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진술이 더 있다. “그분이 십자가에서 자신을 드렸을 때, 인류의 죄를 위한 완전한 속죄가 이뤄졌다.”9)(165.3)
그녀는 또 이렇게 말했다. “산에서 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인류를 위한 그분의 희생이 충분하고 온전했다는 공표였다. 속죄의 조건들은 성취되었고 그분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려던 사업은 완성되었다.”10)(165.4)
다음의 진술은 이 모든 것을 한데 집약한다. “그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십자가를 세웠고, 하늘 아버지께서 당신의 아들의 희생을 바라보 시고 그것이 완전함을 인정하여 그 앞에 머리를 숙였다. 그분은 ‘충분 하다. 속죄는 온전하다’고 말씀하셨다.”11)(165.5)
이 진술들은 십자가에서 속죄가 끝마쳐졌음을 확언하며, 따라서 공개 편지가 문제를 제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것들을 무시했기 때문이다. 명백하게, 엘렌 G. 화잇을 통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근본적인 요소를 포괄하는 속죄의 개념으로, 하나는 십자가에서 절정에 이른 속죄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 성소에서 발생하여 계속될 속죄이다. (165.6)
이제 이런 이해가 과연 옳은지 그른지가 짚어 보아야 할 문제인데,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기독교 사상사에 나온 속죄의 개념뿐 아니라 속죄의 성경적 개념을 간단하게 요약할 필요가 있다. (166.1)
속죄의 성경적 개념12)
속죄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동사 카파르(kapar)에서 파생된 킵푸림(kippurim)이다. 구약에 빈번하게 나타나지만 카파르의 정확한 의미는 학자들에게 여전히 문제로 남아있어서, 그것의 의미에 대해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일반적으로 “덮다”, “지워버리다”를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166.2)
고대의 제사 제도의 목적 가운데 하나(사실 주된 목적)는 속죄를 제공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이스라엘에서 매일 드리는 제사 의식과 관련하여 카파르가 거듭거듭 사용된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레위기 4~8 장에서 두루 관찰할 수 있는데, 유라이아 스미쓰가 이를 완전히 놓쳐 버린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위에서 살펴본 대로, 그에게 속죄는 1년에 한 번 성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이었다. (166.3)
하지만 위의 언급들에 따르면 속죄는 뜰에서도 매일 일어났고, 그 뜰은 십자가가 세워진 이 지상을 상징하였다. 다시 말해서(우리가 앞장에서 본 것처럼),13) 이 지상이 하늘 성소의 바깥뜰이고, 따라서 갈바리는 우리의 유월절 양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희생된 번제단이었다. (166.4)
속죄가 연중 매일 일어난 것이 사실이지만, 1년에 특별한 한 날을 “대속죄일” 곧 욤 킵푸르(Yom Kippur)로 여겼다(레 23:27; 참조 레 16장). (167.1)
신약으로 돌아오면, 우리는 “속죄”(atonement) 혹은 그와 관련된 단어가 대부분의 번역에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처음에는 놀란다. 이것은 신약의 속죄와 관련하여 그토록 강도 높은 교조 주의(敎條主義)를 내세운 공개 편지의 발신자들에게는 충격일 수 있다. (167.2)
하지만 속죄의 개념은 신약에서 유일한 주요 주제는 아니더라도 그 중 하나다. 중심적인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 곧 그분의 성육신과 죽음이지 더 이상 성전과 그 의식(儀式)이 아니다. 그렇지만 제사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뤄진 속죄를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광범 위한 모델들에서 두드러지며, 따라서 고대의 의식들에서 끌어낸 사상의 형태가 신약에 적잖게 나온다. (167.3)
속죄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단순하거나 획일적이지 않고 매우 복합적이고 다각적이다. 2천년의 기독교 사상의 역사도 그 상황을 전혀 개선하지 못했다. (167.4)
기독교 사상에 나타난 속죄
수 세기에 걸쳐 신학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룬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설명하기 위한 시도로써 이런 저런 이론을 내세웠다. 개개의 이론들의 긴 목록을 연구할 때 생길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나는 신학자 제임스 앳킨슨(James Atkinson)14)의 체제를 따라, 그것들을 네 가지 항목 아래 포함시킬 것이다. (167.5)
1. 고전적 이론 또는 극(劇) 이론(168.1)
초기 교부들과 관련된 이 이론은, “극적”(dramatic)이라는 말이 시사하는 것처럼 속죄를 극(drama)에 빗대어 생각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와 마귀 사이의 우주적 대전쟁 곧 그리스도가 승리한 것으로 드러난 십자가에서 절정에 달한 초자연적인 투쟁을 묘사한다. (168.2)
이 이론은 16세기의 몇몇 개혁자들, 특히 마르틴 루터가 채용하여 옹호했다. 앳킨슨에 따르면, “루터의 신학의 대담함과 생동감은 승리하는 자 편에 있다는 이 고무적인 의미에서 솟아 나온 것이다.”15)(168.3)
이런 속죄 개념에 어느 정도 타당성이 있는가? 그렇다. 이것은 신약의 굳건한 지지를 받는다. 따라서 이 개념의 다소 특이한 요소들을 버린다면(여기서 그것들을 논하지는 않겠다) 재림교인들은 그것의 기본적인 주장에 기꺼이 동의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속죄의 모든 범위를 포괄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16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