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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인톤(R. Bainton)은 “콘스탄티누스의 즉위와 함께 교회사에 있어서 평화주의의 시대가 끝났다”고 하였다.1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c. 260-340)는 이러한 시대를 증언하고 대변하였다. 그의 모든 저작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가 시작된 후에, 그리고 그 저작들의 대부분은 콘스탄티누스의 밀비아교(橋) 승리가 있은 이후에 이루어졌다. 유세비우스의 전쟁관이 비교적 시종일관한 특징을 지닐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그의 저술 기간에 이루어진 사회적 정황이 하나의 흐름으로 일관한 사실에 크게 기인한다. (104.1)
 그리고 사실상 콘스탄티누스가 밀비아 다리에서 승리를 이루기까지의 20여 년에 걸친 내란의 기간이야말로 그리스도교 평화주의의 변천을 가져온 중요한 시기였다.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과 박해가 쟁점이 되었던 이 내란의 기간을 통하여 그리스도인들을 둘러싼 적대개념들이 단순화되고 세속화되는 현상이 발생했다. 하나님과 평화, 마귀와 전쟁, 콘스탄티누스의 군대와 하나님의 군대, 그리스도교에 적대적인 황제들의 군대와 마귀의 군대, 현실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승리와 마귀의 패배라는 형태의 등식 관계가 형성되었다.2 하나님의 성도와 마귀의 싸움은 세상 나라의 심판정과 원형극장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대한 관용과 적대로 대립된 군사력의 대결로 나타나고 있었다. 하나님의 병사들은 비무장으로 오직 믿음만을 가지고 박해와 싸우는 순교자가 아니라 물리적으로 무장한 콘스탄티누스 휘하의 제국 군대였다. 마귀 군대로서의 이미지는 이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이교 황제의 군대에만 제한하여 적용되었다. 이전에 군대 일반에게 부여되었던 악마적, 범죄자적 이미지들은 이제 전부 반그리스도교적인 황제들의 군대에게 전가되었다.3 군대에 복무하는 그리스도인 병사들도 더 이상 그 신앙적 진실성이 의심받지 않아도 좋게 되었다. (105.1)
 유세비우스는 기원 303년의 대박해가 발생하기 오래 전에 갈레리우스(Galerius) 황제가 강등, 학대, 살인의 협박을 통해 군복무 중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신앙에서 떠나도록 강제하였다고 하면서 그리스도교 군복무자들에게 동정을 표하고 있다.4 또 기원 299년경에 베투리우스(Veturius)라는 이름의 장군이 휘하 장병들 가운데서 그리스도인 병사들을 숙청한 사실을 말하면서 마귀는 군대 내의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할 수 있다면 일반교회를 박멸하는 일이 더 용이해질 것으로 생각했다고 하였다.5 (106.1)
 이제 병영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가 소중히 여기는 교회의 자산이 된 것이다. 높은 지위의 로마군인이었다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후에는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고 가혹한 채찍질을 견딘 후에“ 퇴역하여 고아들과 과부들과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을 돌보다가 마지막에는 순교로서 생애를 마친 셀류쿠스(Seleucus)라는 사람의 행적에 찬사를 보내던 때와는 교회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진 것이다.6 부대에 남아있는 그리스도인이 군직을 포기한 그리스도인 보다 열등하다는 암시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고 있다. (106.2)
 놀라운 것은 콘스탄티누스 군대의 군기(Labarum)에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이 일에 대해 교회도 황제도 전혀 불만을 나타내지 않았다. 더욱 더 놀라울 일은 그리스도교회가 순교자들에게만 제한하여 사용해왔던 승리자(Victor)의 칭호를 콘스탄티누스가 주장한 것이다. 즉 콘스탄티누스 자신이 순교자들의 계승자로 자처하고 나선 사실이다.7 (106.3)
 그리스도교회와 로마제국 사이의 이러한 융합은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와 관용이 쟁점이 되었던 20여년에 걸친 내란의 결과였다. 그리스도교회는 이 기간에 자연히 그들의 투사인 콘스탄티누스에게 열망과 기도 그리고 심지어는 그리스도인의 병력까지 지원할 수 밖에 없었고 드디어 콘스탄티누스가 십자가의 군기로 신앙의 원수를 패배시켰을 때에는 그를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자로 찬양케 되었던 것이다.8 (107.1)
 유세비우스는 콘스탄티누스 시대의 이러한 감정을 대변하고 있었다. 유세비우스의 눈에는 동서가 한 가족을 이루어 더 이상 나라끼리 전쟁을 치루지 않게 되리라는 고대의 예언이 콘스탄티누스의 군사력에 의해 성취되었다.9 도시국가들로 나뉘어져 전쟁을 일삼던 세계는 이제 하나의 제국과 하나의 황제 아래에서 평화를 달성했으며 동시에 도시국가들의 수보다도 더 많이 흩어졌던 다신론적 종교계도 그리스도교의 한 하나님 신앙으로 평화를 이루게 되었다. 그리하여 교회는 믿음도 하나요 주님도 하나라는 고백을 하나의 실재로 만들어 낸 하나의 제국과 하나의 황제와 하나의 제국 군대에 대해 칭송의 정신으로 충만케 되었다. (107.2)
 유세비우스는 교회가 바야흐로 획득한 불안정한 평화를 생각하면서 그리스도인들과 보수적인 로마인들을 향하여 그리스도교와 콘스탄티누스적 질서의 동반 관계를 확인하고자 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로마인들의 선(bonitas) 개념을 빌어 로마인들이 선한 황제로 기억하고 있는 황제들을 그리스도교회의 박해 역사에서 제외시키고 그리스도교회 박해의 모든 책임을 악마와 또 로마인들로부터 기억의 저주를 받고 있던 악한 황제들에게 전담시켰다. (107.3)
 그 좋은 예를 리용과 비엔느(Viienne) 교회의 박해에 대한 유세비우스의 서술에서 볼 수 있다. 이 박해는 “선”한 황제인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의 통치기간에 발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사실인즉 그 책임이 기원 196년에 사망한, 마르크스의 형으로서 안토니우스(Antonius)란 이름을 함께 가지고 있던 루키우스 베루스 안토니우스(Lucius Verus Antonius)에게 있었다는 것이다.10 그리고 리용의 순교자들이 싸운 싸움은 로마정부와의 싸움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들과의 싸움이었다고 하였다.11 (108.1)
 유세비우스는 그리스도교회 박해의 책임을 제국의 선한 황제로부터 악한 황제에게로, 그리고 눈에 보이는 로마 당국으로부터 눈에 보이지 않는 마귀들에게로 전가시킴으로써 로마 정부에 대한 직접적인 비판을 자제했다. 유세비우스는 전격군단(Thundering Legion)을 지휘했던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가 군단 소속의 그리스도교 병사들의 도움으로 전세를 역전시킨 사실을 자랑조로 소개하였다.12 그는 4명의 병사들이 알렉산드리아에서 순교한 기사를 취급할 때도 그 학살의 책임이 마귀들의 책동에 있었다고 하면서13 그 마귀가 토가(toga)를 입고 있었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갈리에누스(Gallienus) 황제의 치세 중에 발생한 백인대장 마리누스(Marinus)의 순교에 대한 기사14에 있어서도 순교문학에 자주 나타나는 바 재판관에 대한 단죄가 전혀 나타나고 있지 않다. (108.2)
 유세비우스는「교회사」 8권 서두에서도 그리스도인 병사들이 군에서 숙청된 기사를 다루었다. 여기에서도 로마를 비방하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가 역력하였다. 그는 오히려 그 박해의 원인이 교회의 죄악적인 사치에 있었다고 하였다. 락탄티우스는 동일한 사건일 가능성이 높은 사건 즉 군대 내의 그리스도인 병사들에 대한 박해를 이야기할 때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비난했으나 유세비우스는 막연하게 최고사령관(στρατοπεδαρχη󰐠)이란 직책자에게 비난을 돌렸다.15 (109.1)
 「교회사」의 끝 장과「콘스탄티누스의 전기」의 전체 이야기는 군사력으로 박해자를 정복하고 교회에 평화를 확보해 준 한 위대한 군주에 대한 감사와 역겹다싶은 찬사로 가득차 있다. 그는 어느 곳에서도 콘스탄티누스의 군사행위를 반대한다는 인상을 남기지 않았다.16 그에게 중요한 것은 가까스로 확보한 교회의 평화였다. 이 평화를 위해 필요하다면 유혈도 가능한 것이었다. (109.2)
 여기서 주목되는 사실은 유세비우스 이전에도 교회와 제국 사이에 호혜주의가 늘 있어 왔던 것이지만 유세비우스의 로마 제국관은 이같은 호혜관계를 넘어서 교회와 제국의 일치화로 치닫고 있다는 점이다. 1세기 그리스도교 저술가들은 그리스도의 탄생에 때 맞추어 이루어진 아우구스투스의 평화를 하나님의 선물로 찬양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유세비우스는 달랐다. 20여년의 내란 끝에 그리스도교를 표방하는 군주에 의해 가까스로 획득한 평화가 그 앞에 있었다. 바로 이같은 교회 정치적 상황변화가 유세비우스의 로마제국관의 배후를 이루고 있었다. (109.3)
 교리적으로도 콘스탄티누스와 교회의 유착은 그리스도교 군복무 문제에 중대한 변화를 가져왔다. 이교도 군주의 통치 기간에 대두되었던 상당수의 종교적 장애들이 사회와 군대에서 제거되었다. 이로써 그리스도인 병사들에게 우상숭배로 인한 가책이 없어지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들에게는 유혈의 가책이 중심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유혈에 대한 가책은 여타 군대의 규칙들에도 늘 따라 다니던 것이다. 전역을 치르고 난 다음에 특별한 희생이나 재계(齋戒)의 의식을 갖는 풍습은 셈족과 로마인들에게 다같이 존재했다.17 유혈에 대한 거부는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의 교회 규칙서들에도 나타나고 있다. (109.4)
 그러나 그같은 주장은 교회 내에서 소수적 주장에 머문 것 같으며 유세비우스는 그같은 과격한 주장의 반대편에 서 있었던 것이다. 제국은 지금 평화를 누리고 있으며 평화 시대의 로마 군대는 교량과 도로의 건설과 수선 및 경찰의 업무에 종사하여 유혈의 위험에 놓이는 경우가 감소되었다고 주장할 수가 있었다. 따라서 기원 후 314년 아를회의(Council of Arles)의 교회법 제 3조에서는 “평화 시기에 무기를 버리는 자는 성찬식에 참가할 수 없다”18는 규정까지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110.1)
 그러나 유세비우스도 초기 그리스도교회가 고집해 왔던 유혈의 가책을 완전히 무시할 수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인 윤리의 이중 기준을 세울 수 밖에 없었던 것 같다. 그는 평신도들에게 가능한 일로서 순결한 결혼, 정당한 전쟁, 농업, 상업, 공민적 직업들을, 그리고 성직자들에게 요구되는 행위로서 독신생활, 청빈, 세속과의 분리,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헌신을 말하였다.19 (110.2)
 이상에서와 같이 유세비우스는 변화된 한 시대의 경향을 증언하고 대변하였는가하면 그 시대의 이념을 창출하여 주장하고 있었다. 교회 대중이 다른 태도를 취할 여지는 그대로 있는 것이다. (111.1)
 참고
 1. R. H. Bainton, Christian Attitudes toward War and Peace (Nashivillce, New York., 1860)[앞으로 Christian attitude로 표기한다.], 85.

 2. Eusebius, Praeparatio Evangelica, 106-11A, 179ab. 163b.

 3. Historia Ecclesiastica (앞으로 HE로 표기한다), VIII. iii. 3f; IX. ix. 20; Martyrs of Palestine, ix. 2; xi. 6.

 4. HE, VIII. appendix I.

 5. Ibid., VIII. iv. 2-4.

 6. Martyrs of palestine, xi. 20-22 (de seleuco milite).

 7. Felix Rütten, “Die Victorverehrung in Christlichen Altertum,” Studien zur Geschichte und Kultur des Altertums, xx (1936), 42.

 8. Oratio Constantini, xvi. 3-8.

 9. Praeparatio Evangelica, 106-11a. cf. 179ab.

 10. HE, VI. I. 47-48.

 11. Ibid., V. preface 4. “Κατα δαίμονον καὶ νίκας τὰς κατά τον ἄορατον ἄντιπαλών”

 12. Ibid., V. v. I.

 13. Ibid., VI. xxxix. 4.

 14. Ibid., VII. xv.

 15. Ibid., VIII. iv. 2-4.

 16. Martyrs of Palestine, ii. 3.

 17. W. Warde Fowler, The Religious Experience of the Roman People (London, 1911), 217. cf. Moffatt, “War,” Dictionary of the Apostolic Church II (1918), 671.

 18. “De his qui arma proiciunt in pace placuit abstineri eos a communione”

 19. Demonstratio Euangelica, I. viii. 29b-20b. “δ΄ ὑποβεβηκώς [i.e. the normal life of the Christian laity as distinct from that of the clergy] ἀνθρώπινωτερος, οἷος καὶ ϒάμοις συϒκατιέναι σώφροσι καὶ παιδοποιταις οὶκονομίας τε ἐπιμελείσθαι. τοις κατα τὸ δίκαιον στρατευομενοις τὰ πρακτεα ὑποτίθετθαι, ἀϒρών τε καί ἐμπορίας καὶ τής ἄλλης πολιτικωτέρας ἀϒωϒής μετὰ τού θεοσεβούς φροντίζειν, οἷς καὶ ἀσκήσεων καιροὶ μαθητείας τε καὶ τών θείων λόϒων ἀκροάσεως, ἡμέραι ἀφωρίσθησαν” cf. Cadoux, The Early Church and the world, 469, n. 1; 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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