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8년 동안 밀러는 주로 작은 마을들에서 설교했다. 하지만 1839년 보스턴에 있는 차든 스트리트 채플(Chardon Street Chaple)의 목사인 조슈아 하임즈(Joshua V. Himes)가 그에게 자기 교회에서 설교해 달라고 초대하였다. 이것이 밀러가 소도시의 설교자에서 유력한 대중 전도자로 변신하게 된 시초이다. 하임즈는 밀러의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비전과 영혼을 향한 열정을 포착한 후 밀러를 일약 유명 인사로 만들었으며, 그 가르침의 열성적인 추진 세력이 되었다. 그는 신문을 발행하고, 15회에 걸친 재림운동 지도자들의
“총회” 개최를 도왔으며, 뉴잉글랜드 지역에서 130회 이상의 야영 집회를 열었다. 밀러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군중이 운집했다. 수십 명의 목사들이 그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반대가 일어났으나, 그것은 오히려 불난 데 기름을 붓는 격이었다. 밀러 운동은 그렇게 진척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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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44년 10월 22일까지 윌리엄 밀러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는 5만에서 50만 명까지 추산된다. 어림잡아도 10만 명은 됐을 것이다. 그것은 1844년 미국의 2천만 인구 중 1퍼센트의 절반이 되는 수이므로 얼핏 보기에는 낮은 비율이다. 하지만 그 0.5퍼센트가 약 5년 사이에 이루어진 수이다. 그 숫자를 잘 보면, 오늘날의 미국이라면 그와 비슷한 운동이 단 5년 만에 150만의 지지자를 얻었다는 말이 된다. 그 정도의 엄청난 종교 운동이 일어난다면 상당한 관심을 끌었을 것이 분명하다! 밀러 운동은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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