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I부 예수와 옛 세대 (1:19-4:54) 제 4 장 질문하는 제자 (2:12-3:21)

3절 - 거듭 남
4절 모태 -
5절
6절
7절 - 거듭 남
(117.2)
 그러나 예수께서 문자적인 침례를 의미하셨다는 견해를 위해 강력한 논쟁을 펼칠 수도 있다. 비록 유대인의 침례가 새로운 것이기는 하나, 니고데모가 침례자 요한에게 질문을 하러 온 바리새인 대표단의 일원이었다면(1:24-28), 그는 “그대는 물로만 아니라 성령으로 침례를 받을(요한이나 나의 제자들 중 하나에게[3:22, 23; 4:1, 2]) 필요가 있다”(5절을 보라)는 예수의 말씀을 쉽게 깨달을 수 있었을 것이다. 4:10-14, 23, 24, 그리고 7:37-39에서 물과 성령은 예수의 가르침에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물로 정결케 하는 것과 성령에 의하여 정결케 하는 것은 제1세기 유대교의 배경에서도 당면한 개념들이었다(겔 36:25-27; 1 Qs 3:6-9). 물과 성령으로 이스라엘을 정결케 하는 것은 메시야가 오기 전에 있을 것이었다(Ps. Sol. 18:5, 6). “거듭 난다”(“born again”), “위로부터 난다”(“born from above”)는 개념은 3:22-36에 요한의 침례와 관련을 맺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진술에서 물과 성령 둘 다에 의한 침례를 말했다고 보는 것이 문맥과 일치한다. (117.3)
 어느 것을 선호할 것인가? 원문의 문맥에서는 둘 다 의미가 있다. 저자 자신이 더 자세히 설명하지 않았으니, 물에 대한 예수의 언급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보는 것이 최선책일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한의 글에 나오는 전형적인 표현 방식인데, 고의적으로 의미를 모호하게 하여 독자로 하여금 더 깊은 사고를 하게 만든다. (118.1)
 어느 경우이든지 간에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나누신 놀라운 개념은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에게 태어남으로써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결정에 달린 문제이다. 그곳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출생, 즉 변화된 생애를 향한 영적인 위탁을 해야 한다(화잇, 시대의 소망, 172를 보라). 그러나 변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지만 매우 실제적인 성령의 역사로 이르러 온다(8절). (118.2)
 니고데모는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묻는다(9절). 예수께서는, 인간이 설사 하늘에 올라갈 수 있다 해도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인간의 수단으로는 얻어질 수 없다고 대답하신다(11-13절). 그 대답은 오직, 그의 본질적 본성이 하늘에 속해 있고 하늘의 실재들을 드러내기 위해 인자로 내려오신 분으로부터만 이르러 올 수 있다(13절). (118.3)
 14, 15절에서 바로 그분이 니고데모의 질문에 대답한다(화잇, 시대의 소망, 174, 175). 새로운 출생의 열쇠는 인자를 높이 드는 것이다(7:39). 새로운 출생을 가능케 하는 것은 인간의 노력이 아니라 십자가이다(1:12, 13). 바리새인들이 고난당하고 죽는 메시야의 존재를 믿지 않은 것이 흥미롭다. 그러므로 3:14, 15에서 예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알아야 했던 한 가지를 말씀하신다. (118.4)
 예수께서는 십자가를 광야에서 모세가 높이 든 뱀에 비유하셨다(14, 15절; 민 21:4-9). 이것은 적절한 비유이다. 두 경우 모두에서 구제책은 하나님에 의해 제공되었고, 뚜렷하게 질병처럼 보였다. 두 경우 모두에서 구제책은 알아보기 쉽게 나타났다. 두 경우 모두에서 치유는 구제책을 바라봄으로써 가능했다. 두 경우 모두에서 구제책은 인간의 이성에 거치는 돌이었다. 그리고 두 경우 모두에서 불순종의 결과는 동일하였다. 십자가는 인간에게 생사(生死)가 달린 문제이다. (118.5)
 요한복음 3:16-21에서 말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예수인가, 아니면 이 복음서의 저자인가? 예수께서 3:12까지는 제2인칭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13절부터는 제3인칭으로 전환이 이루어지고, 주제는 예수와 니고데모가 나누던 대화의 주제와 점점 멀어지고 있다. 13-17절 사이의 어느 곳에서 예수께서 니고데모와 말씀하시다가, 복음서의 저자가 독자에게 말하는 것으로 전환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요한의 문체와 예수의 문체가 이 복음서에서는 동일하므로 전환이 이루어진 곳이 아마도 15절과 16절 사이인 것 같기는 하지만, 정확히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119.1)
 성경 전체에서 가장 애호를 많이 받는 구절인 요한복음 3:16에는 모노게네스(monogenēs)라는 헬라어가 나오는데, 「새국제역」(NIV)은 이것을 “하나밖에 없고 유일한”(“one and only”)으로, 「제임스왕역」(KJV)은 “홀로 태어난, 독생한”(“only begotten”)으로 번역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단어가 예수께서 과거의 어떤 지점에서 발생했거나 태어났거나 혹은 창조되었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느낀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고유하고 차용(借用)하지 아니하고 파생한 것도 아닌 생명을 소유한 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화잇, 복음 전도, 616). (119.2)
 흥미로운 사실은 헬라어 성경(헬라어 구약을 포함하여)에서 모노게네스(monogenēs)란 단어는 오직 두 사람-이삭과 예수-에게만 사용되었다는 것이다(창 22:2, 12; 히 11:17-19). [이 책의 저자는 모노게네스가 나인 성의 과부의 “독자”(눅 7:12)를 가리킬 때에도 사용된 것을 간과한 것 같다-감수자 주]. 육신적인 의미로 볼 때, 이삭은 아브라함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one and only son”)이 아니었다. 아브라함은 일곱 명의 아들이 더 있었다(창 16:15, 16; 25:1, 2). 이삭이 구별되는 것은 아브라함의 육신적 후손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아브라함의 “독특한”(“unique”) 아들, 즉 약속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창 12:7). 하나님은 그를 통하여 모든 족속이 복을 받도록 계획하였다(창 12:1-3). 그래서 헬라어 모노게네스(문자적으로는 “한 종류의 것”[“one of a kind”])는 모든 민족에게 복을 베푸려는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삭과 예수의 독특한 역할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이는 육신적 출생이나 아버지로부터 이어지는 세대의 문제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119.3)
 요한복음 3:16은 요한복음의 다수의 주요 주제들을 아주 요약해서 함축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사랑을 받을 만하다. 이 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돋보이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발을 씻기신 후에 하신 고별 강론의 주요 주제이다(13:34; 14:21, 23; 16:27). 이 절은 그 사랑을 우주적인 것으로 묘사한다—하나님이 세상(지구가 아닌, 전체 인간 세상—Brown, 1:508-510)을 사랑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들을 통해 주신 선물로 이르러온다. 아들을 믿는(요한복음에서 믿음은 항상 바울의 편지들에서처럼 명사가 아니라 동사로 표현되어 있다) 자는 누구에게나 영생의 선물과 정죄의 면제가 이르러온다(3:17). (120.1)
 그 선물이 무료이긴 하지만, 그것은 인간의 응답을 기다린다. 그와 같이 거저 받는 선물을 누가 감히 거절하려고 생각을 하겠는가? 하지만 현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그 선물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 개인의 삶의 모든 더럽고 하찮은 현실들을 정결케 해야 함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삶이 빛(Light)에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는데, 이는 그들이 드러나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19, 20절). 죄된 인간의 본성은 우리를 현실에서 도피하게 만든다. 빛을 피하는 사람들은 대개 주위의 다른 사람이 빛으로 나아가는 것도 두렵게 생각하는데, 이것은 신자와의 접촉이 빛에 더 많이 노출될 위험성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불신을 향해 충동이 가해지면, 매우 신속하게 박해를 초래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120.2)
 예수께서는 세상을 정죄(심판)하러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니라고 하시면서(17절), 그의 오심으로 사람들을 정죄(심판)하는(18절) 것은 어찌된 일인가? 정죄는 세상을 향한 예수의 사명의 목적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과 멸망이 모두 인간에게 가능한 것이고, 예수를 믿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므로, 믿음의 초청은 언제나 그 자체가 심판을 가져온다. 생명의 선물을 거절하는 것은 사망의 심판을 선택하는 것이다. 심판은 예수의 사명의 목적이 아니라 그 결과들 중의 하나이다. (121.1)
 문단의 주요 주제
 삼위의 신성(The triune Godhead)
 의문을 발하는 제자 니고데모의 이야기 속에 정교한 삼위일체의 주장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예수께서는 먼저 성령의 일에 대하여 말씀하셨다(3-8절). 그런 후에 그는 구속의 경륜에 있어서 자기 자신의 역할, 즉 그를 믿는 자에게 영생을 알도록 하기 위해 지상에 내려와서 들림을 당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11-15절). 그런 후에 이 문단은 멸망해 가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내어주시고, 빛으로 나아오는 자들의 일들을 통하여 땅 위에서 계속 일하시는 아버지의 역할을 살펴봄으로써 끝을 맺고 있다(16-21절). (121.2)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믿음은 바울의 편지들에서는 언제나 명사(대체로 “믿음”[“faith”]으로 번역됨)인 것에 반해, 요한의 복음서에서는 언제나 동사(대체로 “믿다”[“believe”]로 번역됨)인 것은 매우 흥미로운 점이다. 비록 영어에서는 단어가 다르지만, 원어의 의미에는 차이가 없다(이 단어의 어근은 pist— 이다). 이 둘의 차이점은 문장 속에서 단어가 하는 기능에 있다. 특히 헬라어에서 현재형으로 쓰인 동사들은 계속적인 행위를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동사로서의 믿음은 정적(靜的)인 것이 아니고, 한 때의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이고 계속적이며, 행동 위주이다. 동사로서의 믿음은 언제나 목적어를 가진다. 믿음은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대상으로 두어야 한다. 요한복음에서 믿는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이 땅에 내려와서 들림을 당한 예수를 향한 믿음이다(1:12; 3:13-16; 7:39; 9:35-38; 14:1; 20:31). 이차적인 의미로, 믿는 자들은 성경과 예수의 말씀을 믿으라는 요청을 받고 있다(2:22; 5:47). 이 복음서에는 그를 영접한다, 그에게 나아온다, 그를 따른다, 그리고 그 안에 거한다와 같이 이것과 관련된 용어들이 많이 있다. 이것들의 각각은 적어도 믿는다 라는 동사에 함축된 뉘앙스의 일부를 지니고 있다. (121.3)
 이러한 “믿는다”라는 개념은 요한복음의 보편적인 원칙이다. 믿는 자는 누구든지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을 것이다. 이 보편적인 원칙이 요한복음 3장4장의 이야기 속에 아름답게 예시(例示)되어 있다. 부하고 경건한 유대인인 니고데모와 가난하고 음란한 사마리아 여인에게서, 그리고 4:46-54의 (아마도) 이방인이었던 왕의 신하에게서, 우리는 “누구든지”의 충만한 빛깔(spectrum)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다. (122.1)
 ■ 말씀을 적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