하는 일로 인하여 세상에 화가 있도다”라고 탄식하시고 실족케 하는 일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하여도 실족케 하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을 선언하셨다. “그러나 나를 믿는 이런 어린아이들 가운데 하나를 실족케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그의 목에 걸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나으리라”(마 18:7, 6).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질투의 표현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하신 말씀이다. (160.2)
 성장한 남녀들이 때로는 고의적으로 굽은 길을 가면서도 “나는 조금도 양심에 가책 없어, 왜 당신은 그런 걸 가지고 따지는 거야? 참 소갈머리도 없구먼!” 하고 큰 소리를 친다. 하나님의 원칙에 별 경험이 없는 젊은 아이들은 돈 있고 알아주는 “배운” 사람들의 감화 때문에 주의 길을 벗어나 탈선하게 된다. 바로 그 때문에 시므리와 고스비의 그런 행동이 야훼 카나 의 노를 격발했던 것이다. (161.1)
 카나 는 결혼 관계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카나 는 결혼한 부부 사이에 한 쪽이 불충하고 속이며 가정을 파괴하는 짓을 할 때, 다른 한 쪽이 느끼는 분노를 말한다(잠 6:34; 27:4; 민 5:14, 30). 성경의 상상적 은유에서 그리스도는 신랑이고 그의 충성된 백성은 그의 신부이다. 그는 교회의 사랑을 시기하여 그를 따르는 자들을 유혹하여 영원한 사망의 길에 빠지게 하려는 각종 유혹자들을 보실 때 흥분하신다. 그러나 그의 반응에는 불안정하고 미성숙한 인간들이 나타내는 개인적 악한 감정 같은 것은 전혀 없다. 하나님은 말 한 마디로 백 마디 사상을 창조하실 수 있고, 당신이 원하시면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녀를 만드실 수 있다. 그러나 당신께서 피로 사신 아들과 딸들이 유혹을 받아 그에게서 돌아서고, 그의 가르침에 대한 신앙을 잃고, 그의 교회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고, 그가 성경에 분명히 계시하신 방법으로 그를 경배하지 않을 때는 그의 질투가 불일듯 일어난다. (161.2)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니라.’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신성하고 밀접한 관계는 결혼이란 상징으로 제시되었다. 우상 숭배가 영적 간음이라면, 그것을 불쾌하게 보시는 하나님의 감정을 질투라 하는 것은 적절한 표현이다”(PP 306). (162.1)
 사도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믿음의 자녀들에게 일어난 사태에 분노를 느꼈다. “이는 내가 경건한 질투(헬라어 젤로스[zēlos]는 히브리어 카나[qaná ]와 뜻이 같음]로 너희에게 질투를 느낌이라. 내가 너희를 한 남편에게 정혼시키나니, 이는 한 순결한 처녀로 너희를 그리스도께 바치려는 것이라. 나는 뱀이 간계로 하와를 속인 것 같이 너희의 마음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단순함에서 부패하여 그같이 떨어져 나갈까 두려워하노라”(고후 11:2, 3). 계속해서 바울은 다른 그리스도를 가르치고 그들의 하늘 신랑으로부터 이탈하도록 유혹하는 거짓 교사들에 대해 경고한다. 오늘날 우리의 학원들에는 창세기의 1장부터 11장까지를 더 이상 믿지 않을 뿐 아니라 하늘 성소 교리를 포기한 채 계속 우리의 청년 남녀들을 지도하는 교사들이 있다. 그들의 철면피한 위선은 엘 카나 의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162.2)
 하나님은 어떤 사람도 강압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인내와 재치로 이끄셔서 신부로 삼으신다. 그는 마음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며 들어오려 하신다. 신부가 그를 자기의 “주와 구속자”(Lord and Savior)로 받고 그의 가족에 가담하여 그의 것이 되면 그는 그녀와 매우 특별한 계약을 맺으신다. 그 후에는 이 관계에 어떤 교란이 일어나든지 그는 그것을 참아 주지 않으신다. 신부가 그 관계를 끝내기 원하면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유혹자가 있어 그녀와 그녀의 하늘 신랑과의 언약 관계를 훼방할 때는 야훼 카나 는 분연히 일어나신다. (162.3)
 영원하신 하나님, 예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과 충성이 변치 않게 지켜 주소서. (163.1)
 선지자 스가랴는 하나님의 백성의 고난에 대한 야훼의 천사의 반응을 이런 말로 기록했다: “나와 이야기하는 천사가 내게 말하기를 ‘너는 부르짖어 말하기를 만군의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예루살렘을 위하여, 또 시온을 위하여 큰 질투로 질투하노라. 또 내가 평안히 있는 이방을 심히 불쾌히 여기노니, 이는 내가 조금만 불쾌히 여겼더니 그들이 고난을 가중시켰음이라’(슥 1:14, 15). 이 글은 하나님의 백성을 압박한 이방 나라들의 지나친 포악성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와 질투를 말해 준다. (163.2)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에 대한 경고에서 주님은 그들이 당신의 선민을 가혹하게 다루고 하나님을 조소한 데 대해 당신의 감정을 표시하셨다: 엘로힘 은 질투하시며 주는 복수하시는도다. 주는 복수하시며 진노하시고, 주는 그의 대적들에게 앙갚음하시는도다.... 주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능력이 크시며, 악인을 결코 면죄해 주지 않으시며”(나 1:2, 3). 하나님의 인내가 끝나면 반드시 그 뒤엔 그의 응보가 뒤따른다. (163.3)
 유다 백성은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가고 지상의 하나님의 나라는 파괴되었다. 예레미야는 팔레스타인에 잔류한 남은 무리를 돌보고 있을 때 에스겔은 잡혀간 포로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그들 중 지도자 몇 사람은 선지자를 찾아와 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이런 참혹한 일을 당하도록 허락하셨는가 물었다. 주님께서 에스겔에게 예루살렘의 상태를 환상으로 보여주실 때, 선지자는 거기서 하나님의 질투를 유발하는 우상을 보았다. 삼 세기 전에 당신께 봉헌된 그 성전에서 우상 숭배가 본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겔 8:1-6). 무슨 우상이든지 우상이 경배의 중심을 차지하고, 사람의 마음속 하나님의 자리가 물질이나 인물로 대체될 때, 그 이름이 질투이신 주님은 도전을 받아 전쟁에 임하신다. (163.4)
 신부에게 구애하는 신랑 예수
 주께서 말씀하신 광야에 버려진 더럽고 가련한 유아의 비유는 아마도 구약에 기록된 그의 백성에 대한 사랑을 묘사한 가장 감동적인 그림일 것이다(겔 16:1-15). 주님은 원래 이 비유를 이스라엘에 적용하셨으나, 이 이야기는 각 시대의 당신의 교회에 적용된다. 조그만 고아, 아무도 원치 않아 광야에 버려진 외로운 핏덩이, 그대로 내버려두면 전혀 살 길 없는 여아가 있었다. 그 곁을 지나가다가, 마치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여아의 상태를 눈여겨본 그는 그 아이에게 동정과 사랑을 아끼지 않는다. 아무도 돌봐 주지 않는 그 아이를 자기가 맡아서 돌보기로 결심한다. 그는 아이를 안아 주고 씻어 주고 입혀 주고, 여러 해 잘 먹여 기르면서 그녀가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한다. 그러다가 “세월이 사랑의 때가 되었을 때,” 그녀에게 청혼한 그는 드디어 그녀를 아내로 삼는다. 그 후에도 사랑으로 계속 값비싼 선물을 그녀에게 퍼부은 그는 자기의 정성의 결과를 이렇게 말한다: “너의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네 명성이 이방인 가운데로 나갔으니, 이는 내가 네게 입힌 나의 우아함으로 인하여 완전하였음이라”(겔 16:14). 이 얼마나 완벽한 입혀주신 의와 나누어주신 의의 그림인가! (164.1)
 “그러나 ...”(15절).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이“그러나”가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그러나 너는 네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고 네 명성으로 인하여 음란한 짓을 하고 지나가는 모든 자들에게 네 음행을 쏟았으니 아름다움이 그들의 것이 되었느니라.... 너는 ... 앗수르인들과도 음란한 짓을 행하였으며, ...”(겔 16:15, 28). 그러나 만일 그녀가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한다면, 그는 이것을 약속하신다:“내가 너에 대한 나의 진노를 그칠 것이며 내 질투가 네게서 떠나리라. 그러면 나는 잠잠하고 더 이상 노하지 아니하리라”(겔 16:42절). 신랑인 그리스도는 자기의 사랑을 포기하기를 죽기보다 싫어하신다. 그녀가 번번이 속이는 말로 용서를 빌고 화해를 요청해 와도, 그는 그의 변치 않는 사랑을 이렇게 표시한다:“나는 너의 어린 시절에 너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며 너에게 한 영원한 언약을 세우리라”(60절). (164.2)
 전쟁의 날에 분발하는 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