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부분에서 야고보가
“도”(
1:21)를 받아들이고,
“도에 대하여”(
22절) 듣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주목하는 것은 흥미롭다. 이것은 야고보서의 독자들이 논쟁해 왔고, 다투어 왔던
“도”를 이해하도록 이끌어 왔다. 사실, 야고보가 거의 독자들에게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절)고 촉구했을 때, 그는 특별하게 말하기는 더디 하고 듣기는 속히 해야한다는
“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속히 성내는 것을 금한 것은 공동체에서 성내는 자들의 마음속에 있는
“도”에 대한 사상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 사상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경험에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우리 많은 교회들에서, 교인들은 말씀(성경)보다는 논쟁의 주제들을 더 쉽게 발견하다. 교인들 간에 대립되는 논쟁, 언쟁, 다툼, 분냄은 교회의 사명은 고통받는 동안, 공동의 조화를 파괴하며, 자주 우리의 신학과 성경 해석에 중심이 된다. 나의 동료, Alden Tompson이
“신학은 나뉜다; 사명은 연합한다”고 주장한 것은 정말 옳은 것이다. 야고보는 오늘날 신학적 성서적 해석학적 논쟁의 전장 속의 우리에게
“말하기는 더디 하며”,
“듣기는 속히 하고” “성내기는 더디 하라”고 훈계할 것이다. 이 격언들 다음에 나오는 구절에서, 야고보는 그가 쓰고 있는 성냄이 현대인들이 건강에 유익하다고 주장하는 긍정적인 성냄이 아님을 명백히 한다. 이 구절은
“성내기는 더디 하라”는 구절은 앞의 구절인
“말하기는 더디 하라”와는 달리 해석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하는 것”은 어떤 부정적인 것이 없다. 야고보는
“듣는 것”과
“말하는 것”중 더 많이 들어야 한다는 범주에서 단지 우리의 말하는 것이 주의 깊게 규제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성냄은 다르다. 만일
20절이
19절을 해석하는 데 사용된다면, 야고보가 말하는 성냄은 완전히 부정적인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야고보에게 성냄은 결코 연습해서는 안 될 그런 감정이다. 야고보는 단언적으로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20절)고 진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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