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부 참 종교 (1:19-2:26) 4. 들음과 행함 (1:19-26)
 들음 대 행함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이 단지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가장 놓은 윤리적 행동이라는 자기 기만에 굴복당하는 것은 바라지 않는다. 그는 명령한다: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 이와 함께, 야고보는 이 부분(19-26절) 안에서 그의 논쟁의 중심부에 이르게 된다. 진정한 경건의 뿌리에는 행동 즉 행함이 있다. 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야고보는 “들음-행함” 대조법을 사용하는데, 이는 대중적인 윤리적 논설에서 일반화된 것이었다. 야고보와 같은 구두 문화에서는, 최선의 청취와 의사소통은 구두로 이루어져서, 대조법의 처음 반이 “듣는 것”에 대한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다. 야고보서가 오늘날 기록되었다면, 우리 문화는 시각 문화이기 때문에, 그는 단순히 듣는 것에 대하여 훈계할 뿐만 아니라, 읽는 것이나 보는 것에 대해서도 훈계했을지 모른다. 이 문단의 강조점은 듣는 것이나 그런 의미의 다른 용례에 대한 것이 아니라 행함에 대한 것이다. 그것이 야고보의 원칙적인 교훈이요, 그의 관심의 중심사이다. 그의 독자들이 도에 대하여 단지 수동적으로 듣는 것에 만족할 수 없다. 참된 경건은 반드시 행동하는 삶이어야 하며, 들은 것을 세워가는 것이다. (100.2)
 야고보의 초점은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마 7:24-27)고 말씀하셨을 때의 주님의 결론에 대한 반향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나 야고보에게 있어서, 듣는 것은 중요하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을 행하는 것이나 “도”가 말하는 것을 행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이다. 이것이 야고보가 강조하기를 원하는 결정적인 요점이다. (101.1)
 야고보는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으로 이 요점을 논증한다. 첫째, 부정적으로, 도가 말하는 것을 행치 아니하는 자의 본질을 개략한다. 둘째, 긍정적으로, 말씀을 행하는 자가 복을 얻게 되리라고 진술한다(1:23-25). (101.2)
 야고보는 그의 경우에 나타나는 거울의 비유를 사용한다. 거울의 모습은 고린도전서 13:12에서도 발견되는데, 그곳에서는 반사되어 얻어지는 불완전한 지식과 미래의 실체에 의한 완전한 지식간의 대조로 쓰여졌다(“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야고보의 관심은 불완전하건 완전하건 얻어진 지식에 대한 것이 아니요, 그 지식으로 행한 것에 있다. (101.3)
 야고보서 1:23, 24에 나온 비유는 거울 속에서 자기의 얼굴을 보고 거울을 떠난 뒤에 곧 자기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남자에 관한 것이다(헬라어로 일반적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남자”를 지칭하는 단어가 사용된다. 아마도 비유에 남성적인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고대의 거울은 유리로 만들어지지 않고 잘 광택을 낸 금속으로 만들었음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 금속 물체는 탁자 위에 평평하게 올려 놓여졌으며, 자기 얼굴을 보기 위하여 사람들은 허리를 구부리고 거울 속을 자세히 들여다보아야만 했다. (102.1)
 25절에서 야고보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에 대하여 말하면서 대조하려고 하기 때문에, 23, 24절의 사람은 단지 곁눈질하거나 창문 너머로 흘끗 보면서 보여지지 않기를 바라는 자라고 추측할 수 있다(Mayor, 69, 70). 그리고 황급히 슬쩍 보는 것과 계속하여 응시하는 것이 대조된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쳐다보는 것이 의도적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야고보의 관심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쳐다보는 경험이 있은 후에 일어나는 것에 있다. (102.2)
 사람의 얼굴이 하루하루 결코 동일하지 않는 것이 삶의 현실이다. 그것은 삶의 경험들에 반응하면서 변화한다. 만일 사람이 자기 모습을 관찰하려고 거울로 갔지만 거울이 보여주는 얼굴의 변화에 반응하기를 거절한다면 그는 분명 어리석은 자이다. 어떻게 사람이 거울에서 비춰지는 육체적인 실체와 조화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근거로 온종일 행할 수 있겠는가? 그런 사람은 부자연스럽다. 마찬가지로 도를 듣고도 적절한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 자의 부자연스러움이 있다. (102.3)
 25절은 현명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를 제시한다. 한쪽 사람은 듣고 본 것을 심각하게 관찰하면서 고민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이쪽 사람은 실천적인 삶과 행동을 위해 그 적용을 생각한다. 이 사람은 거울 속에서 본 것과 조화되어 행동하기 때문에 이득을 얻는다. (102.4)
 야고보에게 있어서, 거울은 그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 부르는 것이다. 우리는 앞서 이 구절의 “율법”이 아마도 21-23절에서 사용된 “도”와 동의어임을 주목했다. 비록 신약 성경의 많은 경우에 “율법” (nomos)이 토라(구약 성경의 처음 다섯 권)와 동일시되지만, 야고보는 그가 알고 있는 모든 성경이나 하나님의 의지의 총체인 그분의 말씀을 심중에 두고 있는 듯 하다. 완전한 것은 이 도, 이 율법이다. 야고보의 사상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다”(시 19:7)고 쓴 시편기자의 사상과 매우 유사하다. (102.5)
 야고보는 이 율법이 자유하게 한다고 진술한다(1:25). 이것은 율법이 사람을 매이게 하고 갇히게 한다는 바울의 진술과 모순되는 것처럼 보인다(갈 3:23-25을 보라). 그러나 바울과 야고보는 전혀 다른 두 문맥 속에서 율법을 논하고 있음을 우리는 항상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바울이 “율법”에 대하여 반대하는 대부분의 경우, 그의 언급은 “율법의 행함”에 관한 것이다(??쪽부터 있는 2:14-26의 논증을 참고하라). 반면에, 야고보는 많은 유대인 교사들이 한 것처럼, 율법은 얽매이는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지를 행할 수 있는 참된 자유, 즉 우리 스스로 우리 자신의 관심으로 우리 이웃에게 사랑을 주고 그들을 섬기는 자유함을 주는 것이라 주장한다. 이 해석은 1:27-2:26에 나오는 율법에 대한 야고보의 이해를 매우 명료하게 해 줄 것이다. 하지만 야고보가 지금은 단지 도가 말한 바대로 행한 자에게 축복을 준다: 그들은 그들의 행한 일에 복을 받으리라(1:25). (103.1)
 말함과 헛된 경건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이 도가 말한 바대로 행하도록 권고할 때 그가 의도하는 바를 상세하게 토의하기를 몹시 갈망한다. 이를 야고보는 27절2장에서 풀어놓을 것이다. 1:27에서 그는 사회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면서 참된 경건이 무엇인지를 요약한다. 2장에서는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더욱 상세히 주석한다. (103.2)
 하지만, 야고보는 참된 경건의 본을 제시하기 앞서, 헛된 경건의 예를 간단히 제안한다. 이것을 그는 1:26에서 제안한다. 이 구절은 19-25절1:17-2:26을 연결하는 일도 하고 있다. “자기 기만”은 이 구절에서 실제적인 연결 용어처럼 보이는데, 즉 자기 기만은 1:24의 그 사람과 26절의 사람에게 적용된다. 혹은 26절이 도에 대한 순종이 표명되지 않는 구체적 본으로 제시됨으로 연결 고리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야고보는 세 부분의 격언(19절)으로 되돌아가서, 그가 지금까지 언급하지 않았던 한 부분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성내는 것에 대하여 충분히 다루었으며, 뒤이어 들음에 있어 부적당한 점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이제 그는 간단히 말하는 것에 대하여 다루어야만 한다(그리고 그는 3장에서 이것을 충분히 다룰 것이다). 여기 참된 경건과 헛된 경건에 대한 문맥 안에서 이를 다룰 것이다. (104.1)
 야고보에게 있어서, 자기를 속이는 자는 스스로 경건하다고 생각하며 “말하기를 더디 하지”(19절) 아니하는, 즉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는 자이다. 그런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다(26절). 그의 서신 3장에서 보여질 것처럼, 야고보는 혀를 어거함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104.2)
 야고보가 참된 경건의 증거로 혀를 어거함이라 생각하는 것이 이상할지도 모른다. 여기서 “경건” 혹은 “경건한”으로 쓰인 단어는 공식적인 예배, 기도, 금식, 조직적 구제, 즉 종교적 의무, 의식, 예식, 예배 등의 상세한 것들에 대한 세심한 처신을 묘사할 때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야고보는 경건의 다른 분야를 주장하면서 그 같은 제한적인 경건에 대한 정의를 비평한다. (104.3)
 야고보의 비평은 선지서와(사 1:10-17; 렘 7:21-28; 호 6:6), 특히 바리새인들이 했던 가난한 자에 대한 구제, 기도, 금식과 같은 경건한 척 하는 외식적 순종을 맹렬히 비난했던 예수님과 비슷하다(마 6:1-8). (104.4)
 참된 경건은 이러한 형식을 초월한다. 소위 경건하다는 사람이 자기 혀를 어거하지 못한다면, 야고보서에서는 이런 모든 경건한 행동은 헛것으로 간주된다. 참된 경건은 자기 규제를 포함한다. 만일 그의 독자들이 그들의 말하는 것을 억제할 수 있다면, 그들은 자기 규제를 향한 엄청난 단계를 넘은 것이다. 오로지 그때에만 그들의 경건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를 매우 명백히 언급하면서, 야고보는 이제 참된 경건을 행할 수 있는 방법으로 넘어간다. (104.5)
 ■ 말씀을 적용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