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요한복음 제II부 예수와 옛 세대 (1:19-4:54) 제 4 장 질문하는 제자 (2:12-3:21)
 문단의 세부 사항
 예수께서 소, 양, 비둘기, 그리고 환전상들을 발견하신 곳(14절)은 이방인의 뜰이었다. 그러므로 성전에서의 매매는 경건한 분위기를 해칠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의 입장이 허락된 성전의 한 부분에 참여하는 특권을 그들에게서 제외하는 것이었다. 비록 요한은 여기서 이방인들이 제외됨으로 인한 항의를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예수께서 ‘내 집은 만민[모든 민족들]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마가복음 11:17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시사되어 있다. 요한복음에서 강조된 것은 이방인의 제외가 아니라, 하나님의 집의 정결을 위한 예수의 열심이다(17절).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내어쫓을 때(15, 16절), 예수께서는 스가랴 14:20, 21에 예언된 종말론적 질서를 세우시는데, 그 때에 성전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거룩해질 것이다. 성전 정결은 메시야의 종말 행위(end-time act)이다. (105.1)
 요한복음 2:17에서 예수께서는 시편 69편을 인용하고 있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 이 말씀은 처음 보면 의미가 다소 불분명하지만, 좀더 유심히 살펴보면 매우 분명한 것이 드러낸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형제들에게 외인이 되어 있다(시 69:8; 비교 요 2:12). 그는 성전을 향한 자신의 열심을 함께 나누지 않는 사람들로 인해 모욕을 당하고 있다(시 69:9, 11, 12; 비교 요 2:17, 18, 20). 그래서 시편 69편요한복음 2:13-22는 서로가 복합적인 평행을 이루고 있으나, 단 한 구절만 직접적으로 인용되었다. (105.2)
 2:17에 인용된 것은 신약의 기자들이 구약을 인용하는 일반적인 원칙을 예증하고 있다. 저명한 신약학자 C. H. 도드(C. H. Dodd)는 신약의 기자들이 구약의 짧은 구절 그 자체를 증명 구절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절이 속한 더 광범위한 문맥을 가리키는 지칭어(指稱語, pointers)로 사용된 것을 알아낸 첫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신약 기자가 구약을 인용했을 때, 구약 인용문의 보다 넓은 문맥이 신약의 문맥에서 인용된 구절이 수행하는 역할에 빛을 비춰주고 있는지를 항상 고려하는 것이 지혜롭다. (106.1)
 그러므로 예수의 경험은 시편 기자인 다윗의 경험과 평행을 이룬다. 양자 모두 일반적인 대중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 내부로부터 큰 반대에 직면한 가운데, 성전을 향한 열심을 드러내고 있다. “다윗의 후손”으로서 예수의 경험은 고대 예루살렘에서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수립하려는 열망 속에 있던 다윗 왕의 경험을 성취시키는 것으로 요한복음은 이해하고 있다. 예수의 죽음의 원인은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를 드리려는 그의 열심 때문일 것이었다. (106.2)
 요한복음 2:18은 또한 6:30과 평행을 이룬다. 두 경우 모두 그 일을 수행하자마자 곧 사람들은 그에게 표적을 구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와 같은 요구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로 대답하셨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 예수께서 여기서 자신의 몸인 성전을 말씀하신 것이므로(21절), 그들에게 자신의 고통, 죽음, 그리고 부활을 가장 큰 표징으로 주셨다는 것이 이 말씀 속에서 명백해진다(참고 8:28). 예수께서는 그의 청중들이 기대한 것처럼 서투른 힘에 기초하여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하는 것을 거부하셨다. 오히려 그는 지상에서 그의 권위의 기초로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호소하셨다(참고 13:13-16). (106.3)
 2:19에서 예수께서는 2인칭으로 성전 멸망을 말씀하셨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이 말씀은 예수가 아닌 유대인들이 성전을 허물어뜨릴 사람임을 함축하고 있다(화잇, 시대의 소망, 165). 이 복음서의 여러 많은 부분 가운데 나타난 것처럼 여기에 이중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일에서 잘 예증된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 인하여 A.D. 70년에 있은 저 장엄한 건물의 파괴(이 복음서가 기록된 시점에서 보면 과거의 사건)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러나 좀더 깊이 들어가면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참된 종말론적 성전인 예수의 죽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단에서 예수께서는 성전을 자신의 몸으로 대체하셨다. 그들이 그의 몸을 파멸시킬 때, 그는 3일만에(20-21절—부활시에) 그것을 일으키실 것이었다. (106.4)
 이 부분을 끝맺는 절(22절)은 독자에게 이전 부분의 끝맺는 절(11절)을 상기시켜 준다. 그러나 거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11절에서 믿음은 즉각적인 것이었다. 제자들은 그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었을 때 나타난 예수의 영광을 보았고, 그 결과 그들은 믿었다. 그러나 22절에서는 성전 사건을 목격한 제자들이 예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킴을 받으신 후에야 그의 몸 된 성전에 대한 그의 말씀을 기억하고 믿게 되었다. (107.1)
 요한은 이 절에서 제자들이 예수에 대한 믿음의 발전에는 두 개의 단계 또는 무대가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첫 단계는 그가 살아 계신 동안 그들이 그가 행하는 표적의 결과로 믿게 되었을 때 나타났다. 그러나 믿음의 더 깊은 단계는 그의 마지막이자 가장 큰 표적인 그의 죽음과 부활 바로 이후, 성령이 그들에게 부어졌을 때에야 비로소 일어나게 될 것이었다(7:39). 그런 후에 그들은 예수의 말씀과 그의 봉사에 대해 예언한 성경에 기초해서 믿게 되는 것이다. 표적에만 기초한 좀더 적은 믿음과 말씀에 기초한 더 큰 믿음의 이와 같은 상호 작용이 2:22에 이어지는 짧은 단락(23-25절)의 주제임이 분명하다. (107.2)
 문단의 주요 주제
 성전의 대체(對替)
 혼인 이야기의 대체 주제는 여기서도 계속된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희생 제물인 짐승들을 내쫓으시고, 자신의 몸으로 그것들을 대체하셨다. 그는 성소와 희생의 모든 제도를 자기 자신으로 대체하셨다. 토라, 절기, 그리고 희생 제물이 신자에게 약속한 모든 것이 이제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서 주어지게 되었다(1:17; 고전 1:30). 물론 이것은 본질적으로 히브리서의 저자가 전한 것과 동일한 기별이다. 옛 것들은 하나님에 의해 제정되었고, 그것들이 매우 좋은 것이기는 하나, 예수 안에서 훨씬 더 좋은 것이 이르러왔다(히 1:1-4; 3:1-6; 8:6; 9:11). (108.1)
 그러므로 예수는 자신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존재하게 된 새 이스라엘의 성전이다. 오늘날 성전은 애초부터 물질적 존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의 인격적인 임재 속에서만 존재한다. 신약 시대에는 예수께서 계신 곳이면 어디나 성전이었기 때문에, 성전이란 말의 의미는 세 개의 다른 실체들을 뜻하는 것으로 확대될 수 있다. (108.2)
 예수께서 지금 하늘에서 하나님의 우편에 거하시므로 하늘에는 더 크고 더욱 완전한 성막 또는 성전이 있다(히 8:1, 2, 5-성막성전이라는 용어들이 하늘에 적용될 때에는 그 둘 사이에 신학적으로 중요한 구분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요한계시록 15:5-8을 보라). (108.3)
 하지만 신약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하늘에 거하실 뿐만 아니라, 그는 또한 성령을 통하여 결국은 자신의 몸인 지상의 교회 안에도 거하신다(고전 12:27; 엡 2:14-16; 4:12-16). 그러므로 단체적인 몸인 신자들은 그리스도 자신이 모퉁이 돌이 되는 영적 성전으로 세워져 가는 산 돌로 묘사될 수 있다(벧전 2:4-8; 엡 2:19-22; 고전 3:17; 고후 6:16). (108.4)
 신약에는 성전 주제에 대한 세 번째 확대가 있다. 그리스도는 또한 성령을 통하여 신자들의 몸 속에 거하신다(골 1:18). 그러므로 인간의 육체를 성령의 전으로 부르는 것은 합당하다(고전 6:19, 20). 예수는 그의 생애와 죽음으로 시작한 새로운 시대의 성전으로 이해되므로, 그들을 위한 그분의 계속적인 중재 봉사로 인하여 하늘에 있는 성전, 교회에 있는 성전, 그리고 신자들의 몸 속에 있는 성전을 논하는 것이 가능하다. (108.5)
 주의 만찬
 요한복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들 중의 하나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바로 전에 그의 제자들과 가지신 최후의 만찬에 대한 분명한 언급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그 일이 일어났던 장소에서 마태복음, 마가복음, 그리고 누가복음에서 언급되지 않고 지나간, 발 씻는 이야기가 나타난다(13:1-17). 이처럼 요한복음에서 최후의 만찬 이야기가 빠진 것 때문에 많은 학자들은 만찬과 그것의 신학에 관하여 혹시 숨겨진 관련 사항들이 있는지를 탐색하게 되었다. (109.1)
 그리하여 많은 학자들은 요한복음 2장이 바로 그에 대한 하나의 숨겨진 관련 사항이라고 시사한다. 우리가 본 바와 같이, 2:1-11의 혼인 이야기와 십자가는 많은 연결점을 가지고 있다. 13-22절에서 예수께서는 성전과 그 희생 짐승들을 자신의 몸으로 대체하셨는데, 이것은 또 하나의 십자가와의 연결점이다. 가나의 포도주는 독자에게 유대교의 씻는 일을 대신하는 예수의 피를 상기시켜 주고, 여기서 성전은 찢어진 예수의 몸을 상기시켜 준다( 성전을 헐라”). 그런데 이 복음서의 초반에서 요한은 그가 최후의 만찬과 그것의 동기가 되는 신학에 관하여 알고 있다는 것을 유식한 독자들이 알아차리게 하지만, 다른 사람들이 상세히 묘사한 그 이야기를 반복하지는 않고 있다. 그의 방법은 암시와 정교한 추론을 사용하는 것인데,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부지런히 연구하는 학도에게 풍부한 영적 통찰력의 광맥으로 보상(報償)하고 있다. (10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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