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하나님의 돌보심으로서의 노동
 네째 계명 속에 나와 있는 6일간의 노동과 제칠일의 휴식의 방식은 창조의 주일에 근거하여 마련된 것이다(출 20:11). 네째 계명은 6일간의 노동과 제칠일의 휴식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사실 일곱째 날에 쉬라는 명령 앞에는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출 20:9; 신 5:13)이라는 명령이 있는 것이다. 이것은 6일간의 노동이 제칠일에 안식하는 경험에 이르기 위한 전주곡 또는 필수적인 순례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80.1)
 하나님이 6일간의 노동과 제칠일의 휴식을 제도화 하신 것은 인간의 복지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 때문이었다. 우리는 경험을 통하여 노동과 휴식이라는 것이 인간의 진정하고 중요한 두 필요임을 깨닫는다. 일거리가 없는 사람은 자신을 무용지물로 느끼게 된다.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며 자신의 창조적 능력을 개발하고 항상 활동하시는 창조주의 형상을 반영키 위해서는 일이 필요하다. 타락하기 이전에도 인간의 생명을 앙양시키는 보람있는 활동으로서 노동의 가치가 인정되었다면 나태로 말미암아 인간들이 수 많은 악덕과 범죄에 빠지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야 그 필요성이 얼마나 더 크겠는가! (80.2)
 그러나 동시에 명심해야 할 사실은 오늘날 사람들이 먹고 살기 위하여 수행해야만 하는 여러가지 기계적이고 단조로운 직업들은 개인적인 성장과 성취에 별다른 도움이 안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직업들은 인간을 비인간화 시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은 주일 중 작업 일수가 줄어들므로 말미암아 더 큰 부요함, 충족감, 쾌감을 주는 개인적인 계획을 가질 기회가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80.3)
 2. 하나님의 사랑으로서의 휴식
 강제적인 것이든 자원해서 하는 것이든 만약에 그것이 휴식에 의하여 균형이 잡혀지지 않을 경우에 모든 형태의 노동은 압제적이고 가혹한 주인으로 둔갑해 버린다. 가혹스런 노동의 형태들은 인간의 성격을 타락시키며 육체와 정신 사이의 균형을 허물어 버리며 결국 사람을 짐승으로 바꾸고 만다. 이것은 남에게 예속된 노동자들이 자주 비양심적인 주인들에 의하여 압제를 받고 착취 당하던 고대의 농경 사회들에서만이 아니라 기계로 말미암아 개인의 개별성이 황폐되고 있는 현대의 기술사회에 있어서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진실이다. 또 몇몇 경우에 서는 사람들이 순전히 만족할 줄을 모르는 탐욕 때문에 간단없이 일만 함으로서 급기야는 더 큰 이득의 노예로 전락되고 있다. (80.4)
 하나님은 인간이 탐욕적인 야망에 대하여 얼마나 취약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잘 알고 계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고용자와 피고용인을 모두 간단없는 노동의 무분별로부터 보호하시고자 하여 안식일 계명을 주시어 사람들은 노동을 해야 할 뿐만 아니라 쉬기도 해야한다고 명령하셨다. 앞으로 여러 장(章)에 걸쳐 우리는 안식일 휴식의 여러가지 중요한 기능들에 대하여 검토하게 될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안식일이 인간에게 제공하는 해방에 대해서 주의를 기울여 보자. (80.5)
 휴식, 노동으로 부터의 자유. 안식일의 쉼은 주인과 종과 동물들(출 20:10; 23:12; 신 5:14)을 위한 노동으로 부터의 자유를 뜻하고 있다. 어찌하여 안식일의 쉼 속에는 “말 못하는 짐승들”까지 포함되어 있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동정심이 비 지성적이고 무방비 상태에 있는 피조물들에까지 미치고 있기때문이다. 이같이 안식일의 쉼 속에 만물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어 주는 것이 아닐까? 그뿐 아니라 “네 계집 종의 자식과 나그네”(출 23:12)를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분명히 이사람들이 타인의 명령과 착취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할 아무런 보호 수단이나 의지할 언덕이 없는 부류들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안식일의 휴식은 특별히 우리 사회 속에 있는 무의무탁한 사람들의 인권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하겠다. (81.1)
 그러면 우리 사회에 있는 “일벌레들”에 대해서는 안식일이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안식일의 쉼은 자신들의 노동 속에서 궁극적인 성취를 찾고저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는 하나님의 치료가 아닌가? 안식일의 쉼은 우리에게 인생의 주 목적이 마르크스 주의가 주장하듯 노동으로 자연을 변형시키는 데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임재와 창조를 즐기기 위하여 안식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다. 또 안식일의 쉼은 사물로부터의 자유도 가르쳐 준다. 가장 배우기 어려운 교훈의 하나는 어떻게 하면 사물에 탐익하지 않으면서 사물을 소유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또 자신의 독립성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살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안식일에 상품의 생산이나 구매 활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사물로부터의 독립과 초월을 배우며 성령에 대한 집착과 의존을 배운다. (81.2)
 안식일의 쉼은 탐심으로부터의 자유를 조장시킨다.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이웃의 생활 수준에 따라갈 수 있는 추가 수입을 얻기 위하여 고대 이스라엘 자손들처럼(출 16:27) 안식일에 부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아무 것도 얻지 못했다”(출 16:27)고 하여 그같은 노력의 어리석음을 지적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런 사람들은 육적인 만나는 물론 영적인 만나까지 얻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결국 불만족과 불안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안식일은 탐욕스러운 마음에게 고마움을 느끼도록, 즉 더 많은 것을 찾아 분망하는 대신에 이미 얻은 것에 대하여 감사함을 느끼기 시작하라고 가르친다. 감사하는 마음을 배우는 사람은 내적인 평화를 경험하게 된다. 감사함을 느끼는 마음이야말로 그리스도와 그의 평화의 처소이기 때문이다. (81.3)
 쉼, 하나님을 위한 자유. 안식일의 쉼은 하나님을 위한 자유를 뚯하고 있다. 하나님은 제칠일을 전적으로 피조물들과의 만남을 위해 사용하심으로 피조물들에 대한 당신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인간도 이와같이 하나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를 잘하여 하나님의 사랑에 응답하기를 바라고 계신다. 이같은 이유에서 네째 계명은 제칠일을 “여호와 너의 하나님께”(출 20:10) 자유스럽게 바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고 명하고 있다. 따라서 안식일의 쉼의 목적은 필요한 육체적 원기회복을 공급해주는 단순히 인도적인 것만이 아니다. 만약에 안식일의 쉼의 기능이 이것으로 끝난다고 한다면 현대인들을 위한 안식일의 가치는 미심쩍고 의심스러워진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이미 한 주일에 이 삼일씩은 제마음대로 여가를 위해 사용할 수가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82.1)
 그뿐만 아니라 해야할 일이 하나도 없는 것 이상으로, 그리고 어떤 의미있는 활동을 재개하기 위하여 안식일 시간이 지나가기만을 초조히 기다리는 것 이상으로 침울한 일이 또 있는가? 만약 이것이 안식일의 쉼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그때는 이와 꼭같은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한 다른 합리적인 계획들이 즉각적으로 고안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게도 많은 사람들이 원거리 여행, 운동 경기, 알콜, 불장난 같은 연애유희 따위로 “원기회복”을 기하려 하는 것도 필시 안식일 휴식에 대한 이같은 오해 때문일 것이다. 이같은 행동들은 인간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새로운 부담을 추가시킬 뿐이다. (82.2)
 그러나 성경에는 안식일의 쉼에 대한 조건이 나와 있다. 안식일의 쉼은 들뜬 기분으로 즐기는 시간이 아니라 “여호와께 거룩한 날이다”(출 31:15; 16:23~25; 20:10; 레 23:3). 안식일은 인간에게 주어진 날이면서(출 16:29; 막 2:27) 또 야웨에게 속한 날이다.(출 16:23, 25; 사 56:4; 58:13; 막 2:28) 따라서 안식일에 쉬는 인간의 쉼은 모든 소원과 소망이 속박없이 성취될 때 나타나는 자기 중심적(또는 인간중심적) 이완(池緩)이 아니라 개인이 일에 대한 걱정을 떨쳐 버리고 하나님을 위해 자유로운 자가 되는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다. 이와같은 새로운 자유 속에서 인간은 진정한 원기회복을 경험한다. 칼바르트가 힘주어 강조했듯이 “거룩한 날을 지킨다는 것은 감사와 중보를 공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회중 속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증거하며 선포하는 일에 참가하기 위하여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거룩한 날이 주는 축복과 유익은 명백히 이같은 자유의 적극적인 활용에도 달려있는 것이다.”13 (82.3)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에게 당신의 앞에서 자유롭게 되고 당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우리기 위하여 안식일에는 일로부터 자유로운 자가 되라고 권고하고 계신다. 아퀴나스의 말을 사용해서 말한다면 안식일의 쉼은 “하나님과 함께 휴일을 보내라”는 초청이다(ad vacandum divinis).14 하나님과 동료 인간들과 함께 안식일 휴일을 보내지 못한다고 할 때 그 주일은 얼마나 불쾌한 날들이 될까! 그러한 주일들은 마치 소오스가 가미되지 않은 스파게티처럼, 또는 소금을 치지 않은 음식처럼 맛 없는 날들일 것이다. 향굿한 소오스가 스파겟티의 맛을 돗구듯, 즐거운 안식일이 있음으로 해서 한 주일의 평일들이 즐거운 광채를 발휘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음의 한 노래가 기쁜 이러한 진리를 읊고 있다. (82.4)
 

하나님 그리고 동료 이웃들과 함께 지내는 안식일이 없다면 그 주간(週間)은 얼마나 메마른 것일까! 그러한 주간들은 소오스 없는 스파게티 처럼, 소금을 치지않은 음식처럼 무미한 것이 될 것이다. 마치 소오스가 스파게티의 맛을 나게한듯 즐거운 안식일이 있음으로 하여 근무하는 날들도 축제의 미광(徵光)이나마 내뿜게 되는 것이다.
(83.1)
안식일을 기쁘게 지낸 날은
한 주일이 온통 만족스럽고
내일의 수고도 기쁨으로
기쁨으로 기다린다.

안식일이 욕을 입으면
얻는 것이 무엇이든
비애의 전조일 뿐이어라.
(84.1)
 안식일의 쉼은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관심을 나타내어 주고 있는가! 이것은 인간의 자유를 위한 하나님의 염려와 계획을 요약하고 있다. 그리고 이 자유는 곧 노동의 횡포로부터의 자유, 무자비한 인간의 착취로부터의 자유, 물질과 사람들에 대한 지나친 집착으로 부터의 자유, 만족할줄 모르는 탐욕으로부터의 자유, 새로운 열정과 힘을 갖추어 새로운 주일을 시작하기 위하여 안식일에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자유를 의미한다. (84.2)
 하나님의 관점. 노동과 휴식의 제도가 뜻하는 하나님의 관심의 다른 한 면은 그러한 제도가 인간의 노동과 휴식을 위하여 마련해 주고 있는 하나님의 관점속에 나타나 있다. 노동과 휴식의 개념과 경험은 인간적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들을 먼저 하나님께 적용시키고 있다. 왜 그랬을까? 이 세계를 순간에 말씀으로 창조하실 수 있던 전능하신 하나님이 6일 동안에 이 세계의 창조를 마치고 제칠일에 쉬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피조물들을 위하여 제정된 그 시간의 주기(週期)를 이용하셨을까? 이것은 인간의 모든 노동과 휴식에 대한 하나님의 관점을 보여 주시려는 마음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을까? (84.3)
 인간이 경험하는 가장 큰 만족의 하나는 그것이 음악, 미술, 과학, 교육, 상업, 정치, 종교, 어느 분야에 관한 것이든 간에 최대의 거장을 모방하는 일이다. 젊은 팬들이 자신들의 “우상”의 머리 모양, 복장, 몸짓, 노래 둥을 모방하는 것을 보노라면 유쾌할 때가 없지 않다. 마찬가지로 안식일 준수자도 안식일을 지킴으로써 하나님이 무한한 규모로 행하셨고 지금도 행하시고 계시는, 바로 그일을 자신이 조그마한 규모로나마 행하고 있다는 확신 때문에 만족감과 성취감을 갖게 된다. (84.4)
 그렇다고 해서 안식일 준수자는 자기가 하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소명(匕命)으로 생각해야 하는가? 상한 심령을 치료하는 목사들이라면 쉽게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다 타버린 클러치를 수선하는 기계공이라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그 사람도 목사와 똑같이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의 소명으로 확신할 수 있을까? 바울은 천막을 제조하여 밥을 벌어 먹었으나 한번도 그가 하나님이 자기에게 천막 제조하는 일에 부르셨다고 말한 일이 없다. 그러나 그는 분명하게 자신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롬 1:1)고 하였다. 직업들 중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소명으로 간주하기 어려운 것들도 많다. 그러나 안식일 계명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라”(출 20:9; 신 5:13)고 명한다. 분명히 이일 속에는 유쾌한 것과 불쾌한 것, 매혹적인 것, 천한 것, 거룩한 것, 속된 것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8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