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I부 예수와 옛 세대 (1:19-4:54) 제 4 장 질문하는 제자 (2:12-3:21)
 요한복음 2:23-25를 두 번 읽은 후에 다음의 질문들에 대답하라: (110.1)
 1. 예수께서 이 신자들에게 자신을 위탁하지 아니하신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이 문단이 그 앞뒤에 나오는 이야기들과 어떤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가? (110.2)
 2. 사람의 마음과 생각을 읽는 예수의 능력이 그에 대한 어떤 것을 이야기해 준다고 생각하는지 한두 단락으로 논하라. (110.3)
 ■ 말씀을 탐구함
 문단의 구조
 요한복음 2:23-25은 요한에 의해 사용된 문학적 기법인, 한 문단이 한 번에 두 가지 면을 보는 “양방향성”(duodirectionality, 두 방향으로 나감)의 뛰어난 예이다. 우리는 이미 이 기법을 2:1-11의 혼인 이야기에서 관찰했다. 가나의 혼인은 1:19-51의 많은 주제들을 종결짓는 동시에 2-4장의 대체 주제를 도입하기도 한다. (110.4)
 2:23-25의 장면은 분명히 13-22절의 성전 정결에 기초하고 있다. 동시에 합당치 못한 믿음(2:23, 24)과 다른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있는지 다 아시는 예수(24, 25절)에 관한 주제는 잇따라 나오는 니고데모 이야기(3:1-21)의 중심이다. (110.5)
 문단의 배경
 랍비들은, 인간의 지식으로부터는 완전히 감추어져 있고 따라서 오직 하나님만 아시도록 남겨진 일곱 가지의 사항들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죽음의 날, 위로의 날, 심판의 깊이, 자신이 받을 보상, 다윗의 나라가 회복될 때, 죄된 왕국(로마)이 멸망될 때, 그리고 다른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Beasley-Murray, John, 47). (110.6)
 “심판의 깊이”는 예외로 하더라도, 위에 언급한 것 중에서 하나만 제외하고 모두가 하나님이 드러내시기로 작정하지 않으시면 사람에게는 분명히 감추어져 있는 미래에 대한 지식과 관련되어 있다. 현재에 대한 하나님의 지식을 나타내는 한 가지의 표는 다른 사람이 마음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2:24, 25에서 요한은 유대인의 사고에서 오직 하나님께 속한 대권을 예수께서 지니셨다고 주장하고 있다.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의 마음 속을 읽을 수 있다면, 그는 진실로 태초에 계셨고 만물을 창조하셨고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말씀이다!(1:1-5, 14). (111.1)
 문단의 세부 사항
 유월절에 예수께서 성전에서 환전상과 제사용 짐승을 내쫓으실 때, 많은 사람들은 그가 행한 표적들(복수)을 보고 그를 믿기 시작했다. 대중의 마음 속에 이 “표적”은 놀라운 사건이자 능력의 행위였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다. 제4 복음에서 표적들은 예수의 본질과 성품에 관한 것들을 드러낸다. 이것들은 독자들에게 예수가 어떤 분인지 열어 보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드러낸다(Barclay, 1:119). (111.2)
 그러나 이와 같은 표적들 때문에 생겨난 믿음은 부분적인 믿음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자신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그들의 내적 존재의 동기와 의도를 읽을 수 있으셨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 아무의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와 같은 지식은 본래부터 그의 것이었다. 이와 같이 그는 유월절에 모인 사람의 성품을 읽을 수 있었는데, 이런 일을 그는 또한 베드로(1:40-42; 21:15-19), 나다니엘(1:47-50), 그의 모친(2:4) 니고데모(3:3, 10), 사마리아 여인(4:16-18), 유다(6:70, 71; 13:18-30)에게도 행하였다. (111.3)
 문단의 주요 주제
 피상적인 신앙
 이 문단은 앞 문단에서 언급한 주제, 즉 믿음에는 여러 수준들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제자들은 그가 가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꾼 후에 예수께 대한 구원의 믿음을 가졌으나(11절), 더 깊고 더 지속적인 믿음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성령의 부으심의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22절; 7:39 행 2). (112.1)
 이 문단에서 믿음의 셋째 수준, 즉 단지 이적에만 기초하고 사람을 예수와의 구원의 관계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부적절하고 피상적인 믿음이 나타난다. (112.2)
 요한복음 2:23-25는 예수께서 인간의 본성에 관한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많은 신자들이 그에 대한 피상적인 믿음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성전을 정결케 한 후에 그를 “믿던” 많은 사람들이 후에 “십자가에 못박으소서!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울부짖는 무리에 가담하였다. 그대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이 같은 방법으로 믿을 때, 믿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 더 이상 인기가 없어질 때 그와 같은 믿음은 부적절함이 종종 판명된다. (112.3)
 사람들은 종종 그들이 이적을 볼 수만 있다면 더 큰 믿음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이적이 모든 피상적인 믿음에 치유책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참된 믿음의 길에 들어서기도 할 것이다. 유월절에 모인 사람들이 본 것이라고는 이적을 행하는 자가 모두였다. 예수의 이적들은 그가 이 세상에서 성취하려고 한 영적 봉사에 대한 참된 인식을 갖는 일을 방해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세상에 이적들이 비교적 결핍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우리의 세속적 삶의 정황에서 이적들은 영적으로 유익이 되기보다는 해가 더 크다(마 13:58). 그리스도 이후 제2 세대의 필요에 대한 해답은 사람의 시선을 끄는 구경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말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11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