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9 장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고동침:속죄의 완성
 자료를 하나만 언급한다면, 해석자의 성경사전(The Interpreters Dictionary of the Bible)은, 영어 단어 “atone”(속하다)이 평범한 구절 인 “at one”(하나로)에서 파생했다고 적고 있다. 누군가와 “하나가 된다”는 말은 곧 그와 조화 혹은 일치의 상태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단어가 영어의 어휘 속으로 들어 왔을 때 그것은 “at onement”(하나됨) 곧 화목을 의미하였다. 우리는 이런 정의가 속죄를 일종의 상태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21) (172.4)
 오늘날에는 이런 원래 의미가 수정되어, 속죄란 말이 좀 더 제한된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제 일반적으로 그것은 “속죄”의 원래 의미가 보여 주는 것처럼 화목을 막는 장애물의 제거를 통해 이룩된 목적상태를 가리키기보다는 그것의 과정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173.1)
 이것은 현대인에게 매우 중요한 뉘앙스로서, 우리가 속죄라는 용어의 오해를 피하기 위해 주의하여 염두에 두어야 할 사항이다. 재림교인들은 그 용어를 사용할 때 원래 의미 또는 문자적 의미뿐 아니라 좀 더 제한적이며 현대적인 의미를 포함시킨다. (173.2)
 그러므로(엘렌 G. 화잇을 포함하여) 재림교인들이 속죄가 십자가에서 끝났다고 말할 때 그들은 그 단어의 좀 더 현대적 용례를 채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른 개신교인들과 함께, 화목을 막는 장애들을 제거한 우주적 대(大)처리 곧 십자가의 최상의 희생이 영원히 끝나 더 이상 되풀이될 필요가 없음을 의미한다. (173.3)
 적어도 나는 진정한 재림교인이 십자가를 추호도 경히 여기지 않는다는 점에 전적으로 만족한다. 재림교회의 입장은 십자가를 그것이 있어야 할 바로 그 위치 곧 중심에 둔다. 또한 기꺼이 듣고자 하는 모든 이에게, 하늘 성소에서 하시는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현재적 봉사의 전적인 근거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단번에 드린 십자가에서 이뤄진 구속임을 거듭 역설한다. (173.4)
 이렇게 강조하는 선두에 바로 엘렌 G. 화잇이 서 있다. 누구든지 이 점에 관한 그녀의 진술들의 강도와 깊이에 만족하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다. “죄를 위한 속죄로서의 그리스도의 희생은 다른 모든 진리들을 한데 묶는 대(大)진리이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있는 모든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고 파악하기 위해서는 갈바리 십자가에서 흘러나오는 빛 안에서 그것들을 연구해야 한다. 나는 그대들 앞에 자비와 중생, 구원과 구속의 장엄한 대(大)기념비 곧 십자가에 높이 들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소개하는 바이다. 이것은 우리의 목사들이 전하는 모든 설교의 기초가 되어야 한다.”23) (174.1)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복음이었다∙∙∙.이것은 우리의 기별, 우리의 논증, 우리의 교리, 회개하지 않는 자에게 보내는 우리의 경고, 슬퍼하는 자를 위한 우리의 격려, 모든 신자를 위한 소망이다. 만약 우리가 사람들의 마음 가운데 관심을 일깨워 그들의 눈을 그리스도께 고정시킬 수만 있다면, 다른 것을 제쳐두고서 오직 그들의 눈을 계속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에 고정시키라고 요청해야 할 것이다.”24) (174.2)
 일라이샤 호프먼(Elisha Hoffman)이 지은 속죄에 관한 찬미는 재 림교회의 공식 찬미가에 적어도 45년 동안 들어 있었고, 우리는 지금도 여전히 그 찬미를 부른다. (174.3)
주 예수 내 죄 속하니,
놀라운 구주!
나 구속함 받았네!
내 죄 값 다 갚았네!
놀라운 구주!25)
(175.1)
 그러므로 재림교인들이 하늘 성소에서 최종적 속죄가 일어나고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앞에서 묘사한 영어 단어 “atonement”(속죄)의 원래 의미 곧 “하나됨”(at—one—ment)의 상태로 이끄는 활동이라는 배경에 비추어 이해되어야 한다. 그들의 말은 십자가의 중심성을 경히 여기지 않고, 오히려 십자가는 갈바리 곧 A.D. 31년을 넘어서 하나님의 정부의 자리, 인간 구원의 신경 중추인 하늘 성소 자체, 다시 말해서 예수께서 휘장 안에 들어 가사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된 곳에 미친다는 것을 나타낸다. (175.2)
 기독교신학사전(A Dictionary of Christian Theology)은 속죄의 이런 종말론적 국면을 인정하고 있다. “속죄 교리는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구속하는 역사에 대한 신학적인 해석, 엄밀히 말해서 속죄 교리만이 아니라 심판과 부활을 포함한 종말론까지도 아우르는 기독교의 모든 구원 교리의 한 요소이다.”26) (175.3)
 또한 이 문제와 관련해, 존경받는 개혁주의 신학자 L. 벌코프(L. Berkhof)의 진술은 적절하다. “그리스도의 제사장 사역의 위대하고도 중심적인 부분은 속죄에 놓여 있지만, 물론 그것은 간구 없이는 완결 되지 않는다. 지상에서 하신 그의 희생적 사역은 하늘 성소에서의 봉사를 필요로 한다. 이 둘은 구주의 제사장 사역의 상호 보완적인 부분이다.”27) (175.4)
 더 넓은 국면
 재림교회가 가르치는 속죄의 폭넓은 개념은 고대의 표상적 제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에서 나온다. 대부분의 개신교도들과 보조를 같이하여 우리도 고대 성막과 관련된 모든 표상적 제의(祭儀) 제도가 우리 주님의 삶과 죽음을 가리켰고, 그에 따라 십자가에서 그 성취를 만났음을 주저함 없이 지지한다. 여기서는 얼버무릴 여지나 이 점에 대해 구실을 삼을 여지나 어줍잖게 더듬거릴 여지가 전혀 없다. 그렇다. 그것들은 십자가에서 성취되었다! (176.1)
 하지만 대속죄일에 있었던 고대의 예식을 되돌아보면 십자가에서 완전한 성취를 보지 못한, 욤 킵푸르와 결부된 중요한 상징적인 사항 몇 가지를 확인할 수 있다. (176.2)
 예컨대, 레위기 23:26~29에 묘사된 대로 대속죄일 준수를 대비하여 이스라엘 온 나라가 한 엄숙한 준비를 생각해 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칠월 십일은 속죄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이 날에 스스로 괴롭게 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백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 (176.3)
 십자가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에게 이 같은 반응에 견줄 만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십자가 전날 밤에, 인류의 역사상 가장 엄청난 사건이 발생하려 한다는 사실을 인식한 자가 이스라엘에 아무도 없었다. 열두 제자들마저도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표상적 대속죄일을 위한 준비에서 볼 수 있는 가슴을 치는 일도, 깊은 통회도, 영혼을 괴롭게 하는 일도 없었다. (176.4)
 그러나 하늘 성소에서 벌어지는 심판과 결부된 최종적 속죄의 개념은, 고대의 예식에 예표된 것처럼, 새 언약의 이스라엘에게 의식적이고 영적인 참여를 요구한다. 옛 선지자가 본바, 신비스런 천사가 공중에 날아가면서 “땅에 거하는 자들 곧 여러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백성에게 전할 영원한 복음”을 가지고 큰 음성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계 14:6, 7)라고 선포한 때는 바로 종말론적 심판이 시작된 지금이다. 지금은 심판의 때이다. 지금은 원형적 대속죄일이다. 지금은 가슴을 칠 때이다. 지금은 “영혼을 괴롭게” 해야 할 시간이다. 지금은 모든 나라의 관심을 하늘 성소에서 벌어지는 이 엄숙한 새 국면으로 돌려야 할 때이다. (177.1)
 두 번째 예로, 아사셀을 위한 염소의 추방을 들어보자. 아사셀 염소 상징을 사단으로 본다면 십자가에서 그가 내어 쫓겼다는 의미 또한 여기에 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2:31에서, 예수님은 십자가 사건이 있기 얼마 전에 “이제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나리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이 말이 사단이 하늘에서 내어쫓긴 것을 가리킨다고 믿는다. (177.2)
 그러나 우리는 또한 사단이 최종적 의미로 쫓겨난 것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마귀가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고 있다(벧전 5:8)고 말하지 않는가? 그리고 하늘에서 큰 소리가 나서, 땅에 거하는 자들에게 화가 있을 것은 사단이 내려갔기(계 12:12) 때문이라고 선언하지 않는가? 마귀가 무섭게 쏘아대는 화전(火箭)을 의식하고, 악의 본부에서 파견된 초자연적인 군대에 대항하기 위해 그리스도의 전신갑주로 무장할(엡 6:10~16) 필요를 느끼지 않는 자가 우리 중에 누구란 말인가? 아무도 없다. 궁극적 의미에서 마귀는 아직 쫓겨나지 않았다. 불행히도, 그는 아직 마음대로 활동한다. 천년기 끝에 가서야 비로소 우리는 광야 성막 제도에 나타난 고대의 상징의 종말론적 성취를 온전히 보게 될 것이다. (17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