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림 전 조사심판의 성경적 기초 조사심판의 역사 제5장 조사심판 교리의 밀러주의적 뿌리
 조사심판에 관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교리는 신학에 못지않게 역사와도 관련이 깊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이 교리가 특정한 역사적 배경으로부터 생성되었다는 것이다. 그 역사가 바로 밀러의 운동이다. 윌리엄 밀러와 그의 추종자들의 생애에 있었던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현재 재림교회가 이해하는 형태대로의 조사심판 교리를 그 누가 생각해낼 수 있었을지 의심스럽다. (64.1)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판단을 조사심판에 관한 우리 교리의 타당성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는 근거로 제시할 것이다. 그들도 그 교리가 밀러 운동의 결과로 발전되었다는 점에는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바로 그 점이 그 교리에 의문을 품는 이유가 된다 그들은 그것이 상한 냄새가 나고, 김 빠지고, 무익한,” “엄청난, 심리적, 신학적 면피 현상”1)일 뿐이라고 여긴다. 나는 하나님께서 밀러의 운동을 인도하셨고,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조사심판에 관한 이해가 그 운동으로부터 일어난 과정도 인도하셨음을 논증할 것이다. (64.2)
 물론, 하나님께서 밀러의 생애 후반에 일어난 사건들의 배후에 계셨다는 사실을 과학적인 증명 방법에 따라서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밀러 운동과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설립 과정에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생각은 신앙의 문제이다. 그 역사는 1844년 직후 몇 년 간의 안식일을 준수하는 재림신도들의 이야기와 함께, 우리가 어떻게 조사심판에 대한 이해에 이르게 되었는지 말해준다. 대다수의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이 이야기와 꽤 친숙할 것이다. 그 이야기를 잘 모를 수도 있는 분들을 위해서 여기에 요약해 보겠다. (64.3)
 윌리엄 밀러의 이야기
 윌리엄 밀러는 그의 생애 대부분을 버몬트 주의 경계선 바로 너머 뉴욕주의 로햄프턴(Low Hampton)에서 살았다. 청년 시절 그는 이신론자(理神論者)로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기는 했지만 그 후로는 그분이 정해 놓은 법칙을 따라서 작동되도록 내버려두고 전혀 개입하거나 심지어 관심을 가지지도 않는다고 믿었다. (65.1)
 그 후 1816년에 밀러는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의 회의적인 이신론자 친구들이 그의 새로운 신앙에 도전해 왔으므로 그는 성경을 상세히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특히 다니엘의 예언들에 매혹되었다. 역사적인 방법으로 해석했을 때 그 예언들은 바벨론 제국 시대로부터 세상 끝까지 역사의 윤곽을 보여주었다. (65.2)
 8장에 기록된 예언은 “이천삼백 주야까지니 그 때에 성소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였느니라.”(8:14)라는 말로 끝나있다. 밀러는 그 성소는 지구이고, 그것의 정결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세상이 불로 소멸되는 것이라고 이해했다. 따라서 그는 그 예언이 언제쯤 다시 오실지 대략의 시기를 예고하였다고 결론지었다. “2,300주야”는 실제로는 2,300년을 나타내는 상징적인 표현이고 그 기간은 기원전 457년에 시작된다고 생각한 그는 1843년에 예수께서 재림 하실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밀러는 1818년에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고 충격에 휩싸였다. 그것은 그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자면, “25년 정도만 지나면 우리의 모든 현재 상황이 끝장”2)이날 것이라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65.3)
 그러자 밀러에게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것을 세상에 전해야만 한다는 확신이 생겼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대중 연설가로서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기 때문에 자신의 주장을 전파하기를 망설였다. 그러나 자신의 발견을 공유해야 한다는 확신은 커져 갔다. 마침내 1831년 8월 어느 토요일 아침, 그러한 느낌이 너무 강하였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길을 열어주신다면 설교 하겠다고 하나님에게 약속했다. 약 30분 후 그는 로햄프턴에 있는 자기 집에서 26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뉴욕 주 드레스덴의 한 침례교회에서 바로 다음 날 설교해 달라는 초청을 받았다. 이제 참으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설교하도록 부르셨다는 확신을 얻은 그는 초청을 받아들였다. (65.4)
 밀러의 설교에 깊은 감명을 받은 회중은 이어서 한 주일 동안 그의 예언 해석을 계속해 달라고 간청하였고, 그는 그렇게 하였다. 인근 마을의 사람들도 그의 설교에 대하여 듣고 그의 말씀을 들으러 왔다. 부흥이 일어나고 여러 사람이 회심하였다 밀러가 집으로 돌아오니 인근 버몬트 주 폴트니(Poultney)의 교회에서 또 설교를 해 달라고 초청하는 편지가 와 있었다. 결과는 드레스덴에서와 같았다. 이렇게 밀러 운동은 시작되었다. (66.1)
 밀러 운동
 그 후 8년 동안 밀러는 주로 작은 마을들에서 설교했다. 하지만 1839년 보스턴에 있는 차든 스트리트 채플(Chardon Street Chaple)의 목사인 조슈아 하임즈(Joshua V. Himes)가 그에게 자기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고 초대하였다. 이것이 밀러가 소도시의 설교자에서 유력한 대중 전도자로 변신하게 된 시초이다. 하임즈는 밀러의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비전과 영혼을 향한 열정을 포착한 후 밀러를 일약 유명 인사로 만들었으며, 그 가르침의 열성적인 추진 세력이 되었다. 그는 신문을 발행하고, 15회에 걸친 재림운동 지도자들의 “총회” 개최를 도왔으며,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130회 이상의 야영 집회를 열었다. 밀러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군중이 운집했다. 수십 명의 목사들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반대가 일어났으나, 그것은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밀러 운동은 그렇게 진척되었다.

 
✻ 1844년 10월 22일까지 윌리엄 밀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는 5만에서 50만 명까지 추산된다. 어림잡아도 10만 명은 됐을 것이다. 그것은 1844년 미국의 2천만 인구 중 1퍼센트의 절반이 되는 수이므로 얼핏 보기에는 낮은 비율이다. 하지만 그 0.5퍼센트가 약 5년 사이에 이루어진 수이다. 그 숫자를 잘 보면, 오늘날의 미국이라면 그와 비슷한 운동이 단 5년 만에 150만의 지지자를 얻었다는 말이 된다. 그 정도의 엄청난 종교 운동이 일어난다면 상당한 관심을 끌었을 것이 분명하다! 밀러 운동은 그랬다. (66.2)
 1843년에 와서 밀러는 자신의 예언 해석을 더 다듬어 그리스도께서 1843년 3월 21일에서 1844년 3월 21일 사이에 재림하실 것이라고 내다보기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열광은 더해갔다. 하지만 1844년 3월 21일이 지나가도 예수는 오시지 않았다. 밀러와 그의 추종자들은 혼란과 실망을 겪었으나 그분의 오심이 매우 임박하였다고 계속 믿었다. (67.1)
 그러고 나서 1844년 8월 말에 그들을 흥분시킬 만한 뉴스가 터졌다. 지금까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던 밀러운동의 설교자 새뮤얼 스노(Samuel Snow)가 뉴햄프셔 주 엑시터(Exeter)에서 열린 야영 집회에서 다니엘 8:14에 나오는 “성소의 정결”과 히브리인들의 속죄일의 관계에 대하여 설명하였다. 속죄일 역시 “성소의 정결”과 관련된 절기였다(참조 레 16장). 유대인들의 속죄일의 원형이 성취되는 때를 다니엘 8:14이 예언하고 있다고 그는 말하였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가 될 것이었다. (67.2)
 스노는 이어서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인의 유월절을 성취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의 종교력으로 그 절기 중 바로 그 날에 예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오순절의 성령 강림(참조 행 2장 ) 또한 유대의 종교력으로 그 절기 중 바로 그 날에 일어났다. 스노는 결론 내리기를 같은 방식으로 유대 종교력의 속죄일 바로 그 날에 신약시대의 속죄일이 성취되고 “성소의 정결”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유대력으로 1844년에 속죄일은 10월 22일이었다 따라서 스노는 예언하였다 10월 22일에 예수께서 오실 것이다! (67.3)
 처음에 밀러 운동의 주요 지도자들은 스노의 주장을 반대했었다. 그러나 그가 시작한 운동은 댐을 무너뜨린 거센 물살처럼 퍼져가기 시작했다. 굉장한 부흥이 일어났다 많은 회심이 일어났다. 범죄자들이 자수하고 재판을 받으러 나아왔다. 사람들은 재산을 팔아 그 돈을 “그 대의”를 위하여 기부하였다. 조슈아 하임즈도 10월 22일 날짜를 수용하고 유럽 여행을 취소한 채 증기 인쇄기를 가능한 한 빨리 돌려서 그의 출판물의 호외를 인쇄하였다. 10월 6일에는 밀러 본인도 10월 22일 날짜를 받아들였다 밀러주의자들의 집회는 10월 22일 직전의 두 주일 동안 계속해서 열렸으며 기대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마지막 주에 상점 주인들은 업소의 문을 닫았으며 농부들은 작물을 수확하지 않고 버려두었다 그리고 10월 22일, 뉴잉글랜드 전역에서 신자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예수 재림의 날이었다! 이제 곧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을 것이었다! (68.1)
 그러나 10월 22일이 지나도 예수님은 오시지 않았다! (68.2)
 기다림이 달콤했던 만큼 실망은 썼다. 하이럼 에드슨은 “우리의 가장 큰 희망과 기대가 깨어졌다. 전에 겪어보지 못한 침울한 분위기가 우리에게 닥쳤다. 이 땅의 친구들을 다 잃어버린다 해도 그와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날이 샐 때까지 울고 또 울었다.”3)라고 썼다. (68.3)
 밀러 운동의 여파
 1844년 10월 23일, 밀러 운동에 가담했던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혼란이 있었다. 회의주의자들은 망연자실한 신자들을 조롱하기에 바빴다. 밀러의 추종자들 중 대다수는 그의 예언 해석이 비극적인 실수였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 운동 전체를 충성스럽기는 했지만 불행한 실패로 여기며 떠나갔다 일부 추종자들은 밀러의 기본적인 가르침에는 여전히 확신을 가졌지만 날짜를 잘 못 계산했다고 결론지었다. 수년 간 이 밀러의 무리는 재림의 날짜를 몇 번이나 더 정해보았지만, 결국 다니엘 8:14에 기초해서는 아무도 예수께서 지구에 재림하는 시기를 계산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밀러 운동의 초창기 지도자들은 대부분 이 부류에 속하였다. (68.4)
 하지만 1844년의 실망으로부터 발생한 또 다른 무리가 있었으니, 후에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로 발전된 사람들이었다. 이 무리는 밀러의 연대는 정확하였다고 결론을 내렸다. 틀린 것은 그 날에 일어난 사건이었다 이후 몇 년 동안 그들은 연구하며 기도하였고, 마침내 1844년 10월 22일이 조사심판이 시작되는 날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들이 어떻게 해서 그러한 결론에 도달하였고, 그 이후로 어떻게 발달하였는지가 다음 장에서 다룰 주제이다. (6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