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확대경 - 사무엘 상∙하 제 Ⅱ 부 사무엘과 사울: 여호와께서 주시고 여호와께서 가져가심 (삼상 8-15) 제 4 장 여호와께서 사울로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심 (삼상 13-15)
 요약하자면, 만일 사울이 사무엘의 언도 심판을 듣고 바로 잡았더라면 그와 그의 집을 위하여 좋은 일이 생겼을 것이다. 결국 「제임스왕역」 구약에서 하나님은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자주 “회개하신다”(“repents”)! (122.2)
 요나단이 길을 인도함(13:15-14:52)
 블레셋과의 전투 속에서 하나님의 손과 요나단의 칼이 특출한 역할을 한 놀라운 이야기가 사울이 버림당하는 두 사건 속에 끼여 있다. 사울은 여전히 왕이었고, 이 장면에서 중요한 인물이다. 실로 그는 하나님과 함께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블레셋과 싸우는 것보다 더 염려스러웠다. 그러나 요나단은 영웅이었고, 그 공로는 하나님의 것이었다. (122.3)
 이 전투의 이야기는 전투 직전의 이스라엘의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는 서언(13:16-22)과 사울의 통치의 긍정적인 몇 특징을 요약하는 결론(14:47-52) 사이에 들어 있다. 전투 이야기 자체는 하나님의 임재로 떨리고 있다. 그러나 대조적으로 서언이나 결어에는 종교적 요소가 결여되어 있다. (122.4)
 요나단이 블레셋이 장악하고 있는 지역에 몰래 침투함으로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비밀에 감추인 이유들 때문에, 저자는 요나단이 그의 아버지(14:1)나 어느 누구(3절)에게도 행방을 알리지 않았다는 것을 꼬집어 말한다. 전에 사울은 2,000 군사를, 요나단은 1,000 군사를 호령하였다(13:2). 이제 합친 군대의 수는 고작 600밖에 되지 않으며, 이 숫자를 저자는 두 번이나 언급한다(13:15; 14:2). (122.5)
 여호와의 제사장, 엘리의 현손, 비느하스의 증손, 아히둡의 아들 아히야는 진중에서 에봇을 지키고 있었다(14:3). 아히야는 에봇(18절, 「70인역」)이나, 궤(18절, 히브리어 성경)나 그리고 아마도 우림이나 둠밈을 통하여(41절, 「70인역」) 하나님의 뜻을 사울에게 해석하는 사람이었다. 저자는 사울이 얼마나 심각성을 가지고 종교적으로 충성된지를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듯하다. (123.1)
 요나단 역시 깊은 신앙적 확신을 가진 사람임이 드러났다. 그러나 적군을 대했을 때에 그는 그 신념을 더 실제적인 방향으로 드러내었다. 매우 유능한 전사(13, 14절)인 자신의 병기 든 소년과 함께 요나단은 믹마스의 블레셋 진영으로 전진하였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에 세 차례나 요나단은 모든 일이 여호와의 손에 달렸음을 인정하였다(6, 10, 12절). 그 아버지의 종교 행사를 고집하는 무모함과 대조적으로 요나단의 확신은 여호와께서 선한 뜻을 따라 역사하시는 자유를 인정하는 고요한 겸손으로 표현되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고 그는 말하였고, 믿음의 백성들에게 매우 친근한 다음의 말을 또한 덧붙였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6절). (123.2)
 기드온처럼 요나단은 징조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일하시기를 기대하였다. 그러나 기드온과는 달리 그는 둘째 의견을 구하지 않았다(삿 6:36-40). 블레셋 사람들이 반응하였을 때에 그와 그의 병기 든 자는 험준한 바위를 타고 올라가 일을 벌였고 20명의 무사를 처치하였다(14:14). 이 숫자는 구약에서 매우 드문 “납득할 만한”(“reasonable”) 머릿수이다. 그들의 공포는 지진으로 더욱 심화되었다(15절). 사울과 그의 군대가 도착했을 때에 블레셋 사람들은 서로를 살상하고 있었다(20절). (123.3)
 저자는 이 전투에서 하나님이 개입하신 사실을 누누이 상기시키고 있으며, 블레셋 사람들 중의 공포는 “하나님이 보내신” 것이라고 말한다(15절). 그런데 어떤 번역들은 하나님을(god)을 형용사로 취급한다(문자적으로, “하나님의 공포”[“panic of God”]; 「제임스왕역」에는 “매우 큰 떨림”[“a very great trembling”]; 「새개정표준역」에는 “매우 큰 공포”[“a very great panic”]). 블레셋 사람들이 완전히 패주(敗走)했을 때에 성경은 “여호와께서 그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23절)라고 말한다. (123.4)
 사울의 종교적 삶이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관심거리이다. 그가 요나단이 진영에서 없어진 것을 알고서는 아히야와 궤(히브리어 성경) 혹은 에봇(「70인역」)을 불러들여 하나님의 지도를 구한다. 그러나 블레셋 진영의 소란함이 더 커지자 사울은 침착함을 잃었다. 14:19에서 “네 손을 거두라”는 말은 성경이 비록 직접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우림과 둠밈으로 조언을 구하는 과정을 중지시킨 것이다. (124.1)
 사울의 종교적 성향을 잘 나타내는 그 뒤의 사건들은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무엇이든지 먹는 자에 대하여 한 맹세로부터 시작된다(24절). 군사들은 동의하였다. 그러나 날이 다하자 그들은 너무 허기져서 피를 먹지 말라는 금령을 무시하고 노략물에 달려들어 배를 채웠다(32, 33절). 사울은 이 형편을 바로 잡을 조치를 바로 취하였다. 큰 돌을 굴려다가 놓고 군사들이 그 위에서 동물을 잡음으로 “피 있는 채 먹어서 여호와께 범죄하지 말라”(34절)고 하였다. 이때에 사울은 “여호와께” “첫” 제단을 쌓았다(35절). 저자가 이 말을 칭찬으로 했는지 혹은 비판으로 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24.2)
 그러나 그 맹세는 어떠한가? 군대에게 그런 부담을 지운 사울의 행위는 온당한 것이었나? 그렇지 않다면 그 결과를 바꾸든지 번복할 적당한 길은 없었는가? 시초부터 히브리어(「새국제역」이 따름)는 그 맹세는 “근심”의 원인이었다고만 말한다(24절). 「70인역」(「새개정표준역」이 따름)은 매우 비판적이다: “사울은 그날 매우 성급한 행동을 하였다.” 클라인의 번역은 더 처절하다: “사울은 큰 실수를 하였다”(Klein, 130). 알지 못하고 숲 속에서 꿀송이를 조금 먹음으로 맹세를 어긴 요나단 역시 그 아버지의 맹세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29절).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를 어긴 사람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맹세를 사울이 하나 더 하자(39절), 「70인역」에는 맹세를 어긴 사람을 사울과 요나단 사이에서 제비뽑기로 결정되었을 때에 있었던 군사들의 항의가 기록되어 있다: “비록 군사들이 이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으나 사울은 강행하여 그와 그의 아들 사이에서 제비를 뽑도록 하였다”(42절, 클라인의 번역). 클라인(131)과 머카터(244)는 누락된 줄을 「70인역」에서 가져와 그들의 번역에 포함시켰다. 주요한 현대 번역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새국제역」, 「새미국표준성경」, 「개정표준역」, 「새영어성경」, 「예루살렘성경」). (124.3)
 그러나 사울의 맹세가 얼마나 잘못 되었든지 간에, 줄거리는 여호와께서 사울과 백성이 그것을 존중하기를 기대하신 것을 분명히 알리고 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지만, “죄”(38절) 즉 맹세를 어긴 것이 수정될 때까지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조언을 주시지 않을 것이었다. 요나단은 아버지의 주장의 타당성을 인식하고 죽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자 군사들이 마침내 이렇게 말하였다: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同事)하였음이니이다”(14:45). 그리하여 그들은 요나단을 “구원”(45절) 혹은 “속량하였다”(「새개정표준역」). 본문은 그들이 그의 생명을 구하였는지, 돈을 내었는지(출 21:30; 민 3:46-51), 동물을 대신 내어놓았는지(출 13:13, 15; 34:20) 말하지 않는다. 구약 시대에 있어서 맹세는 현명하지 못한 것이든지(예컨대: 입다, 삿 11:35), 속아서 맹세하였든지(예컨대, 기브온 족속, 수 9; 삼하 21:1-14) 간에 매우 심각하게 취급되었다. 이 경우에서는 패주한 베냐민의 경우와 같이(삿 19-21) 이 맹세의 요구를 벗어날 길이 발견되었다. 그러나 이 두 경우에 그 피할 길은 맹세한 사람 당사자가 아니라 제삼자에 의해 조정되었다(삿 21:16-23과 비교). 다른 말로 하면, 그저 맹세가 “잘못되었다”고 말하고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무릇 맹세는 “잘못된” 것일지라도 다 지켜져야 한다. (125.1)
 요나단의 구출 이야기 후에 사울은 추적을 그만두도록 명한다. 블레셋 사람들은 자기 땅으로 물러갔다. 사울을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우선적인 목적 즉 “내 백성을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 구원하”는(9:16) 일이 그 당시만 해도 크게 이루어졌다. 제13장에서 사울의 죄로 인하여 사울 가족의 왕조적 야망이 제거되었을지라도, 14장에서 전투의 주요 지도자는 요나단이었지만, 여전히 사울이 왕이었다. 이 장은 그가 패퇴시킨 원수들의 명단(47, 48절)과 간단한 가계도(49-51절)와 계속되는 “블레셋 사람들과의 쓴 전쟁”에 관한 마지막 진술과, 사울이 “용사”들의 모집에 성공한 이야기(52절)로 마무리되고 있다. 성공의 이야기는 여호와께서 길갈에서의 사울의 죄를 참으로 용서하셨다는 것을 시사하기라도 하는 양 매우 열렬하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고 해도 아말렉을 멸하라는 명령을 사울이 잘못 실행한 결과로 생기는 최후의 버림당하는 일이 올 것이다. (125.2)
 사울 왕을 버림(15:1-35)
 연대에 관한 아무 언급이 없는 가운데 15장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전한 말—아말렉을 진멸하라는 여호와의 명령—로 시작된다. 그러나 사무엘은 여호와의 권위뿐만 아니라 자신의 권위도 강조하였다: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 왕에게 기름을 부어 그 백성 이스라엘 위에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 ”(1절). 결국 사무엘과 사울 사이의 이 관계는 쓰라린 감정적 긴장의 요소가 된다. (126.1)
 이 장은 예수의 산상 설교나 십자가 위에서의 원수를 용서하는 기도와는 전혀 다른 내용이라 여겨진다. 출애굽기에서 아말렉은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공격한 첫 원수였다.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지탱하여 여호수아가 전장에서 승리하게 한 후에, 여호와께서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출 17:14)고 말씀하셨다. 신명기는 아말렉이 부족 자체의 안녕을 지키기 위한 충동보다 더 지독한 악독이 있음을 말한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너를 길에서 만나 너의 피곤함을 타서 네 뒤에 떨어진 약한 자들을 쳤”기(신 25:18) 때문이다. 이스라엘은 “아말렉의 이름을 천하에서 도말할지니라”(19절)는 명을 받았다. 이 명령에 사무엘상 15장이 분명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하여 구약의 상황 속에서 공의에 관한 한, 아말렉 사람들은 파렴치한 무법자들이며 인류의 적이다. (126.2)
 그런데 이 진멸(헤렘[ḥerem])에 왜 “여인과 아이와 유아와 소와 양과 약대와 나귀”가 포함되었는가? 적어도 어린이들은 살리고 동물들은 유용한 일에 사용할 수 없었을까? (127.1)
 서구의 개인주의의 사고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그런 질문이 꼭 생기기 마련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더 중요한 문화 속에서 개인은 보다 넓은 공동체 속에서 자기 존재를 상실할 수 있다. 그런 문화 속에서, 공동체 인격(corporate personality)이라는 것은 지도자 혹은 가장 속에 모든 족속과 재산이 들어있는 것을 뜻한다. 분명한 성경적 예는 여호수아 7장의 아간의 이야기에서 나온다. 그가 바친 물건에 대하여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이스라엘 전 군대가 아이 성 싸움에서 패했다(1-11절). 이 악을 속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아간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함께 멸하는 것이었다(12-26절). 하나님은 공의의 보증인이므로 그 금지된 것의 내용을 집행하시기 위해 직접 개입하셨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만 유일한 “공의”의 요소인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1868년에 발견된 「모압 돌」(The Moabite Stone)에 의하면, 모압 왕은 이스라엘 “남자, 소년, 여자, 소녀, 여종들”을 잡아서 “그들을 아쉬타르—그모스(Ashtar—Chemosh) [신]에게 바쳐 죽였다”(Pritchard, 320). 요컨대,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취급한 것은 그 당시 수준의 공의였다. (127.2)
 사울은 이스라엘에서 20만, 그리고 유다에서 10만이라는 거대한 수의 군대를 모집하였다. 단 히브리 숫자는 더 적절하게는 이스라엘에서 200개의 부대, 유다에서 10개의 부대라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큰 숫자는 하나님의 명령을 불이행한 사실에 대하여 “핑계를 댈 수 없는 사울의 군사적 우위”를 보여주고자 의도된 것 같다(Klein, 149). 공격하기 전에 사울은 겐 족속에게 아말렉 족속으로부터 분리하라는 기별을 보내었다. 그들은 남겨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의 이웃인 강도떼와는 달리 애굽에서 나온 방황하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친절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6절). (1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