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의 드라마 성소 제 12 장 큰 안식일
A. 서론 —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게 명한 대로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12)
   B. 명령 —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13)
      C. 이유—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인즉(14)
   B´ 명령 —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 안식하게 할지니라(14)
      C´이유— 너는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종이 되었더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강한 손과 편 팔로 너를 거기서 인도하여 내었나니(15)
D. 결론 — 그러므로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명하여 안식일을 지키라 하느니라(15)
(266.2)
 C´를 보면 애굽의 종살이 즉 죄로부터의 구속의 개념이 추가 되었다. (266.3)
 B´의 명령 가운데는 하나님의 안식에 모든 가족들과 비천한 남녀 종들과 외국인 모두를 하나님의 안식으로 초청하고 있다. (266.4)
 안식일은 노동의 억압과, 사회적 불평등에서 모든 사람을 자유케 한다. (266.5)
 C´에는 애굽의 노예생활 가운데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회상하라고 하신다. (266.6)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에게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로 회상되는 동시에 죄의 속박에서 구속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상기하는 날이 되어야 한다. (266.7)
 5) 안식일은 자유인이 되라는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안식일은 종과 주인이 평등해 지는 날이다. 종의 비천함과 억압이 사라지는 것이다. 종이 주인의 자녀와 같아지는 날이다. 사람이 견디는 시험 중에 가장 힘든 것은 노역의 짐이나 가난이 아니다. 가장 힘든 것은 인격이 멸시당하고, 짐승과 같이 가치 없게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빌 2:7), 종의 종이 되셨다. “나는 벌레요 사람이 아니라 사람의 훼방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니이다”(시 22:6). 이것은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히 2:14, 15)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의 종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자유인으로서 행동을 하는 것이다. 구원받기 위해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구원 받았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267.1)
 그러나 여전히 죄의 종살이에서 벗어나 여호와의 안식(출 20:10; 레 23:3; 레 23:38; 신 5:14)에 들어가지 못한 자들이 많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워할지니 그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을지라도 너희 중에 혹 미치지 못할 자가 있을까 함이라 저희와 같이 우리도 복음 전함을 받은 자이나 그러나 그 들은 바 말씀이 저희에게 유익되지 못한 것은 듣는 자가 믿음을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그 말씀하신 바와 같으니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저희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다 하였으나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그 일이 이루었느니라 제 칠 일에 관하여는 어디 이렇게 일렀으되 하나님은 제 칠 일에 그의 모든 일을 쉬셨다 하였으며”(히 4:1~4). (267.2)
 광야의 사십년 동안 부조들은 순종치 아니하므로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히 3:18)는 선고를 받았지만 오늘날 이미 그 안식에 들어가는 자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죄로부터 구속의 경험이 이루어진 자들이다. 안식의 축복은 종이 주인의 자녀와 평등하게 존귀와 영예를 누릴 수 있는 날이다. 안식일은 인간을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엡 4:13) 끌어 올리시는 하나님을 조명한다. 종을 하나님의 품성과 모양을 닮은 존귀한 자로 회복시키시는 것이다. (267.3)
 우리는 무익하고 가치 없는 종이었던 오네시모가 구속을 받은 다음에 유익하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된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몬 1:10~12). (268.1)
 오네시모는 소아시아의 프리지아 지방, 골로새 출신으로 부자이며 인품이 선한 빌레몬의 노예였다. 오네시모는 주인의 재산 일부를 훔쳐서 로마로 자유를 찾아 도망쳤는데 그곳에서 1차 투옥 때에 연금 생활을 하던 바울을 만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개종하게 되었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복음으로 낳은 아들이 된 것이다. 바울은 도망쳐 나온 노예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달라는 편지를 빌레몬에게 보낸다. 오네시모는 바울이 써 준 빌레몬서를 가지고 주인에게로 돌아가 용서를 구한다. 품성이 인자했던 빌레몬은 바울이 오네시모를 복음의 유익한 일꾼으로 천거하면서 오네시모가 당신에게 손해를 주었다면 배상하겠다는 간곡한 요청에 감동을 받아서 그의 죄를 용서하고 노예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었다. (268.2)
 당시의 로마세계의 노예들은 두발 가진 짐승에 불과 했으면 그들의 생활여건은 비참하였다. 그들은 일을 위한 도구나 일하는 짐승처럼 취급을 받았다. 주인들은 자신들의 노예들을 마음대로 처형하였다. 당시의 관습으로는 도망친 오네시모는 사지를 절단 당하거나 십자형 혹은 고문 등으로 처형을 당했다. 관대한 형을 받는다 해도 이마에 라틴어 ‘도망자’(Fugitivus)의 머리글자인 ‘F’자의 화인을 이마에 받은 채 평생을 수치스럽게 살아가야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는 다시 로마의 바울에게로 돌아가 그를 돕고 로마의 노예들에게 그리스도교를 전하며 바울의 신임을 받다가 95년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로 처형당했다고 전해진다. (268.3)
 바울은 오세시모가 전에는 종이였기 때문에 무익했지만 이제 회심해고 그리스도인이 되었기 때문에 바울과 빌레몬에게 유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오네시모는 그의 이름의 뜻처럼 그리스도로 인하여 ‘유익한’, ‘도움이 되는’사람이 되었다. 오네시모는 죄의 종살이에서 구원을 받아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구원받은 자들을 표상한다. (268.4)
 6) 안식일은 죄를 끝내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억했던 것처럼 우리는 죄의 종살이의 비천함에서 구원받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요 8:34)고 말씀하셨다. 영적으로 죄에 노예인 사람에게는 자유가 없다. 종은 안식일에 쉼을 누리지 못한다. 육신의 정욕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상태로 남아있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도, 해방도, 감사도 없다. 안식이 없는 종은 안식일에도 일을 하면서 지낸다. 유대인들은 문자적인 안식일은 지켰지만 종이기 때문에 구원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였다. 안식일에 엄격한 규례를 만들어 지키는 일을 하였다. (269.1)
 유대인들에게 안식일은 구원 받기 위해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날이 되었다. 미쉬나(Mishnah)의 두 책자(샤바트와 에루빈)는 유대인의 안식일 규정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그들은 안식일에 금지 규정을 39가지 항목으로 나누었다. 게다가 각 39가지의 항목을 준수하기 위한 6가지씩 울타리 법을 더하였다. 이렇게 하다 보니 안식일에 금지 항목은 234가지나 되었다. 이런 복잡한 항목은 그것을 만든 사람들조차 기억하기 힘든 것들이었다. 그들은 안식일에 아무 것도 운반해서는 안되는 규정이 있었는데 열쇠나, 손수건, 포켓용 책자, 지갑 까지도 지니고 다닐 수 없었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 해방의 날이 아니라 엄격한 고행과 율법의 멍에를 멘 날이 된 것이다. (269.2)
 안식일은 구원받기 위해 지키는 날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날이 되어야 한다. 비천한 노예에서 해방된 오네시모의 자유와 해방이 우리의 것이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끝내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269.3)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며”(단 9:24) (269.4)
 C. 대속죄일 속죄의 위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