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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가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는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안식일 신앙으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구원을 얻었으므로 안식일의 안식을 누리는가. (136.1)
 우리는 위와 같은 질문을 신앙이냐 아니면 율법이냐 하는 방식의 질문으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리하여 우리는 신앙이냐 아니면 안식일이냐의 양자택일을 압박받는 마음으로 황급히 이 질문에 대답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신앙이냐 안식일이냐 하는 질문은 우리의 안식일 신앙을 이해하는 데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잘못된 질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안식일 신앙이 이렇듯 어처구니없는 양자택일의 강요로 말미암아 훼손되어서는 안 된다. “안식일 신앙”이란 표현 자체가 이같은 황당한 도전을 뿌리치는 신앙의 표현이다. 우리는 안식일과 신앙을 갈라놓는 방식의 신앙생활을 의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과 신앙을 통합하는 형태의 신앙의 삶을 의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136.2)
 따라서 우리에게 있어서 안식일 신앙이라는 말은 당연히 율법신앙이란 말의 동의어로서가 아니라 율법과 신앙의 대립을 넘어서 신앙과 율법을 통합하는 차원에서 안식일 신앙을 말하는 것이다. 이와같은 안식일 신앙의 인식을 토대로 하여 우리는 위에서 제기한 질문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 구원을 얻기 위하여 안식일 신앙으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구원 얻었으므로 안식일의 안식을 누리는가. 이 질문에 대해서도 양자택일의 답변은 우리의 통합적인 안식일 안식의 신앙을 분열시키는 것이 될 것이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우리에게 제칠일 안식일 신앙은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으로 나아가는 신앙이면서 동시에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예수님과 함께 누리는 신앙이다. (136.3)
 일차적으로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출 20:10)는 계명은 초청의 계명이다. 6일의 삶에서 기진하고(마 15:32) 숨넘어가게 된 우리들을 향하여 제칠일 안식일로 와서 “아무 일도 하지 말고”(출 20:8) “숨을 돌리라”(출 23:12)고 하는 하나님의 초청이다. 하나님의 쉼이 샘솟는 제칠일 안식일로 나오라는 초청이다. 즉 제칠일 안식일로의 초청은 쉼으로 오라, 구원으로 오라, 생명으로 오라는 초청이다. 제칠일로 나와서 구원을 누리라는 초청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모두 제칠일 안식일로 나와서 구원을 얻으라는 초청이다. (137.1)
 그런데 제칠일 안식일로의 초청은 동시에 하나님에게로의 초청이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의 초청이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는 초청이다. 따라서 제칠일 안식일로 가는 신앙은 하나님에게로 가는 신앙이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는 신앙이다. 하나님의 창조의 신앙으로 가는 신앙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창조로 가는 신앙이다. (137.2)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 에게로 가면 구원을 얻고 영생을 얻는다는 의미로 제칠일 안식일로 가면 쉼을 얻고 구원을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제칠일 안식일 신앙은 하나님께로 가고 예수님에게로 가서 그로 말미암아 쉼을 얻고 구원을 얻는 신앙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제칠일 안식일 안에서 쉼을 얻는 신앙은 하나님께로 가고 예수님께로 가서 쉼을 얻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쉼을 얻는 신앙이기 때문이다. (137.3)
 그런데 하나님께로 가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가서 쉼을 얻는 신앙의 삶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에게로 가서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에게 쉼을 배우는 삶이며 예수님에게로 가서 예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에게 쉼을 배우는 삶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모든 사람들에게 “내게로 와서”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마 11:28,29)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138.1)
 따라서 하나님의 “그의 안식으로 들어가는”(히 4:10) 신앙은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어 하나님 안에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안식으로 들어가는 신앙이며, 하나님 안에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안식은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멍에를 멤으로써 비로소 들어가 하나님께 배우고 예수님께 배우는 안식이다. (138.2)
 그러면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예수님의 멍에를 메는 안식일 신앙은 구체적으로 어떤 신앙인가. 사도 바울은 말하기를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고후 6:14)고 교훈하셨다.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이 어둠과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고후 6:14-16)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멍에를 메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하며” “사귀며,” “조화되며,” “상관하며,” “일치하는” 삶을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하나님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고후 6:16; 출 29:45) 삶을 말한다. 우리가 세상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고” 그리하여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접을 받아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자녀가 되는”(고후 6:18) 신앙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남편이 되고 우리가 그의 여자가 되는 신앙을 말한다(사 54:5). (138.3)
 이처럼 제칠일 안식일로 부르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초청은 하나님의 멍에로의 초청이다. 하나님의 멍에로의 초청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는 초청이고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는 초청이고 하나님의 신부로 부르는 초청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고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며,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의 자녀가 되며, 하나님은 우리의 지아비가 되고 우리는 그의 신부가 되는 관계로의 초청이다. 창조주 하나님께로 오라, 아버지께로 오라, 신랑에게로 오라는 초청이다. 창조주 하나님께로 와서 그 백성이 되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와서 그 자녀가 되고 하나님 신랑에게로 와서 그 신부가 되라는 초청이다. (139.1)
 이처럼 하나님과 우리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가 같은 멍에를 메고 같은 안식에 동참하는 신앙을 언약의 신앙이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그의 안식일로 나와 그의 멍에를 지고 그의 안식에 참여하라는 초청은 하나님이 자신과 사람 사이에 그리고 자신과 사람의 후손 사이에 “언약을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사람과 사람의 후손의 하나님이 되시려는”(창 17:7) 초청이었다. (139.2)
 그러므로 제칠일 안식일의 초청은 언약으로의 초청이고 제칠일 안식일의 안식은 언약의 안식이다. 제칠일 안식일 안에 있는 안식은 우리가 하나님의 멍에를 멤으로써 들어가는 안식이며,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신부가 됨으로써 비로소 “들어가게 되는”(히 4:10) 안식이고 구원인 것이다. 하나님과의 영원한 언약으로 말미암아 들어가는 안식이고 구원인 것이다. 우리에게 제칠일 안식일은 우리가 하나님의 멍에를 메는 표이고 하나님과 언약을 맺는 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표이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표이며 하나님의 신부가 되는 표이다. 하나님의 안식과 구원으로 들어가는 표이다. (139.3)
 우리는 안식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며 안식일로 들어가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신부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안식일로 들어갈 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와 신부만이 누리는 그 쉼과 구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즉 제칠일 안식일의 안식은 하나님의 백성만이 누리는 특별한 차원의 안식이며 하나님의 자녀와 하나님의 신부만이 경험하는 특별한 성질의 안식이다. 여자에게는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됨으로써만 “들어가게 되는” 행복의 차원이 있듯이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됨으로써만 비로소 “들어가게 되는” 안식의 차원이 있고 구원의 차원이 있다. 바로 이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제칠일 안식일로 나아가는 것이다. (140.1)
 둘째로, 제칠일 안식일 신앙은 우리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 있는 쉼과 구원을 누리게 되는 신앙이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고 말씀하셨다. 안식일 신앙은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가 예수님과 함께 멍에를 멤으로써 우리가 의롭게 되었으니 이제는 하나님과 함께 하나님의 안식을 누리자 하는 신앙이다. 우리가 제칠일 안식일 안에 있는 “그의 안식에 들어갔으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그리고 예수님과 더불어 하나님의 쉼을 누리자” 하는 것이 안식일 신앙이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안식을 누림 같이 안식을 누리며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 같이 자기 일을 쉬게 되는 것이다”(히 4:10). 제칠일 안식일의 언약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멍에를 메고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 자”(히 4:10)는 이제 당연히 하나님의 안식으로 말미암아 “저희의 수고를 그치고 쉬게 되는”(계 14:13) 것이다. (140.2)
 제칠일 안식일로 초청되고 하나님의 멍에로 초청받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하나님 나라의 밖에 있었으며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외인이었다.” 하나님의 멍에 밖에 있었고 예수님의 멍에 밖에 있었다. 그래서 고달프고 괴로운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다”(엡 2:12,13). 하나님과 한 멍에를 메게 되었다. 예수님과 한 멍에를 메게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엡 2:19). 즉,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현재 우리가 서 있는 이 안식일 언약의 안식에 들어감을 얻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것이다(롬 5:2). (141.1)
 이처럼 우리가 제칠일 안식일에 누리는 안식은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멍에를 메어 하나님의 식구가 되었으므로 그 당연한 결과로서 하나님의 가족이 된 사람만이 누리는 은혜와 특권으로서 누리는 삶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제칠일 안식일의 쉼은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에게 필수적으로 나타나는 표인 것이다. 시집간 여자가 당연히 아이를 낳듯이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고 예수님께로 가서 하나님과 예수님의 멍에를 멘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당연한 결과가 하나님이 안식을 누림같이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하나님과 멍에를 같이 메어 안식을 누리는 신앙의 외형적인 표가 곧 제칠일 안식일의 준수이다. 즉 제칠일 안식일 안에서 누리는 쉼이야말로 하나님과 예수님께로 가서 그의 멍에를 메어 예수님께 안식을 배우는 자의 표라는 말이다. (141.2)
 이처럼 우리들은 하나님 안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위하여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안식일 신앙으로 나아가는 것이며 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얻었으므로 그 구원을 누리는 차원에서 우리가 안식일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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