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병거 제9장 하나님의 백성이 겪을 마지막 때의 위기
 구약성경의 선지자들은 인간 역사의 클라이맥스를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적대하는 열방들이 꾸민 세계적인 음모의 견지에서 묘사하였다. 적대적인 무리들이 메시야 공동체에게 최후 일격을 가할 준비를 한다. 요엘의 예언적 전망에 따르면 이스라엘의 신실한 남은 자들은 시온산상의 야훼의 성소에서 최후의 피난처를 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요엘은 이 마지막 위기 상황에서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이라는 보증을 선언한다(욜 2:32). (175.1)
 마지막 때 끝에 사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이 구원받을 것과 동일한 이 음조가 다니엘의 묵시문학에도 나온다. “그때에 네 민족을 호위하는 대군 미가엘이 일어날 것이요 또 환난이 있으리니 이는 개국 이래로 그때까지 없던 환난일 것이며 그때에 네 백성 중 무릇책에 기록된 모든 자가 구원을 얻을 것이라”(단 12:1). (175.2)
 야훼께서 에돔과 벌이는 전쟁에 대한 오바댜의 신탁도 “오직 시온산에서 피할 자가 있으리니 그 산이 거룩할 것이요”라는 희망으로 끝맺는다(17절). 대부분의 예언들은 하나님의 백성의 궁극적인 구원을 천상 구원자인 야훼의 우수적 현현의 견지에서 묘사한다. (175.3)
 스바냐는 여호와의 날에 예루살렘의 생존자들이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으로서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이스라엘의 남은 자는 악을 행치 아니하며 거짓을 말하지 아니하며 입에 궤휼한 혀가 없다”고 묘사한다(습 3:12, 13). 그 후 여호와께서는 “너를 괴롭게 하는 자들을 다 벌할 것이다”(19절). 선지자들의 공통적인 묵시문학적 전망에는 하나님께서 신령과 진정으로 자기를 경배하는 이스라엘인들 중에 신실하고 겸손하고 거룩한 남은 자들을 두시리라는 것이 나오고 있다. 하나님께서 야훼의 날에 거룩한 전사로서 오실 때에 그들을 시온산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176.1)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세계적인 전쟁 전망을 채택하여 그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그리스도와 그를 진실로 따르는 자들이란 용어로 바꾸었다(계 12-19장). 이 책은 이제 마지막 때의 드라마를 그리스도와 도처에 있는 그분의 신실한 자들에 대한 “용”의 종교—정치적 전쟁으로 제시한다. “용이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로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섰더라”(계 12:17). (176.2)
 요한은 “용”을 뱀과 같은 꼬리를 가지고 있는 짐승 같은 괴물로 묘사한다. 그것은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데, 각 머리마다 왕관을 쓰고 있다. 또 열 뿔도 가지고 있다(3절). 그리고 나서 요한은 용이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단이라고도” 한다고 그 정체를 밝혔다(9절). 성경의 첫번째 책에 따르면 이것은 낙원에서 인간을 속였던 뱀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된다. (176.3)
 마지막 때의 용과 에덴에서 인류를 속인 자 사이에 관한 이 영감된 관련성에서 볼 때 인류에 대한 사단의 마지막 싸움이 에덴 동산에서의 첫번째 싸움에서와 같이 근본적으로 동일한 종교적 성질을 띠고 있는 것이다. 진실성 그리고 인간에게 드러내신 하나님의 뜻의 지속적인 타당성이 그 이슈가 될 것이다. 태초부터 종말까지 뱀, 용은 사단이다. 그는 항상 하나님의 말씀은 신뢰할 수 없다는 것과 하나님의 도덕법이란 인간의 자유一절대적인 자율을 부인하듯이一를 너무나 제한하기에 변경되어야 한다고 한 것 그리고 죽음이 오직 더 높은 차원의 생명과 지혜의 영역으로의 변환(變換)만을 의미하기 때문에 범법자에 대한 하나님의 사형 처벌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주장해 왔다(창 3:1-4; 단 7:25). 이 큰 미혹은 더욱 증대하여 마지막 때에 가서는 그 클라이맥스에 도달할 것이다. (176.4)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임하려니 이는 저희가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얻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유혹을 저의 가운데 역사하게 하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로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니라(살후 2:10~12).
(177.1)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역사적인 기록의 각 페이지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에 대한 사단의 증오는 항상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에 대한 증오로 바뀌었다. 다니엘과 요한의 묵시문학들은 모두 이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의 진실성 여부를 가리는 전쟁터가 되었다는 것을 드러내 보여준다. 뱀은 끝까지 하나님의 율법이 부당하고, 또 사형으로 처벌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위협은 순전히 거짓말이라고 주장 할 것이다(창 3:1-4). (177.2)
 하나님과 사단 간의 영적인 투쟁 와중에서 인간은 어느 한편인가를 들어야 하기 때문에, 뱀은 하나님의 백성과 전쟁을 벌여 왔다. 그는 지상에서 성도들을 멸하고자 진력한다. 그의 목적은 하나님의 품성을 소유하지도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권능을 가지려는 것이고, 창조주가 아니면서도 모든 피조물의 우주적인 칭송을 받으려는 것이고, 피조물을 사랑하지도 않으면서 세상에서 도전을 받지 않고 통치하려는 것이다. (177.3)
 면류관을 쓴 일곱 머리 모습은 하나님의 이스라엘을 불법화시키고 처형하려고 정치 권력들과 군사력을 사용하려는 사단의 전략을 가리킨다. 마지막 때의 위기는 사단이 초자연적인 이적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항하여 반역하는 일에 연합케 하고자 열방을 속이는 데에 성공할 때에 몰아닥친다. 요한계시록의 전체적인 구조에서 12-14장은 그 중심부가 된다. 이 세 장은 하나님의 여자가 메시야를 낳은 후에 용이 그녀와 벌이는 전쟁에 초점을 맞춘다(계 12:4-6, 14-17). 사단이 그리스도와 그분의 교회와 벌이는 전쟁의 방식은 때로 적그리스도 장이라고 불리우는 요한계시록 13장에 극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용은 바닷가로 가서 바다로부터 일어나는 짐승을 자기의 동맹 세력으로 환영한다. 용과 같이 이 바다에서 나온 짐승도 각기 “참람된 이름들”이 써 있는 일곱 개의 머리와 각기 열 면류관이 있는 열 뿔을 가지고 있다. 용은 바다 짐승에게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었다(1, 2절). 일곱 머리 중 한 머리가 입은 치명적인 상처가 기적적으로 나은 일로 인하여 “온땅”이 용과 바다 짐승을 경배하고 모든 사람들의 눈에 이 세력이 정복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3, 4절). (178.1)
 요한계시록은 아버지 하나님과 그의 아들 메시야의 연합 관계와 용의 짐승의 밀접한 관련성을 의도적으로 대비시키고 있다. 바다 짐승과 용의 머리 수와 뿔 수가 똑같은 점(계 12:3; 13:1)은 두 동물의 본질적인 일치성을 제시해 준다. 용은 심지어 짐승에게 자기의 보좌와 능력과 권세를 주었다. 일곱 머리 중의 한 머리가 입은 치명적인 상처가 기적적으로 나음을 입은 일은 악마적 사명을 주어 보내려는 유일한 목적을 위하여 죽어가는 자기 대리인을 소생케 하는 용의 권세를 상징한다. “또 (바다 짐승이)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계 13:7). (178.2)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아들에게 자기의 구원하시는 뜻과 완전히 일치된 사명을 주어 보내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치명적으로 상처를 입으신 후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죽은 자로부터 일어나셨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에게 자기의 보좌와 능력과 권세에 완전히 참여하게 하셨다(엡 1:20-22). (179.1)
 바다 짐승과 그리스도 간의 평행 관계(parallelism)에서 짐승은 그리스도의 모방 또는 풍자화로서의 적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 기만을 교묘하게 하기 위하여 용은 다른 대리인을 불러내어 자기의 세계 통치 실현이라는 목적을 달성코자 한다. 신격에 아버지, 아들, 성령의 삼위일체가 있듯이 사단도 자기의 모조 삼위일체를 창출해낸다. 그러므로 사단은 용으로서 두 번째 세력 즉 땅으로부터 올라오는 짐승을 이용한다. 이 짐승은 새끼양같이 두 뿔이 있고 용처럼 말한다(계 13:11). 이 짐승의 사명은 바다 짐승을 높이고, 기만적인 기적들을 통하여 전세계로 소생한 바다 짐승을 경배하도록 하는 것이 될 것이다(14절). 요한계시록은 두 번째 짐승을 “거짓 선기자”라고 말한다(계 19:20; 16:13). “거짓 선지자”는 성령의 모조품 역할을 한다.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는 진리의 영으로 임하는 반면에(요 16:13, 14). 거짓 선지자는 자기의 기적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적그리스도의 “우상”을 경배하게 함으로써 전세계를 속인다(계 13:14, 15). (179.2)
 요한계시록은 이 거짓 예배의 강제성을 “짐승의 표”를 정치적으로 강요하는 방법을 통하여 표출시키고 있다(계 19:20; 13:16).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는 교회에게 국가들의 입법회의에서 문제가 되는 이슈들에 주의하라고 일깨우신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있는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행해져야 하는 양도할 수 없는 인간의 권리이자 또한 엄숙한 책임이다. 인간의 양심은 선과 악의 세력 간의 궁극적인 전쟁터이다. 역사의 마지막 위기는 각인이 개인적으로 맞부딪쳐야 하는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딜레마이다. 하나님께서는 각인에게 최후 통첩을 하신다: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계 14:9, 10). 그리스도와 함께 하느냐, 적그리스도와 함께하느냐一이것이 마지막 문제인 것이다!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계 14:12). (179.3)
 모든 사람들에게 배척받는 경험과 죽음을 두려워하여 많은 사람들은 집권 정치 세력 편에 설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모본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는 문제에 영생이 달려 있다고 가르치셨다. 그분은 아버지와의 교제를 자신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기셨다. 그리스도께서 최대로 두려워하신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당하는 것이었다. 그분은 겟세마네에서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라고 부르짖으면서 자신의 뜻을 아버지의 뜻에 복종시키고자 씨름하셨다. 이리하여 그분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 참조. 눅 12:5)고 한 자기의 권고를 몸소 실천하셨다. 그리스도의 모본은 믿는 자들에게 요한계시록 13장의 마지막 싸움에 들어갈 용기를 준다. 데스몬드 포드(Desmond Ford)는 마지막 그리스도인 세대를 위한 요한계시록 13장의 암시를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180.1)
본 장(요한계시록 13장)은 시대의 끝에 있을 오랫동안 예견되어온 위기一여호와의 날과 아마겟돈의 시작을 알릴 위기를 가리킨다. 아마겟돈과 교회와의 관계는 갈보리와 그리스도와의 관계와 같다. 즉 마지막 싸움, 하나님의 면전에서 숨음, 멸절 위협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구원이 있기 때분이다.1)
(180.2)
 요한계시록은 적그리스도의 요구에 반대하여 인간에 관한 하나님의 영원한 소유권 주장을 하고 있다: (181.1)
그가 큰 음성으로 가로되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이는 그의 심판하실 시간이 이르렀음이니 하늘과 땅과 바다와 물들의 근원을 만드신 이를 경배하라 하더라 ∙∙∙
(181.2)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그도 하나님의 진노의 포도주를 마시리니 그 진노의 잔에 섞인 것이 없이 부은 포도주라 거룩한 천사들 앞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난을 받으리니(계 14:7-10).
(18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