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부 참 종교 (1:19-2:26) 4. 들음과 행함 (1:19-26)
 야고보서의 첫 부분(1:1-18)은 이 문서 전체에서 야고보의 관심을 나타내는 명백한 주제, 즉 시험과 고통에 대해 제시하고 초점을 맞춘다. 두 번째 부분(1:19-2:26)에서도 야고보는 그 주제에 대해 계속해서 다룬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강조점은 특별히 고통받는 자들과 관련지어서 명백한 참된 경건에 대한 것이다. 즉, 진실한 신앙인이 시련에 처한 자, 특히 경제적 시련에 빠진 사람과 어떻게 관련이 있는가? (89.1)
 이 부분의 중심에는 행함에 대한 강조가 있다. 행동이 없는 경건은 무익하다. 야고보에게 경건은 “명사”가 아니라 “동사”이다. 경건은 부동적인 것이 아니라 활동적인 것이다. 진정한 종교인은 진리와 믿음에 대해 전제된 진술을 단순히 지적으로 동의만 하는 것 이상으로 움직이는 자이다. 진실하고 신실한 사람은 그의 특별한 행동으로 분명하게 자신의 신원을 확인받을 수 있다. (89.2)
 목회 신학의 가장 어려운 부분을 소개하기 위해, 야고보는 화법(話法) 윤리를 끼워 넣었다. 화법 윤리는 구약과 후기 유대 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주제였기에, 야고보는 그의 서신을 마무리하기 전에 몇 번 더 언급할 것이다. 여기서는 이 윤리가 부분적으로, “행함”의 중요성과 이점과 비교하여 말하는 것의 부적절함과 (심지어는 파괴적인 성격)에 대해 증명하는 데 사용된다. (89.3)
 ■ 말씀에 들어감
 19-26절을 한 번 읽으라. 그후에 인접한 문맥, 즉 1장2장의 문맥 안에서 두 번째로 읽으라. 이렇게 한 후에, 아래의 문제에 응답하라. (90.1)
 1. 당신의 야고보서 노트에 이 구절이 1-18절2장의 논쟁과 조화될 수 있는 두세 가지 방법에 대해 열거하라. (90.2)
 2. 성구사전을 활용하여, 성난(angry, 유의어인 노여움[anger], 진노[wrath] 등)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라. 그 단어가 긍정적으로 사용된 횟수(예를 들어,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진노)와 부정적으로 사용된 사례들(예를 들어, 산상설교에서의 예수님의 말씀—마 5:22)을 주목하라. 노여움이 어떤 문맥에서는 좋게 사용되고 어떤 문맥에서는 나쁘게 사용되어진 이유를 설명하라. (90.3)
 3. 당신이 성경의 다른 역본들을 이용할 수 있다면, 1:20을 다양한 번역들을 비교해 보라. 당신은 어떤 번역서가 그 구절의 후반부를 NIV처럼 —“하나님이 바라시는 의로운 삶”이라 번역한 반면, 다른 번역서는 “하나님의 의로움” 혹은 “하나님의 의로운 목적” 등으로 번역된 것을 발견하였는가? 야고보서의 인접한 논쟁에 있어서 이런 상이한 번역들이 어떠한 중요성을 가지는가? 당신의 견해를 설명하라. (90.4)
 4. 21절에서 야고보는 사람에게 심겨진 “도”(word)가 그 개인을 구원할 수 있다고 진술한다. 이것은 사람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 바울의 가르침(롬 3:21-26)과 상충하는가? 당신의 견해를 설명하라. (90.5)
 5. “율법”이 자유를 준다는 1:25의 야고보의 논증과 “율법”은 사람을 얽매이게 하고 믿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바울의 입장을 비교하라. 외관상의 모순을 설명하라. (90.6)
 ■ 말씀을 탐구함
 듣기, 말하기 그리고 성내기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라
 야고보는 원래 격언이었던,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9절)는 말로 이 부분(1:19-26)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 서신의 수많은 다른 격언적 언급들처럼, 이 격언도 구약과 대중적인 유대의 구전 전통과 가르침에서 많이 발견되는 것과 비슷하다. 예를 들어, 잠언 13:3에서 지혜자는 “입을 지키는 자는 그 생명을 보전하나 입술을 크게 벌리는 자에게는 멸망이 오느니라”고 말한다. 우리는 미쉬나의 Aboth 5:12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영감적인 격언도 또한 주목할 수 있다: “네 종류의 제자가 있다: 듣는 것에 빠르고, 잃어버림에도 빠른 자—그의 얻은 것이 그의 잃어버림으로 인해 없어진다; 듣는 것에 느리고, 잃어버림에도 느린 자—그의 잃어버린 것이 그의 얻는 것으로 인해 없어진다; 들음에 빠르고, 잃음에 느린 자—이는 행복한 사람이다; 듣는 것에 느리고, 잃어버림에 빠른 자—이는 사악한 사람이다.” 야고보가 좋아하던 묵시적 지혜서에서는 다음의 문구가 발견된다: “네가 듣는 것을 좋아하면 너는 지식을 얻을 것이며, 네가 듣는 것에 유의한다면 너는 지혜롭게 될 것이다”(Sirach 6:33). 우리는 비—유대 문학인 헬라에서조차도, 야고보의 격언에 병행되는 것들을 발견한다. 고전적인 한 구절이 Martin Dibelius에 의해 인용된다: “권력을 행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응답에서, 한 고관은 “너의 평정을 잃지 말라! 적게 말하고 많이 들으라!”고 말했다(112). (91.1)
 야고보의 의도는 우리 자신의 말을 듣기 좋아하는 즉, 어떤 대화에서 우리의 주장이 관철됨을 기뻐하는 우리 중의 사람들에게 침묵의 맹세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사도는 단지 우리의 입을 지혜롭게 사용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수세기 전에, 잠언의 저자도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17:28)고 말했다. 많은 경우에, 듣는 것이 말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하며 더욱 유리하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하는 사람은 많이 배우고 고난에 적게 굴복당하는 사람이다. Lehman Strauss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귀는 두 개 주시고 입은 단 하나만 주셨다. 우리는 듣고 배우는 것에 두 배는 빨라야 하지 않겠는가? 지혜로운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듣고, 그가 말할 가치가 있다고 확신할 때에만이 대답할 것이다”(51)라고 영감적으로 기록했다. 야고보는 그의 청중들이 전체적인 시야로 듣고 말하고 성내기를 소망한다. Eugene Petersen은 그의 부연 설명인 The Message에서, 이 격언을 동시대적인 관점으로 제시하여, 우리가 야고보의 더욱 넓은 시각을 잡도록 도와준다. 그는 “이것을 모든 교차로에 세워라, 사랑하는 친구여, 너의 귀가 앞장서서 인도하며 너의 혀는 그 뒤를 따르라, 그리고 후미에 분노가 따르게 하라”(잠 1:19). (92.1)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야고보가 “말하기”“듣기”에 대한 그의 훈계 속에 성냄에 대한 문제를 포함시킨 것은 흥미롭다. 비록 첫눈에는 이 조합이 어색해 보이지만, 고대 지혜 문학에서 방종한 말은 종종 억제되지 못한 성냄과 연결된다. 예를 들어, 잠언 17:27에는 “말을 아끼는 자는 지식이 있고 성품이 안존한 자는 명철하니라”고 말한다. 사실 그렇다, 신중한 생각 없이 발설된 말은 성냄과 불 같은 성질을 폭발시키는 원인이 된다. 많은 경우에, 사이좋게 시작된 이성적인 토론이 성난 기질의 폭발로 인하여 감정적이고 조절할 수 없는 성난 토론으로 변해버린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 사람의 절제되지 않고 조절되지 못한 분노가 말은 너무 빨리, 너무 많이 말하고, 듣기는 너무 늦게 만든다. 야고보는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19)고 말한다. (92.2)
 “말하기를 더디하라”는 교훈이 침묵의 맹세를 배제한다는 것을 우리가 주목하기 이전에, 그것은 말해야 할 때와 방법에 있어서 지혜가 요구됨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야고보가 “성내기도 더디하라”고 말한 것이 같은 진리를 주장하고 있는가? 만약 잠언의 구절과 평행구절이라면, 야고보는 우리가 결코 화를 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고 있다. 야고보는 현대의 심리학자들이 성냄, 즉 구약과 요한계시록의 진노의 하나님과 비슷한 성냄은 건강에 좋다고 하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될 것이다(Carlson, 33-47). (93.1)
 다른 한편으로, 신약 시대와 야고보와 동시대의 유대주의에서 성냄은 긍정적인 감정이 아닌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후자의 경우, 랍비들은 성내는 사람은 그의 yetser를 억제하지 못한 자라고 가르쳤다. 더욱이 랍비들은 사람이 자신의 성난 행동이나 감정을 변명하기 위하여 하나님을 본보기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은 인간들이 모방하는 것이 금지된 하나님만의 특질이 있다고 믿었는데, 성냄도 그중 하나라고 믿었다. (9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