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10. 엘 카나—질투의 하나님 (관심을 가지신 하나님)
 지금 우리가 연구하려는 하나님의 이름은 십계명의 둘째 계명 한가운데서 발견된다: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Éloheḵa, 엘로헤카)은 질투하는(qana',카나) 하나님(Él)이니”(출 20:5; 신 5:9). 이 계시는 엘 카나(Él qana')와 야훼 카나(Yahweh qaná)라는 두 이름을 우리에게 소개한다. (153.1)
 카나(qaná )는 극심한 감정으로 얼굴이 붉은 자색이 되거나 창백하게 변할 때 안색을 묘사하는 말에서 파생된 말로 감정 그 자체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는 말이다. 이 말은 경우와 용도에 따라 여러 가지 다채로운 의미로 쓰인다. 예컨대, 주님은 당신의 감정을 이렇게 표현하신 일이 있다: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들 가운데서 나를 위해 ‘질투’(qaná)하여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나의 진노를 돌이켰으니 내가 나의 ‘질투’로 이스라엘 자손을 진멸하지 않았도다”(민 25:11). KJV는 이 “질투하는”이란 말을 “jealous”(질투하는)가 아닌 “zealous”(열심있는)로 번역했다. 이 구절 원문에는 이 말이 세 번 나오는데, Jerusalem Bible은 세 번 다 “zealous”로 번역했다. “Zealous”는 헬라어의 젤로스(zēlos)에서 온 것으로, “열성, 열정, 불타는 마음”을 의미한다. 헬라어 구약은 언제나 히브리어의 카나(qaná )를 젤로스(zēlos)로 번역했다. 주님은 비느하스의 행동을 설명하실 때, “그가 그들 중에서 나를 위해 ... 나의 카나를 대신하여 ... 카나 를 발했으므로, 나는 카나 로 이스라엘 자손을 진멸하지 않았도다”라고 말씀하셨다(민 25:11). (153.2)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분노를 느끼지 않으실 수 없게 만든 백성들의 소행은 무엇이었는가? 성도덕의 문란과 우상 숭배를 초래한 바알브올에서의 배도의 결과(민 25:1-5),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명하셨다: “백성의 모든 우두머리들을 잡아다가 태양을 향해 주 앞에 그들을 목매어 달라. 그리하면 주의 맹렬한 진노가 이스라엘로부터 사라지리라”(4절). 그 때 음란한 자들은 수만 명씩 이름도 알 수 없는 역병에 걸렸다. 그러나 그들 중에는 회개하며 죄를 자복하는 기도로 다시 한번 하늘과의 올바른 관계를 갈구한 자들이 있었다. 백성들의 장막은 온통 들끓는 소란의 도가니였다. (154.1)
 이 엄중한 시간에 “이스라엘 자손이 회중의 성막 문 앞에서 울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자손 중 한 사람이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목전에서 한 미디안 여인을 데리고 그의 형제들에게”(26절) 나타났다. (154.2)
 발람의 제안을 통해 사단은 미디안의 청년 남녀들을 침투시켜 이스라엘로 하여금 도덕적 순결과 하나님께 대한 충절을 버리게 만들려고 획책했다. 그들은 종교적 모임을 주선하고 거기 두 민족의 청년 남녀들이 한데 어울려 먹고 마시고 사귀고 연애하며 하나님과 그의 원칙을 떠나 탈선하도록 일을 꾸몄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 당신의 백성이 이방인과 그들의 행습을 멀리하고 따로 떨어져 있으라고 설득하는 일에 모든 노력을 기울이셨다. (154.3)
 인생의 벼랑길에 설치된 하나님의 안전 난간
 어느 시대나 그랬다. 예를 들어 우리의 학교들은 너무나 “현실에서 동떨어진” “온실” 같고 우리는 자녀들을 거기 보내 “억지로” 격리되어 자라게 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우리 청소년들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성서적 사상과 생활 방법에 반대되는 다른 아이디어에 노출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 또 어떤 이들은 청년들이 올바른 원칙으로 훈련을 받으면 거짓된 것을 쉽게 알아차리고 피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논쟁은 고대 이스라엘 이후 기독교 역사를 통해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기적으로 온갖 피해를 속출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 “주 우리 하나님은 질투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그를 사랑하는 자들로부터 진지한 애정과 기탄 없는 신뢰를 요구하신다”(TC 3:248-249). 질투는 애정을 가로채는 경쟁자를 용납하지 않는다. (155.1)
 당신의 백성이 “세상에서 격리되어 따로 있게” 하기 위해 주님은 명확한 원칙을 제시하셨다. 그는 우리가 그의 안식일을 준수함으로써 그를 창조자와 성결케 하는 자로 공경하기를 바라신다. 그는 건강 법칙을 주셔서 우리가 그를 창조자로 공경하도록 도우시며 우리의 몸과 마음을 최선의 상태로 유지하게 하신다. 이 목적을 위해 우리는 그분이 허락하시고 그분이 권장하시는 음식물만 먹고 마셔야 한다. 그는 할례 의식을 주셔서 그것으로 우리가 그분과의 언약을 맺은 백성임을 표시하게 하셨다. (이것이 기독교 시대에는 침례 의식으로 바뀌었다. 골 2:11, 12.) 그는 성소 제도를 창안하시고 제사장 제도를 두셨으며, 각종 희생 제사와 연례적 종교 행사로 당신의 백성으로 하여금 구원의 계획을 항상 기억할 수 있게 하셨으며, 그로써 주변의 이방 민족의 영향에 대한 방비책을 삼으셨다. 또 그는 선지자들을 세워 그들이 이스라엘의 참 인도자인 당신을 대표하도록 하셨다. 총체적으로 이 모든 것은 당신의 백성을 그들의 이방 이웃들로부터 현격히 다르게 보존하기 위한 제도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들은 대안(代案)을 내놓았고, 결국에는 그 때문에 고대 이스라엘은 배도와 반역과 분산의 길을 가게 되었다. 오늘날도 그와 유사한 프로그램을 주창하는 이들이 있다. (155.2)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하나님께서는 모세 앞을 지나시며 모세의 기도의 응답으로 당신의 영광을 나타내신 일이 있었다. 모세를 보호하기 위해 그분은 모세를 바위 틈에 숨기고 그 어구를 손으로 가린 후 못박힌 “손”을 통해 보도록 하셨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그는 당신의 이름인 엘 카나 의 뜻을 설명하셨다. 당신의 백성에게 가나안의 이방 족속과는 친교, 혼인. 상거래를 포함하는 일체의 협약을 맺지 말 것과 그들의 우상 숭배에 가담하지 말 것을 경고하셨다. “너는 다른 신을 경배하지 말지니, 그 이름이 질투인 주는 질투하는 하나님임이니라. 그들은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숭배하며 그들의 신들에게 희생 제를 드리니, 너는 그 땅의 거민들과는 언약을 하지 말지니라. 누가 너를 청하면 너는 그의 희생 제물을 먹고 또 네가 그들의 딸들을 네 아들들에게 얻어 주고, 그들의 딸들이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숭배하며 네 아들들로 그들의 신들을 음란하게 숭배하게 할까 함이라. 너는 주조한 신들을 만들지 말지니라”(출 34:14-17). 여기서 주님은 먼저 자기의 특별한 성격을 말씀하신 후 대체물(代替物) 경배를 경고하셨다. (156.1)
 이 말씀에서 영감은 우리에게 몇 가지 최초 사항을 강조한다. 이방 민족과 인연을 맺어 그들의 거짓 신들이 이스라엘이 경배하는 참 하나님 자리를 대신하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창녀의 행위 같은 것이다. 이 은유로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백성과 모든 타민족과의 타협을 묘사했고(사 23:17; 렘 3:1; 겔 16:26, 28; 23:5, 43), 특히 유다와 예루살렘의 행위를 그렇게 묘사했다(겔 16:15-17; 23:3, 19; 렘 3:1, 6, 8). 하나님의 백성이라 공언하는 자들이 그들이 사랑하고 경배하고 순종해야 할 유일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떠나 그들의 애정과 충절을 다른 인간이나 대상에게 바친다면 그것은 “영적 간음”을 범한 것이 된다(호 9:1; 1:2; 4:12).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어떤 인간이나 물적 대상이 중심을 차지하고 그가 그것을 중심으로 살아갈 때 그것은 하나의 우상이 된다. (156.2)
 질투하시는 하나님
 영적 간음이 무엇인지 정의하신 하나님은 그 불충에 대한 당신의 반응과 감정을 질투(qaná)로 설명하셨다. 그러나 이야기를 더 진행하기 전에 이 연구의 첫머리에서 언급한 역사적인 사건 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157.1)
 이 때 양심에 가책을 느낀 많은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바알브올에서 저지른 배신 행위를 통회하며 울고 있었다. 여호와께서는 방금 모세에게 재판관들에게 내릴 명령을 주셨다: “너희는 각기 바알브올에 가담하였던 자들을 모두 죽이라”(민 25:5). 하나님의 백성의 영적 상태는 말이 아니었고, 두려운 위기에 도달해 있었다. (157.2)
 아무런 거리낌도 없이 자기의 독자성을 과시하려고 마음먹은 “실루의 아들이며, 시므온인들 가운데 주요 가문의 고관인” 시므리는 그의 애인인 이방 여인을 데리고 와서 우는 백성들이 번연히 보는 앞에서 여봐란 듯 자기 장막으로 들어갔다. 그 “여인의 이름은 고스비니, 수르의 딸이라. 수르는 미디안 명문 집 출신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우두머리였더라”(15절). 하나님의 뜻을 아랑곳하지 않는 그 오만불손하고 뻔뻔스런 행위에 분노(질투)를 느낀 아론의 손자 비느하스는 손에 창을 집어들고, 야훼 를 위해, 그들의 장막으로 달려들어가 그들을 처형하고 말았다. 그 결과 “그 역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멈추었다”(8절). (157.3)
 유망하던 백성의 지도자 한 사람이 그렇게 즉결 처분을 당한 것에 대해 당시 이스라엘의 자유주의 자들은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그들은 아마 겁에 질린 표정을 지으며 이런 말들을 했을 것이다: “하나님 참 무섭구먼, 너무 무자비하셔!” “그거 너무 생각이 좁은 거 아니야?” “그 사람 참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깝게 죽었어. 그대로 두었으면 이스라엘에 크게 공헌할 사람이었는데, ....” “그것은 한번 봐줬어야 하는 거야. 사람이란 변하기도 하니까 말이야, 안 그래?” 아마 독자들은 이런 논평을 심심찮게 들었을 것이고, 요즈음 유행하는 논조를 익히 잘 알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그 때 그의 특별한 성질인 신의 질투를 발휘하셨던 것이다. (157.4)
 카나 가 등장하게 된 배경
 이 사건에 대해 함부로 어리석은 반응을 보이기 전에 침착하게 생각해 보자. 성령께서는 이 사건을 통해 야훼 카나 를 계시하실 때, “질투하시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보이셨거니와 우리는 성경에서 그 이야기의 속편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 역병이 이스라엘 자손에게서 멈추었더라.... 그 역병으로 죽은 자들이 이만 사천 명이었더라. 주께서 모세에게 일러 말씀하시기를 ‘제사장 아론의 손자 엘르아살의 아들 비느하스가 그들 가운데서 나를 위해 질투하여(qaná ) 이스라엘 자손으로부터 나의 진노를 돌이켰으니, 내가 나의 질투심으로(qaná ) 이스라엘 자손을 진멸하지 않았도다. 그러므로 보라! 내가 그에게 나의 화평의 언약을 주리라. 그와 그 뒤를 잇는 그의 씨가 그것을 가지리니, 곧 영원한 제사장 직분의 언약이라. 이는 그가 그의 하나님을 위하여 열성이 있어(qaná ) 이스라엘 자손을 속죄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민 25:8-13). 하나님은 무조건 비느하스의 행위를 긍정적으로 받아 주셨고 그에게 크게 보상하셨을 뿐 아니라 백성들 중에서 그의 간증을 보고 회개한 자들을 살리셨다. (158.1)
 영원하신 심판자께서는 비느하스의 질투를 당신께서 느끼신 질투와 같은 것으로 설명하셨다. 이제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평가해 보자. 하나님의 백성은 실로 큰 위기를 당하고 있었다. 그들은 약속의 땅 변경에 와 있었고 사단은 아주 간교한 방법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수만 명을 유혹하는데 성공하고 있었다. 사단은 그들을 하나님께서 지면에서 쓸어버리라고 명한 이방인들과 상관하도록 유인했다. (158.2)
 이 혼란과 배도와 눈물과 회개와 재 헌신의 와중에 한 뻔뻔스런 히브리 귀공자와 사양할 줄 모르는 미디안의 유명 가문의 규수, 이 두 사람은 다 알 만한 사람들이요 영향력 있고 지도적 입장에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명하신 금기 사항을 고의적으로 또 공개적으로 도전했던 것이다. 그들은 사정을 충분히 알면서도 그렇게 처신하기로 선택했고 그들의 소행은 하나님의 경고를 정면으로 무시한 행위였다. 그것은 자신들의 행위의 결과를 아랑곳하지 않는 반역 정신의 발로였다. 그들은 잘 생기고 부유하고 영향력 있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 할 중요한 위치에 있는 자들이었다. 만일 중지되지 않았다면 그들의 행동은 흰개미 떼가 집의 기초를 갉아먹듯 교회의 바탕을 잠식하여 파괴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한 지도자를 일으켜 그로 하여금 그들을 처단하고 이스라엘을 구원하게 하셨다. (15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