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3:14에 기초하여 볼 때,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당시 사도들이나 더 넓게는 교회의 범위에서)에게 서로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하는 도덕적 책임을 부여하였음이 분명하다. 세족의 상징적 행위는 동료 신자들을 향한 희생적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한다. 고의적으로 집요하게 이 예식에 참여하지 않는 것은 그리스도로부터의 자의적 단절로 해석될 수 있다(13:8). (684.3)
 E. 역사적 개관
 1. 종교개혁 시대까지
 주의 만찬을 포함하여 교회 규정에 관한 몇 가지 중요한 지침을 주고 있는〈디다케(Didache)〉(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에는 세족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 이후의 종교회의들에서 제정된 세족 금지 규정들(아마도 이 의식과 관련하여 행해진 과도한 일들 때문인 듯 함)은 이 의식이 알려져 있었고 여전히 행해지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밀라노의 암브로시우스(4세기)는 세족이 “겸손에 도움이 된다.”라고 기록하였다(Of the Holy Spirit 1. Prologue). 아우구스티누스(AD 354-430년)는 서로 간의 죄 고백과 용서를 위해서 세족을 행해야 한다고 했다(On the Gospel of John 58). (684.4)
 서로의 발을 씻으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대부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겸손을 증진시키는 상징으로받아들여졌다. 오리게네스(185-254년경)는 요한의 글을 주석하면서 세족을 겸손의 상징으로 일컬었다. 4세기 후반에 그리스도인을 위한 조언들을 모아 놓은 〈사도헌장(Apostolic Constitution)〉은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은 일을 기록한 요한의 글을 언급하면서 집사들에게 그들의 주님이 보이신 겸손의 모본을 상기시키는 데서 그쳤다. (684.5)
 아우구스티누스 시대에는 성(聖) 주간(Holy Week)동안 세족을 기념하는 관례가 있었다(Letter to Januarius 18). 그러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Bernard of Clairvaux)는 세족을 “죄의 용서를 위한 매일의 성찬”으로서 추천하였다(De coena Domini sermon). (684.6)
 로마가톨릭교에서 평신도들은 여러 세기 동안 이 예식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른 그리스도인들은 세족을 행하였다. 예를 들면, 켈트 교회(Celtic church)는 이 관행을 11세기에 사라질 때까지 활발하게 지켰다. 알비장인들(Albigenses)과 발도파 사람들(Waldenses, 왈덴스인들)은 세족예식을 행했으나 주로 방문하는 목사의 발을 씻는 관행으로 국한되었다. 동방 교회(Eastern Church)에서는 세족예식을 “신비”로 여겼으며, 수도원들에서 행했고 황제도 1년에 한 번 씩 행했다. (684.7)
 2. 종교개혁 시대 이후
 1544년〈하우스포스틸레(Hauspostille)〉에 들어 있는 세족 목요일(Maundy Thursday: 부활절 전의 목요일) 설교에서 루터는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행하는 이 예식의 위선을 폭로하면서 그보다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참된 겸손을 보이라고 호소하였다. 세족예식 관행은 루터교회 교인들에게 “혐오스러운 부패”로 간주되어 행하지 않는다. 세족은 세족 목요일에만 엄격하게 국한하지 않았던 모라비아 교도들(Moravians)에 의해 되살아났으나 나중에 1818년 종교회의(Synod of 1818)에서 폐지되었다(New Scrtaff-Herzog4:339-340). (684.8)
 17세기에 재침례파(Anabaptists)는 요한복음 13:14에 나온 그리스도의 명령과 디모데전서 5:10에 나온 바울의 교훈을 여전히 유효하다고 받아들여, 세족을 지지하는 결의를 하였다. 그들은 세족예식을 통하여 죄인이 그리스도의 보혈로 씻음을 경험하고 깊은 겸손을 드러낸다고 믿었다. 그들의 영적 후예인 메노나이트(Mennonites)와 형제단 신자들(Brethren)은 일부 침례교인들과 성결파들(Holiness groups)과 마찬가지로 아직도 세족을 행하고 있다. (685.1)
 3. 재림교회의 이해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는 주의 만찬과 관련 하여 세족예식을 정기적으로 행하는 가장 큰 교단이다. 재림신자들 가운데서 기록상 처음으로 행한 세족예식의 사례는 1844년 7월 버몬트(Vermont)주 그래프턴(Grafton)에서 집회를 끝마치면서 행한 주의 만찬 후에 있었다. 밀러는 세족을 “난잡한 행위”로 간주하였다(Ferris 11, 12). (685.2)
 1845년에〈데이—스타(Day—Star)는 세족을 예식으로 행하는 것에 대한 논쟁을 연재하였다. 세족예식 옹호자들은 예수의 모든 계명을 지키고 형제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세족예식 반대자들은 이 예식을 광신주의와 연계시켰다. (685.3)
 1849년에 제임스 화잇(James Whited)은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들을 위한 찬미들(Hymns for God's Peculiar People)〉이라는 제목의 찬미가 모음집을 출판하였다. 그 가운데 “세족(Washing Feet)”이라는 찬미가 제목이 포함되어 있었다.〈애드벤티스트 리뷰 앤드 헤럴드(Adventist Review and Herald)는 1851년 8월 5일 자에 뉴욕주 휠링(Wheeling)에서 한 달 전에 열렸던 세족예식에 대한 보고를 실었다. 세족예식 때 남자와 여자를 분리하여 행한 것이 이 예식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을 주었다. (685.4)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조직되기 전, 1859년 1월 1일에 엘렌 G. 화잇은 그녀의 일기에 집회들 가운데 한 날을 이렇게 묘사하였다. “저녁에 교회가 그들의 주의 모본을 따랐다.” 그들은 서로의 발을 씻고 주의 만찬을 기념하였다. 다른 곳에서 그녀는 이 예식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685.5)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이행해야 할 의무들이 나타나 있는데 그 의무들을 이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은 겸손하게 되고 세상으로부터 분리되는 동시에 이름뿐인 교회들처럼 타락하지 않을 것이다. 세족예식과 성찬 예식은 더 자주 행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모본을 보이시고 당신이 행하신 것처럼 행하라고 말씀하셨다.”(초기문집, 116). (685.6)
 초기 재림교회에서 세족에 대한 이해는 다양한 노선에 따라 발전되었다. 엘렌 화잇은 이 중요한 예식의 그리스도 중심적인 측면을 강조한 반면, 다른 이들은 상징적 이해에 더 큰 강조점을 두었다(Oestreich 191-199). 1980년 댈러스(Dallas)에서 열렸던 대총회에서 교회가 기본 교리 18번을 채택함으로써 이 예식을 계속할 것을 확정하였다(참조 교회론 VI. B. 2). (685.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