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I부 예수와 옛 세대 (1:19-4:54) 제 4 장 질문하는 제자 (2:12-3:21)
 예수께서는 아신다
 예수께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있음에는 밝은 측면이 있다. 그가 우리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 안다면, 우리의 믿음을 어떻게 쌓을지도 알고 있다. 그는 우리가 그에 대해 어떻게 배울 수 있는지를 안다. 그는 우리의 일상 생활의 정황 속에서 우리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그를 위해 일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안다. 그는 우리가 필요한 것에 대한 모든 해답을 줄 수 있다(비록 그 해답이 언제나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닐지라도!). (113.1)
 더욱 더 중요한 것은 비록 예수께서 우리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아신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우리를 영접하신다. 그는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우리의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고백하기를 두려워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두렵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 대해 나쁜 것을 알게 되면 우리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게 될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예수께 나아가 우리 죄를 그에게 고백하지 않을 이유란 전혀 없다. 그는 이미 우리에 대한 모든 것을 안다. 고백은 그에게 무엇인가를 알려주는 것이 아니다(그는 우리로부터 어떤 증거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2:25!). 고백은 우리 자신에 대하여 진실을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친숙하게 알고 있지만,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한다. 그에게 나아가지 않을 이유는 전혀 없다. (113.2)
 ■ 말씀에 들어감
 요한복음 3:1-21을 적어도 두 번 읽고 난 후에 다음의 질문들에 대답하라: (113.3)
 1. 그대는 이 문단에서 니고데모의 성품과 신분에 관하여 무엇을 알 수 있는가? 그대가 알게 된 것을 모두 종이에 열거해 보라. 그대가 발견한 것을 7:45-5219:38-42와 비교하고 필요한 대로 목록에 더하라. 니고데모는 참으로 소심한 사람이었는가? 오늘날이면 그가 좋은 이웃이 될 수 있을까? (114.1)
 2. 이 문단에서 3:5“물”이 침례를 가리킨다는 생각을 지지하는 어떤 것이 있는가? 있다면 그대가 발견한 증거를 열거해 보라. (114.2)
 3. 예수께서 니고데모에게 21절까지 계속 말씀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복음서의 저자가 도중에 이어받아 말하는 것인가? 그대는 예수와 니고데모의 면담이 어느 지점에서 끝나고, 그에 대한 주석이 이어진다고 생각하는가? 이 문단의 어느 지점에서 예수께서는 제2인칭(“네가”)에서 제3인칭(“그,” “자마다”)으로 바꾸어 말씀하시는가? 이런 것에 대한 지식이 앞의 질문에 답하는 데 도움을 주는가? (114.3)
 4. 이 문단에 의하면, 한 사람이 어떻게 “거듭나게”(혹은 “위로부터 나게”) 되는가? 그대의 대답을 써 보라. (114.4)
 ■ 말씀을 탐구함
 문단의 구조
 3:1에서 “지금”(“now”)으로 번역된 단어(「개역한글판」에는 이 말이 생략됨—역자 주)는 니고데모 이야기가 앞에 있는 문단(2:23-25)의 주제를 계속하고 있음을 가리킨다. 그가 예수께 나아갈 때 제1인칭 복수(“우리가 ... 아나이다”2절)를 사용함으로써 니고데모는 예수께서 행하신 표적에 기초하는 부적합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대변인처럼 행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요한이 2:23-25에서 경고한 부분적인 믿음의 한 예증(행동화된 비유)으로 쓰여지고 있다. 예수께서는 니고데모가 무슨 목적으로 왔는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니고데모에게 의탁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는 니고데모에게 그의 생애에 있는 실제적인 결핍과 그것에 대한 해결책을 보여주려고 하신다. (114.5)
 문단의 세부 사항
 니고데모(Nicodemus)란 이름은 헬라어로 “백성의 지도자”란 뜻이다. 니고데모는 의심할 여지없이 경건한 사람이었고 유대교가 배출할 수 있는 최고의 모본이 되는 사람이었다. 그는 바리새인이었으며, 이것은 그가 성경과 자신의 신앙을 매우 진지하게 다루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또한 산헤드린, 즉 유대인 통치 협의회의 회원이었고, 교육도 매우 잘 받은 사람이었다(예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의 선생”이라 부르셨다—10절). 그는 상당한 부자였고(19:39), 다소간의 소심함이 그로 하여금 밤 시간에 예수를 만나러 오게 한 사실에도 불구하고(3:2), 비교적 겁이 없었다(7:45-52; 19:38-42). 대체로 그는 그리 나쁜 이웃은 아니었던 것 같다. (115.1)
 그가 바리새인이었다는 사실과, 예수께서 즉각적으로 그의 영적인 삶에 물의 중요성을 연결시키셨다는 사실(5절)은, 니고데모가 1:24-28에서 침례자에게 질문하러 나온 바리새인 대표단의 일원이 아니었는가 하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만일 그렇다면 그는 메시야의 오심이 임박했을 가능성을 분명히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을 정결케 하심을 지켜본 후(화잇, 시대의 소망, 168), 그는 정확히 예수가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를 알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115.2)
 그의 방문 동기가 정확하게 말해서 순수하지 못했다는 것이 2절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니고데모는 “밤에”(“by night”) 찾아왔다. 헬라어에는 시간을 표현하는 세 가지 방식이 있다. 사람들이 시간을 말할 때,

 (1) 특정 사건으로 말할 수도 있고,

 (2) 때로는 시간의 길이로 말할 수도 있으며,

 (3) 때로는 시간 사용의 질적인 면으로 말할 수도 있다.

 시간을 질적으로 사용한다는 말은, 시간이 의미, 즉 보다 높은 영적 혹은 철학적 실재를 가리키는 지칭어(指稱語)로 사용될 수 있다는 뜻이다. 3:2에서 시간을 가리키는 속격(屬格, genitive case)은 셋째 유형의 표현을 가리킨다. 이 복음서의 저자는 니고데모가 온 것이 몇 시였는지, 예수께서 얼마나 오랫동안 대화를 계속하셨는지(이것들은 처음 두 가지 유형의 표현이다)에 관심이 없고, 니고데모가 어떻게 왔는지—그의 영적인 상태—에 관심이 있다. 그는 아직 예수를 알지 못하고 그를 전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의 어두움 가운데서 찾아왔다. 그러나 비록 그가 어두움 속에 있었지만, 그는 올바른 일을 하였다. 예수께 나아옴으로 그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옮겨간다(1:4, 5; 3:19-21; 8:12; 9:5). 이것은 빛에서 어두움으로 가버릴 유다와는 반대이다(13:30). (115.3)
 이 문단의 주요 문제는 3:5에 나오는 물의 의미이다. 많은 사람들이 가르쳐 온 것처럼 이것이 물의 침례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인가? 랍비들은 어린 아기는 어머니의 모태 속의 물로 만들어지는데, 발달 과정에서 남아 있던 잔여물들이 출산시에 나오는 물이라고 가르쳤다. 예수께서 이런 종류의 물을 마음에 두셨다고 가정하면, 그분이 말씀한 취지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두 번, 즉 첫 번째는 네 모친에 의해 육신적으로, 두 번째는 성령에 의해 영적으로 태어나야 한다.” (116.1)
 이와 같은 해석을 지지하는 또 다른 논증들이 있다. 침례자 요한의 때가 이를 때까지는 이방인 회심자만 침례를 받았다. 유대인은 일반적으로 침례를 받을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침례에 대해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실 가능성이 있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2:6에서 물은 예수께서 대체하고자 한 유대교의 문자주의와 세속성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3:5의 물을 출산의 물로 이해하는 것이 요한복음 2장에서 시작된 대체의 주제를 이어가는 것이다. (116.2)
 끝으로, 결정적으로 보이는 논증이, 3:3-7에 있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 사이의 일관된 대조로부터 떠오른다. 예수께서는 “거듭 남”에 대해 말씀하신다(3, 7절). 니고데모는 모태에 대해 이야기한다(4절). 예수께서는 육과 영을 대조시키신 후(6절), 거듭 나라는 호소를 반복하신다(7절). 만일 5절의 물이 육신적 출생의 물과 관계가 있다면, 아래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6절에 있는 “육”에 대한 강조와 잘 부합된다. (117.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