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족예식은 그리스도교 계에서 중요하게 취급되지 않았다. 현시대의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이 의식을 그냥 무시한다. 그러나 올바로 이해된다면, 세족예식은 다락방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한 이상적인 준비이다. (682.1)
 A. 신약의 근거
 발을 씻어주는 것[세족]은 성경에서 주인 편에서 그의 손님들에게 존경을 표하는 친절한 행위로 자주 등장한다. 구약의 여덟 번의 언급 가운데 여섯 번이 이런 관습적 행위를 가리킨다(창 18:4; 19:2; 24:32; 43:24; 삿 19:21; 삼상 25:41). 한 절은 겸손을 의미하고(시 58:10), 나머지 한 절은 단순히 청결을 뜻하는 것같다(애 5:3). 신약에서는 세족이 누가복음 7:44디모데전서 5:10에서 은혜로운 친절의 표로 나타난다. (682.2)
 세족이 의식으로 언급된 유일한 곳은 요한복음 13:1-20이다. 이 본문에서 예수는 그의 제자들의 발을 씻어줌으로 겸손과 참된 섬김의 모본을 세운다. 제자들은 이 행위를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으며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그의 발을 씻는 것을 반대하기까지 하였다. 14절을 보면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그분의 모본을 따라 이 의식을 계속하라고 초청하였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682.3)
 요한복음 13:1-20은 첫 세족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모든 교회를 위하여 이 의식의 의미를 알려준다. 세족예식의 의미를 열어주는 열쇠는 예수와 베드로의 대화 가운데 들어 있다. 7절에서 예수께서 세족예식에 대하여 그분의 제자에게 나중에 알게 될 것이라고 말할 때 상징적 암시가 나타난다. 이 씻음이 없이는 예수와 함께 받을 상속을 잃게 된다(8절).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682.4)
 구조상 이 구절은 13:34에 있는 사랑의 “새 계명”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그분의 삶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분의 죽음에서도 제자들을 위한 예수의 사랑은 따라야 할 표준이 된다(참조 15:12; 요일 2:6; 3:3, 7; 4:17). (682.5)
 이 말은 다른 사람의 발에서 먼지를 씻어낸다는 문자적인 의미를 초월한다. 베드로와 그의 형제들이 “다윗의 족속·"을 위하여 열린 죄와 더러움을 씻는 샘”(슥 13:1)에서 그들의 죄와 더러움을 씻음을 받았으나 그들은 아직도 유혹과 악에 종속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마음속에 있는 이간, 시기 그리고 교만”(시대의 소망, 646)을 씻어줄 더 높은 정결이 필요하였다. (682.6)
 누군가와 “상관”(참조 요 13:8)이 있다는 말은 그와 상속 또는 지위를 같이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4:51에서 충성되지 못한 종은 외식하는 자들이 받을 벌에 “처(part)”하였다. 고린도후서 6:15에서 말한 대로 그리스도인은 믿지 않는 이방인과 “상관(part)”이 없다. 이 구절은 예수께서 그분의 제자들에게 준 약속에 비추어 보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그들이 충성하면, 그분이 받게 될 생명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요 14:19). 또한 그들은 그분이 있는 곳에 있게 될 것이며(요 12:26; 14:3; 17:24), 그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이다(참조 요 17:22, 24). 예수와 아버지의 온전한 사랑이 그들에게 계시될 것이다(요 14:21, 23). 요한복음 13:14에서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라는 좁은 영역을 초월하는 의미를 지닌 모본을 제시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오페일레테).” (682.7)
 동사 오페일로에는 문자적인 뜻도 들어있고 상징적인 뜻도 들어있다. 첫째로 그것은 “빚지다(owe)”를 뜻하고, 둘째로 “∙∙∙해야 한다(ought or must)” 즉 어떤 의무를 지고 있다는 뜻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를 보여 주는 두 번째 동사가 뒤따라 나온다(눅 17:10은 그의 주인에게 해야 하는 종의 의무를 말함). 여기서는 의무가 서로의 발을 씻어 주는 것이다. 이 말은 행해야 할 필요가 있는 어떤 것 즉 도덕적 책임을 나타낸다. 이 동사의 시제는 단 한 번으로 끝나는 의무가 아니라 계속해서 또는 반복해서 행하는 동작을 가리킨다. 예수는 제자들이 그가 그들에게 보여준 모본을 따라 이 의무를 계속해서 이행해야 함을 분명하게 의도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15). (683.1)
 마지막으로, 요한복음 13:17에서 예수께서는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해야 할 행위를 요구한다,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예수는 진리를 알게 되는 것과 행동을 연관지으신다(참조 요 3:21; 7:17; 8:31). (683.2)
 주의 만찬과 세족예식은 12제자들의 작은 범주 안에서 소개되었다. 그러나 예수의 부활 후에 그리스도인 회중들은 주의 만찬을 기념하였다(참조 행 2:42;고전 11장). 주의 만찬은 회중 예배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비록 성경의 기록이 세족예식에 관한 추가적인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요한복음 13장에 비추어 볼 때 이 의식을 계속 준수했다는 것을 믿을 이유가 있는 것이다. (683.3)
 B. 세족의 의의
 흔히 세족은 오늘날의 사회에서는 의미가 없는, 고대근동 지방의 관습 정도로 일축된다. 그것은 그의 추종자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타당성 있는 명령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세족을 소홀히 취급함으로 말미암아 현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신학적 의미를 상실하고 있다. (683.4)
 요한복음 13:10에 있는 예수의 말에 따르면, 세족이 침례를 대신하진 않는다. “이미 목욕한(헬라어 루오) 자는 발밖에 씻을(헬라어 닙토) 필요가 없느니라” 한 번 침례를 받은(목욕한) 자는 죄를 법할 때마다 또는 영적 정결에 대한 소원이 일어날 때마다 또다시 침례를 받을 필요가 없다. 신자가 공적인 배도로 타락하지 않는 한, 온전한 목욕(침례)은 필요치 않고 오직 진실한 회개와 고백을 통한 죄의 제거를 상징하는 세족만 하면 된다. (683.5)
 부분적으로는 이 절에 나오는 카싸로스(“정결한”)라는 단어에 비추어, 침례 후에 범한 죄의 용서를 나타내는 것으로 세족을 이해한다. 이 단어와 어원이 같은 말이 예수의 보혈을 통한 죄의 용서를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는 요한일서 1:7, 9에 나타난다. 10절에 죄가 문자적으로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암시는 분명하다. 침례 후에 지은 죄에 대한 용서의 개념이 8절에 있는 예수의 강조된 말과 잘 들어맞는다. 거기서 베드로는 씻음으로 제거되지 않은 죄, 즉 침례 후에 지은죄 때문에 예수와상관이 없다는말을 듣는다. 또한 예수께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 삶과 죽음을 통해 자신을 내어주신 점도 세족예식에 상징되어 있다. 즉 세족예식은 성육하신 그의 겸손을 기념하는 것이다(시대의 소망, 650). (683.6)
 C. 세족예식이 그리스도인 경험에 끼치는 영향
 주의 만찬을 위한 준비로 세족을 행하는 것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랑, 겸손 그리고 진정한 섬김의 제자도의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해 준다. 이 의식의 목적은 단지 사람의 발에서 먼지를 제거해 주는 것만이 아니다. 이 의식은 이간과 시기와 교만의 원천인 마음의 더 높은 정결의 모형이다. 신자들이 다른 사람의 발을 씻기 위해 몸을 굽힐 때, 모든 종류의 자기 과장과 교만과 이기심이 사랑과 겸손과 교제의 정신에 자리를 내어 준다. 이러한 정신으로 신자는 하나님과의 연합과 서로 간의 연합을 경험하고, 주의 만찬을 기념함으로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된다. (683.7)
 교회의 활동과 예식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싶어 하는 신자의 소원은 영적 성숙과 관계된다. 그러나 얼마 동안 예식들에 정기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을 주님과의 언약 관계에 금이 간 것으로 풀이해서는안 된다. 그럼에도 세족예식을 고의적으로 오랫동안 기피하는 것은 신자의 생애에 영적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는 증상일 수도 있다. (684.1)
 D. 결론
 요한복음 13:10에 비추어 볼 때, 세족예식이 전인을 죄와 더러움으로부터 씻어주는 침례를 대신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명하다. 세족예식의 목적은 침례 후에 범한 죄들을 씻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모든 교만심과 자아 과장 그리고 이기심을 씻어주는 더 높은 정결의 상징이다. 따라서 그것은 주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한 이상적인 준비이다. (68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