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야고보서 제II부 참 종교 (1:19-2:26) 4. 들음과 행함 (1:19-26)
 신약에서는 한 쌍의 구절이 분노가 명백하게 정죄됨을 나타내고 있다. 첫 번째는, 산상설교 중에 예수께서 여섯 개의 대구 중 첫 번째로 분노를 살인과 동일시하셨다. 그분은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된”(마 5:21, 22)다고 말씀하셨다. 골로새서에서도 우리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골 3:5)는 명확한 명령을 발견한다. 성냄은 음란, 우상숭배, 탐심, 훼방 등과 같은 죄목들과 함께 등장한다(골 3:5-9). (93.3)
 하지만 에베소서에서는 약간의 모순점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기록되기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엡 4:26, 27)고 되어있다. 그러나 사도는 몇 구절 뒤에 가서 기록할 때 매우 명백해진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을 버리라”(엡 4:31). 나는 여기서와 야고보서에 나타난 이중성이 분냄에 대한 신약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에 비추어 이해하기가 쉽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더 나아가서 야고보가 분냄에 대해서 심리학적으로 분석한 것이 아니라고 믿는다. 야고보는 현대 심리학자들이 우리에게 확증하도록 장려하는 그런 건강에 좋고 감성적인 성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야고보가 20-21세기 서구 사회에서 글을 썼다면, 그는 심리학적 이론들에 동의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신약 성경을 엄밀하게 읽어 볼 때, 그들이 다루고 있는 성냄은 죄로 오염되어 피해야만 하는 종류이다. (93.4)
 어떤 사람은 “성내기도 더디하라”는 야고보의 교훈을 어느 정도의 분냄, 즉 의분(義憤)을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한다.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 자주 우리의 세속적인 성냄을 의로운 분개라고 부르면서 변명하는 것이 사실이다. 소위 의분이라고 불리는 많은 경우가 단지 자기 중심의 격앙이며, 자아 중심의 성냄인 것이다. 행동 과학자들은 어떤 성난 행위는(우리 중 어떤 그리스도인이 의분이라고 변명하는) 단지 욕구불만의 결과라고 말한다. 그리고 욕구불만 중 어떤 것은 우리 자신의 방법에 기인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 진리, 공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94.1)
 야고보서의 전체적인 주제에 비쳐볼 때, 이 격언은 시련과 고통 중에 있는 공동체에 대한 야고보의 관심을 배경으로 이해해야만 한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의 스트레스와 시련들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 화를 낸다. 그로 인해 야고보의 공동체에 있는 시련의 압박이 그의 독자들과 청자들에게 듣기는 늦게 하고, 말하기는 빨리 하며, 화내기는 더 빨리 하게 만들었다. Stulac이 그의 주석에서 조명한 것을 보면, 우리가 이해하기가 더욱 쉬워진다: “재정 문제로 다투는 부부는 결혼 문제에 대해 다투기가 더욱 쉬워진다. 그들은 돈이나 다른 문제로 인해 싸울 수 있지만, 금전적인 시련은 서로에게 죄를 짓게 하는 기회가 된다”(James, 64). 야고보서의 경우에는, 성냄이 그 공동체를 파괴시킬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야고보서 4:1, 2“다툼과 싸움”이 야고보서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성냄은 공동의 조화를 파괴시킬 수 있다. (94.2)
 이 부분에서 야고보가 “도”(1:21)를 받아들이고, “도에 대하여”(22절) 듣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야고보서의 독자들이 논쟁해 왔고, 다투어 왔던 “도”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왔다. 사실, 야고보가 거의 독자들에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19절)고 촉구했을 때, 그는 특별하게 말하기는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해야한다는 “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속히 성내는 것을 금한 것은 공동체에서 성내는 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도”에 대한 사상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상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우리 많은 교회들에서, 교인들은 말씀(성경)보다는 논쟁의 주제들을 더 쉽게 발견하다. 교인들 간에 대립되는 논쟁, 언쟁, 다툼, 분냄은 교회의 사명은 고통받는 동안, 공동의 조화를 파괴하며, 자주 우리의 신학과 성경 해석에 중심이 된다. 나의 동료, Alden Tompson이 “신학은 나뉜다; 사명은 연합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말 옳은 것이다. 야고보는 오늘날 신학적 성서적 해석학적 논쟁의 전장 속의 우리에게 “말하기는 더디 하며”, “듣기는 속히 하고” “성내기는 더디 하라”고 훈계할 것이다. 이 격언들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서, 야고보는 그가 쓰고 있는 성냄이 현대인들이 건강에 유익하다고 주장하는 긍정적인 성냄이 아님을 명백히 한다. 이 구절은 “성내기는 더디 하라”는 구절은 앞의 구절인 “말하기는 더디 하라”와는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는 것”은 어떤 부정적인 것이 없다. 야고보는 “듣는 것”“말하는 것”중 더 많이 들어야 한다는 범주에서 단지 우리의 말하는 것이 주의 깊게 규제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성냄은 다르다. 만일 20절19절을 해석하는 데 사용된다면, 야고보가 말하는 성냄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야고보에게 성냄은 결코 연습해서는 안 될 그런 감정이다. 야고보는 단언적으로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20절)고 진술한다. (95.1)
 의에 대한 주석
 한 가지 질문을 위해 잠시 멈추자. 야고보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의로운 삶”(NIV)이라는 구절에서 “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는 이 구절의 NIV 번역의 해석을 주목해야 한다; 헬라어로는 단지 “하나님의 의”라 읽혀진다. 20절의 문자적 번역은, “성내는 사람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질 수 없다”이다.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은 그 용례가 명확하지 않아서, NIV역이 올바르게 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그 번역에 있어서도 여러 번역이 필요하다. (96.1)
 “의”를 이해하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그중 가장 좋은 것을 찾기 전에, 헬라어 dikaiosyne, 히브리어 tsdep와 그 동족어들은(우리가 주로 “의”라고 번역하는) 의, 공의로 번역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런 정서를 가지고, 이 구절에 대한 첫 번째 그럴듯한 해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수여하시는 의로운 지위”이다. 이 번역은 그리스도인에게 수여되는 지위로서 의를 이해하도록 강요하는 경향이 있는데, 현대 해석학자들은 편협하고 옹색한 번역으로 이해하고 있다. (성경 확대경 시리즈 로마서에서 John Brunt의 주석을 보라.) 그러나 내가 이 책에서 줄곧 강조하는 바와 같이, 우리는 바울의 시야로 야고보서를 해석하려는 시도는 매우 주의해야 한다. (96.2)
 이 구절에 대한 두 번째 관점은 NIV에 의해 주어진 의미, 즉 하나님의 승인에 충족할 만한 의로운 행위나 의로운 삶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비록 이런 이해가 이 구절에서는 명백하지 않지만, 문맥적으로는 납득할 만하다. 첫째로, 전체 서신이 의로운 삶을 위한 윤리적 교훈을 깔고 있다. 둘째로, 인접한 문맥인 19절21절이 의로운(혹은 대조적으로 불의한)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96.3)
 셋째로, Peter Davids는 이 구절이 형제를 저주하는 것에 대한 정죄를 담은 야고보서 3:8-12과 관련된다고 주장한다. Davids는 1:19에서 말하는 것을 다루기 시작하여 3장의 이 구절까지 이르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성내는 것(1:19)과 사람을 저주하는 것(3:9)은 똑같은 불의한 행동과 관련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 의미는 이런 저주하면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의로움의 표준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될 것이다(Davids, Commentary, 93을 보라; Davids, James, 40을 비교하라). (96.4)
 반면에, “공의”는 여기서 장점을 가질 만한, 헬라어 dikaiosyne에 대한 효과적인 번역이다. 이런 이해에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다. 첫째는 종말적인 혹은 하나님의 장래의 공의라 일컬을 수 있다. 여기서 야고보는 5:7에 보여지는 하나님의 종말적인 공의를 마음속에 품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거기서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과 청자들에게 마지막 심판을 베푸실 분, 결정적으로 공의롭게 행하실 분인 하나님을 인내하며 기다릴 것을 독려한다. (97.1)
 둘째로, 야고보는 여기서 “하나님의 공의”를 생각하기보다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바라시는 정의로운 삶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E. Malcolm Sidebottom은 유대 사상 속에서 “의”는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개념처럼 엄격한 경건과 올바름의 의미만을 담고 있지는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는 “의는 인애와 자비의 의미로 하나님 안에서 발견하는 ‘선하심’도 포함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불변의 선하심에 관한 교리를 선언한 직후에 오는 그 단어가 이곳에서의 의미임에 틀림없다”(33)고 제안한다. 만일 그런 의미라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원하시는 것이라면, 야고보는 B.C. 8세기에 사회 정의를 외쳤던 구약 시대의 선지자 미가와 정확하게 같은 말은 하고 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공의를 행하는 것은 선행과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몇 구절 뒤에서(1:27; 2장 전체; 5:1-6)야고보의 강력한 사회정의에 대한 태도(미가와 매우 흡사함)를 읽을 때 더욱 명백해질 것이다. 야고보는 이미 여기서 사람이 성내는 것은 그가 하나님이 공의로우신 것처럼 공의롭게 행하도록 하는 것을 방해할 수 있음을 다루고 있다. (97.2)
 “도덕적 더러움”의 본성과 구원받음
 듣는 것, 말하는 것, 성내는 것에 대해 초점을 맞춘 다음, 야고보는 도덕적 더러움과 악을 내어버리라는 요청으로 이 문단을 결론짓는다. 이 권고는 신약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로마서의 윤리적 명령 부분(12-15장)에서 바울은 이 권고를 종말적 문맥에 두고 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자”(13:12). 반면, 에베소서에서는 이 윤리적 명령을 그리스도가 나아오는 초신자들의 문맥에 두고 있다: “가르침을 받았을 진대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4:22; 25절과 비교하라). 반면 골로새인들에게는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한 삶에 대한 부분에서 이 교훈을 주고 있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3:8).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히 12:1)과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벧전 2:1)을 포함한 주목할 만한 다른 구절에서도 같은 관심을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는 다른 신약 서신 대부분이 하는 것처럼 특별한 죄들에 대한 목록이 없이 단지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1:21)라고 진술한다. (97.3)
 야고보서 1:21은 비록 2:2에서 사람이 입은 더러운 옷과 관련하여 형용사로 쓰여지긴 했지만, “더러운 것”이라고 번역된 이 단어가 명사로는 유일하게 쓰여진 곳이다. 구약 성경의 헬라어역(LXX 혹은 70인역)에서는 이 단어가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논쟁에서, 그의 더러운 옷을 벗기고 새 옷으로 입히는 곳에 사용되었다(슥 3:4). 이런 유사성 때문에, 야고보는 도덕적 더러움을 버리라는 호소를 위해 오염되고 더러운 옷을 비유로 사용하고 있음직하다. 하지만 Ralph P. Martin은 이 단어는 좋은 청력을 갖기 위해 제거되어야 하는 귀지에 대한 의학적 용어로서 특별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고 제안한다. 이것은 들음과 말함에 대한 문맥과 매우 잘 어울린다(48). (98.1)
 그 은유가 더러운 옷이거나 원치 않는 귀지이건, 야고보의 요점은 분명하다: 그런 생활방식은 제거되어야 한다. 그리고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에게 “넘치는 악을”(1:21) 잘 벗어 버리라는 것을 덧붙인다. 비록 (kakias)이라는 단어가 기본적으로 “악”이나 “나쁜”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악의”로 해석하는 것이 보다 나을 듯 싶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악의를 품은 모든 경향” 혹은 “넘쳐나는 앙심”으로 해석될 것이다(Davids, James, 40을 보라). 그러므로 야고보는 외부적인 분노뿐 아니라 마음과 영혼으로부터 제거될 필요가 있는 내부적 악의도 비난하고 있었을 것이다. (98.2)
 “내어 버리라” 혹은 “벗어 버리라”는 명령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과 의지로 이룰 수 있음을 의미하는가? 우리가 더러움과 악과 악의를 제거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시는가? 야고보의 명령은 성경의 일반적 가르침에 견주어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이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으로 할 수 없다고 가르친다. 우리 혼자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끌어올려 경건한 삶을 산다든지, 혹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죄를 없이하여 하나님 앞에서 옹호함을 받으려는 시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다. 이사야 64:6의 본문은 매우 명백하다: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다.” 누구도 더러운 천조각을 이용하여 더러운 옷을 제거할 수는 없다. 스가랴 3장의 대제사장 여호수아에 대한 기사에서 여호수아가 그 더러운 옷들을 벗은 것이 아니요, 그 옷들이 벗기워졌음이 명백하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천사가 “내가 네 죄과를 제하여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슥 3:4)고 말하였다. (99.1)
 야고보는 먼저 부정적으로 말한다: 더러운 것과 악을 내어 버리라. 다음으로 긍정적으로 말한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1:21). 우리가 “도”가 구원하는지 아니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다루기 전에, “도”(헬라어로는 logos)에 대하여 정의해보자. 요한복음 1:1에서, 예수님은 말씀, 로고스로 정의되셨다. 하지만 야고보가 마음속에 요한의 견지를 가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는 여기서 매우 탁월한 신학인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거의 말하지 않고 있다. 로고스로서의 예수님의 모습은 신약에서 요한복음의 서론(요 1:1-18)으로 제한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의 내재하시는 개념은 바울의 사상에 더욱 많이 나타난다. 아마도 야고보는 구약성경의 “율법”과 동의어로서 “도”를 사용하였을 것이다. (99.2)
 우리 앞에 점점 더 크게 다가오는 문제는 이것이다: 심겨진 말씀이 정말 구원하거나 구원에 이르게 하는가? 사람은 말씀을 고백하는 것을 근거로 구원받거나 의롭게 되는가? 우리는 어떤 종류의 행함이나 말씀이 아닌 믿음을 통한 은혜로 구원받는 것이 아닌가? 우리가 “구원하다”(sōzō)라는 단어를 바울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대한 신학적 토론에서 사용했을 때와 같은 방법으로 이해하려 한다면 야고보의 진술에 대한 질문들을 대답하기가 어려울지도 모른다. 많은 경우에, 특별히 복음서에서, 그것은 삶의 회복이나 육체적 나음과 관련이 있다. 예를 들어,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져서 나음을 입은 후에, 예수께서 그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sōzō]”(누가복음 8:48)고 말씀하셨다. 만일 야고보가 “구원하다”는 단어를 이런 의미로 사용했다면, 그는 이 단어가 가지고 있는 것이 전체적이고 완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99.3)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이 이 “도”(1:21)를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말한다. 이 겸손과 온유는 그가 앞서 말했던 성냄과 대조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의롭고 정의로운 삶을 이룰 수 없는 성냄과 대조하여, 야고보는 그의 독자들이 도를 받을 때 온유하기를 간구한다. 우리는 이 부분을 야고보의 세 부분의 격언(19절)을 주목함으로 결론지을 수 있는데, 그는 그의 독자들을 윤리적 행동의 가장 좋은 것으로부터, 나쁘지는 않은 것, 나쁜 것에 이르기까지 이끌고 있다: 듣는 것은 가장 좋은 것이다—듣는 것은 속히 하라; 말하는 것은 나쁘지는 않다—말하기는 더디 하라; 성내는 것은 나쁜 것이다—성내기는 더디 하라 왜냐하면 이것은 정말 경건치 못한 것이며 우리가 온전한 도를 받아야 하는 온유함과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