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 성소 (재림교회 신학의 심장) 제 9 장 조화와 기쁨의 맥박만이 고동침:속죄의 완성
 대략 11세기 혹은 12세기 초반에 캔터베 리의 대주교로 수년 동안 봉직한 안셀무스(Anselm)는 쿠르 데우스 호모(Cur Deus Homo, 왜 하나님이 인간이 되었는가)라는 제목을 붙인 책을 썼다. 이 저작에서 그는 오늘날 우리가 “사법적 이론”으로 알고 있는 속죄 개념을 펼쳐 보였다. 간단히 말하면,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법과 정부를 무시함으로 그분의 권위에 손상을 입혔음을 시사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위치를 바로잡기 위해 오셔서, 하나님의 명예에 소상을 입힌 우리를 대신하여 충족(배상)을 제공하셨다. 그분은 하나님께 속전(贖錢)을 지불함으로써 그 일을 이루셨다. (168.6)
 아마도 속죄에 관해 개진된 모든 주장 가운데 이 이론이 가장 부적합한 특징들을 지녔는데, 그중 화가 난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시킬 필요가 있다는 개념이 그렇다. 이 견해는 고린도후서 5:19의 아름다운 사상과 분명히 모순된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169.1)
 그러나 앳킨슨이 지적한 대로 여기서도 이 견해에 베어 있는 대속의 개념은 속죄를 보는 타당한 방법인데, 죄인들을 대신하여 죄의 형벌을 당하신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사랑을 부각시킨 점이다. 이렇게 하여 이 이론은 하나님의 자비와 공의를 유지하는 데 일조한다. (169.2)
 3. 모본설 (169.3)
 12세기에 피에르 아벨라르(Pierre Abelard)라는 이름을 지닌 철학자 신학자는 우리가 오늘날 모본설로 알고 있는 속죄 이론을 제창했다. 아벨라르에 따르면, 예수는 하나님의 사랑과 용서의 최고 모본으로 고난을 당하셨다. 우리가 이 놀라운 사랑의 표현을 바라볼 때 분발하여 회개하게 되며, 그 결과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도록 이끈다. 아벨라르의 견해로 말하자면 이것이 속죄의 모든 것을 의미 한다. (169.4)
 이 견해는 성경의 지지를 얻는가? 그렇다. 신약에는 그런 개념이 가득하다. 그렇다면 그것이 속죄의 모든 영역을 포괄하는가? 분명 그렇지 못하다. (169.5)
 그런데도 나는 일부 재림교회 신학자들이 모본설의 수정된 형태와 우리의 대쟁투 개념을 결합하려고 시도한다는 사실에 주목하게 되었다. 그들은 그런 입장을 속죄가 의미하는 것의 총체(總體)로 여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단순히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사랑 곧 사단에게 의혹을 품도록 해준 사랑에 대한 계시로만 본다. 이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대속 즉 죄의 형벌을 지불하는 것과는 아무런(혹은 거의) 관계가 없다. (169.6)
 나는 이렇게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계시로 부각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는다. 그것은 없애서는 안 될 강조 사항이다. 그러나 내 판단에는, 그것을 속죄가 의미하는 총체로 제시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것은 또다시 우리가 지금 논의 중인 해묵은 문제 곧 부분을 전체로 잘못 보는 문제로 빠져들게 한다 (170.1)
 4. 희생 이론 (170.2)
 이 이론은 특정 주창자와 관련이 없다. 그것은 “신약, 특히 히브리서에서 체계적인 해설을 찾을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자신의 생명을 전적인 순종으로 자원하여 아버지께 드림으로써 우리를 위해 완전한 희생을 제공한 제사장—제물로 제시한다. 우리의 죄된 생명에 적용된 그분의 피는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하나님과 화평한 상태로 들어가게 한다.”16) (170.3)
 나는 이 넷째 이론에 대한 다음의 평가가 매우 의미 있고 핵심을 찌른다고 생각한다. “심사숙고해 보면 이 하나의 개념에 얼마나 많은 신학이 들어 있는지, 이로써 얼마나 많은 반대를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지 드러날 것이다. 이것은 우리를 일체의 주관적 견해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가 결코 할 수 없었던 일을 그리스도가 했다는 객관적인 견해를 유지시킨다. 또한 그것은 대속(代蹟)과 관련된 표현에 내포된 위험에서 우리를 구해준다. 그것은 극적이고 역사적인 표상을 통해, 그 분의 뿌려진 피가 어떻게 우리와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곧 지금 우리를 위해 봉사하시는 하늘 대제사장을 따라갈 수 있는지를 상징한다.”17) (170.4)
 우리는 이 역사적인 조망을 통해 무엇을 배웠는가? 위의 세 가지 이론 중 어느 것도 그 자체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구속 사업의 온전한 범위를 완전히 포착할 수 없다. 기독교 시대의 첫 세기부터 구속 사업의 방대한 영역은 기독교 내에 있는 가장 예리한 신학적 및 철학적 지성들에게 도전장을 냈다. (171.1)
 우리는 교회, 삼위일체, 성육신의 신조만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기독교는 속죄 교리에 관한 보편적인 신조를 공식화한 적이 없었다. 속죄와 관련된 역사적인 이론들은 수 세기에 걸쳐 파급되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우주적인 구원 활동의 모든 국면을 포착 하려는 계속되는 신학적 논쟁의 유물로 남아 있다. (171.2)
 따라서 “어떤 이론도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된다.” 각각은 실재의 중요한 요소를 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드러낸다. 각각은 확장된 은유로서, 밝혀 주고 설명하는 효과가 있어서 유용하나 뜻을 가리거나 왜곡시킬 수도 있다. 또한 그 은유들의 설명하는 효력이 역사 내내 똑같지는 않다. 특정 은유(예컨대, 속죄의 은유)는 오늘날에도 전과 다름없이 동일한 힘과 설득력을 지닌 것은 아니다.18) 그렇다면 그 것도 하나님의 섭리일 수 있다. (171.3)
 그러므로 우리의 접근방식은 각각의 이론에서 믿을 만한 부분을 끌 어내는 것이 되어야 하며, 따라서 “하나의 이론이나 그 모든 것을 결합한다 해도 실재의 완전함을 충분히 포괄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19) (171.4)
 재림교회의 입장 이해하기
 전술한 내용에 비추어 볼 때, 신약이 속죄 문제에 관해 가르치는 것에 대해 기독교 내에서 마치 만장일치하는 것처럼 속죄에 관한 재림교 회의 입장이 신약의 가르침에 배치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사실상, “신약은 구체적인 설명을 제공하지 않을 뿐더러, 그리스도 교회가 공식적으로 속죄 이론 중 어떤 것에도 지지를 보내지 않았다.”20) (172.1)
 그러므로 재림교회가 속죄와 관련하여 계속되는 연구에 기여한 것은 속죄의 희생 개념에 초점을 맞춰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구약의 성소 표상에 비추어 해석한 점이다. 이러한 접근방식에 힘입어 우리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속죄 개념의 범위를 확장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개념에, 십자가의 희생뿐만 아니라 하늘 성소에서 수행하시는 우리의 대제사장으로서 그리스도의 사역(특히, 1844년에 시작된 그분의 봉사의 특별한 국면)이 포함된다고 이해한다. (172.2)
 용법의 이중성
 속죄의 이중적 개념에 다소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자들은 사실 그 단어 자체의 용법에 본디부터 이중성이 들어 있음을 알지 못해서 그럴 것이다. (17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