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이 날에 나타나신 목적은 도마에게 그가 요구하는 믿음의 증거들을 분명히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의심하는 도마를 직접 불러서 자기의 못 자국에 손가락을 넣어보고 자기의 옆구리에 그 손을 넣어 보라고 초청하였다. 도마는 이 엄청난 증거에 압도되여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나이다”라고 부르짖었다(요 20:28). (120.4)
 예수님께서 부활 후에 제자들 앞에 최종적으로 나타나신 것은 “디베랴 바다”의 해변에서였다(21:1-8). 일곱 제자(베드로, 도마, 나다나엘, 야고보, 요한과 다른 두명〈아마 안드레와 빌립이었을 것이다〉) 들이 고기를 잡으러 바다로 나갔었다. 밤새 아무 것도 잡지 못하고 날이 새려 하는데 해변가에 외딴 남자가 나타나 그들을 향해 걸어 나오며 말했다. “뭘 좀 잡았는가?” 그들이 “아니오”라고 대답하자 그가 “가라사대 그물을 배 오른 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얻으리라” 하였다. 그들이 그 말대로 따라 하자 “큰 고기 일 백 쉰 세 마리”를 잡아 올리게 되었다(21:11). 요한은 즉각 해변가의 사나이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아차렸다. 성질이 급한 베드로는 그물과 물고기와 배와 동료들을 뒤에 남겨두고 혼자물에 뛰어들어 해안가로 헤엄쳤다. (121.1)
 예수님이 이 때에 여기에 나타나신 주요 목적은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비극적으로 선생님을 배신한 베드로를 다시 제자 그룹의 정당한 일원으로 재 신임하시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 놀라운 일이 이루어진 이 날이 주간의 몇째 날인지는 요한복음서에 나타나 있지 않다. 이 사건에서 날짜 자체가 어떠한 중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21.2)
 다른 복음서들의 기자들처럼 요한은 안식과 예배의 날이 안식일로부터 일요일로 변경되었다는 주장을 위해 아무런 도움을 주고 있지 않다. 만약 어떤 사람들의 주장대로 기원 1세기에 안식일이 일요일로 변경되는 큰 변화가 실지로 일어났다면 이러한 현상은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요한복음이 기원 1세기말에 기록되었다면 이러한 변화에 대하여 요한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은 진실로 충격적이라 할 것이다. (121.3)
 드로아에서의 첫째 날 모임
 사도행전은 “주간의 첫째 날”에 공적인 종교 모임이 있었다고 명백히 언급하고 있는 신약 성경의 유일한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행 20:7-12).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드로아에서 여러 날을 지체하였다. 드로아는 고대의 도시 트로아 지역 근처에 위치했다. 바울이 드디어 드로아를 떠나려하여 그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떡을 떼려하여” 함께 모였다. 누가는 이 모임이 “주간의 첫째날”에 이루어졌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는 오늘날의 일요일의 시간대에 대충 들어맞는다. 그런데 사도행전 20:7절의 이 구절이 그리스도인들이 일요일을 예배일로 지키기 위해 모였다는 증거의 성경절로 반복적으로 인용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구절을 면밀히 분석하여 그 증거의 본질을 밝혀야 할 필요성이 큰 것이다. (121.4)
 이 모임에 대해서 제기해야 할 문제는 여럿이다. 이 주말 모임은 정규적인 모임이었는가? 그리고 특별히 이 모임은 정확히 오늘날 우리가 일요일이라고 생각하는 시간에 이루어졌는가? 이 모임에서 등불이 사용되고 있고 모임이 자정을 넘어 새벽까지 연장되고 있고 또 유드고가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는 이야기들을 종합해 볼 때, 이 모임은 낮이 아니라 밤의 모임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일요일의 어느 쪽 밤이었는가? 일요일의 앞의 밤인가 일요일의 뒤의 밤인가? 문제는 이것만이 아니다. “떡을 떼려” 했다는데 그것은 무슨 의미인가? 친교의 식사였는가? 아니면 성만찬이었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이 둘을 합친 성격의 식사였는가? 불행하게도 위의 질문들 중 어떤 것들은 확실하게 대답할 수 없는 것들이다. (121.5)
 우선 이 모임이 정규적인 주말 모임이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문맥으로 볼 때는 이 모임이 다음날 아침에 길을 떠나는 바울을 위해 마련한 송별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이 “주간의 첫째 날에”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드로아의 그리스도인이 첫째 날에 관습적으로 모였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 문맥상 이 모임은 밤의 모임이었음이 분명하다. 모든 주석가들도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첫째 날의 어느 쪽 밤인가? 누가는 여기서 일몰로부터 일몰까지의 24시간을 하루로 계산하는 유대식 계산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정부터 자정까지의 24시간을 하루로 계산하는 로마 방식을 사용하고 있는가? 이 문제에 대하여 의견이 나누어지고 있다. (122.1)
 만약 누가가 유대식의 계산방법을 사용하고 있다면 이 모임은 오늘날 우리들이 흔히 토요일 밤이라고 부르는 시간에 시작하여 일요일 이른 아침까지 연장되었었다. 이러한 해석이 근래에 이루어진 여러 번역성경에 반영되었다. 그리고 이 주장대로 만약 이 모임이 토요일 밤에 이루어졌었다면 일요일 준수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모임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의 모임이 토요일 밤이 아니라 일요일 밤에 개최되었다고 주장하는 주석가들도 없지 않았다. 누가는 유대식 계산법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정부터 자정까지를 하루로 계산하는 로마의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일요일 밤에 모임이 이루어졌다면 일요일 밤 자정이 넘어서 이루어진 “떡을 떼는 일”은 로마식 날자 개념으로 볼 때 마땅히 월요일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식사가 성만찬 식사였다고 할지라도 일요일 준수의 증거로서는 별 의미가 없게 된다. (122.2)
 누가에 따르면 그날 밤에 그리스도인이 모인 것은 “떡을 떼기 위함”이었다.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떡을 칼로 자르는 것보다 손으로 떼는 것이 관습이었다. 주인은 식탁에서 축사한 다음에 떡을 떼어 손님들에게 나누어주었다.2 따라서 식사하기 전에 떡을 떼는 행위가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에서 공동식사를 호칭하는 이름으로 사용되었다.3 이러한 관행은 이방 세계에서도 통용되었다. 떡을 떼는 행위는 예수님이 그를 따르는 무리들에게 떡을 떼어 주셨던 때에 대한 회상이었다(마 14:19; 15:36; 막 8:16, 19). 그러므로 식탁의 친교는 초대 교회 사회에 일반화되고 있던 단합과 친교의 정신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예수님에 대한 기억과 “코이노니아”(친교)의 정신은 보통의 식사에까지 종교적인 특성을 부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떡을 떼는 것”이 성만찬(고전 11:20) 즉 자신의 상징으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을 주신”(마 26:26) 예수님을 기억하기 위한 식사를 뜻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이 드로아에서 떡을 뗀 것도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는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바울이 드로아를 방문했으므로 특별히 그런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도 상충되는 설명이 본문 안에 있다. 첫째는 떡을 떼는 일이 자정이 넘은 시각에 일어났는데 만약 그날 저녁에 사람을 모은 목적이 주님의 만찬을 기념하기 위한 것이라면 사람들이 자정이 넘도록 기다렸다는 것이 이상스럽게 보인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 20:11은 바울이 “떡을 떼어먹었다”고 말할 뿐 전체 회중이 먹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성 만찬의 잔이나 기도에 관한 언급들도 없다. (122.3)
 이와 같이 일요일의 준수를 뒷받침하기 위하여 자주 인용되는 이 성경구절(행 20:7-12)자체도 신약성경 시대에 일요일을 지켰다고 주장할 수 있는 아무런 증거가 되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그 날이 일요일 밤이었다는 확실성도 없다. 그 시간은 토요일과 일요일에 걸쳐 있었는가 아니면 일요일과 월요일에 걸쳐 있었는가? 어느 경우이든 상관없이 그 모임은 이례적인 모임이었다. 위대한 선교사 바울과 그의 일행을 위한 송별 모임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주님의 만찬이 기념되었다는 확실성도 없다. “떡을 뗀다”는 표현은 송별 식사의 시작을 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식사가 단순한 송별의 식사가 아니라 성만찬의 식사였다 할지라도 이 성만찬 식사가 정규적인 주간행사로 볼 수 있는 증거를 찾아볼 수 없다. 진실로 사도행전에는 사도들이 참석하는 안식일의 종교적인 모임들에 대한 숱한 실례들이 소개되고 있다. 그러나 주간의 첫째 날인 일요일에 예배를 위한 정규모임이 이루어졌다는 증거는 사도행전에서 찾아볼 수가 없다. (123.1)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에서 바울 자신은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과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는다”(행 25:8)고 여러 차례 강조하였다. 그는 체포된 후에 담대하게 주장하기를 “유대인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나 내가 도무지 죄를 범치 아니하였노라”고 하였다(행 25:8). 그는 아그립바 왕의 면전에서도 선언하기를 “내가 오늘날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다”고 하였다(행 26:22). 끝으로 바울이 로마에 있을 때 그 도시의 “유대인들 중에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후에 이르되” 그가 유대인들이나 그들의 조상의 관습에 대해 전혀 배척한 일이 없다고 확인하였다(행 28:17). 그가 만약 이방인들에게 안식일을 버리고 다른 날을 예배일로 지키라고 가르쳤다면 그가 조상들의 관습을 배척하지 않았다고 어떻게 그처럼 자신있게 확신에 찬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123.2)
 주간의 첫째 날에 연금을 모은 일에 대하여
 연대기적으로 말할 때 신약성경의 문서 중에서 주간의 첫째 날에 대하여 최초로 언급하고 있는 곳은 고린도전서 16:1, 2일 것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연보에 대하여” 권면을 주고 있다. 이 구절의 “성도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된 후 이보다 앞서 안디옥 교회로부터 구제 금품들을 받아 실라와 함께 흉년으로 고생하는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일이 있다(행 11:29, 30). 그런데 이제 대 사도가 된 바울은 굶주림으로 시달리고 있는 이 지역의 형제들을 위해 마게도니아와 아가야에 있는 교회들로부터 사랑의 자선금을 모으려고 계획하고 있었다(롬 15:26). 이 일은 그가 평소에도 늘 마음에서 책임으로 느끼고 있던 일이었으며 또한 그의 제3차 선교 여행 목적의 하나였기도 했다(롬 15:26, 27; 고후 8:9; 행 24:17). 그는 이 연금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방인 그리스도인과 유대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하나라는 사실의 표징과 다짐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회에게 앞서 갈라디아 교회에게 지시한 것과 유사한 지시를 내려보냈다. “매주일 첫째 날에 너희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123.3)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모든 교인들에게 이 연금에 동참하라고 촉구하였다. 매주마다 각 사람들이 자신의 일주일의 수입 중에서 일부를 “매 주일의 첫날에” 그 주간의 연금을 따로 저축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바울이 하필이면 주간의 첫째 날을 이러한 연금을 저축하는 날로 선택했을까? 많은 사람들은 첫째 날이 이미 종교적으로 중요한 날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이 구절을 세심히 살펴 읽어본다면 우리는 그러한 결론이 진실로 본문에 기초한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일반화된 관행을 단순히 신약성경에 억지로 맞추어 읽는 것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구절의 본문에서는 사도 바울이 주간의 첫째 날에 어떠한 신성한 특성도 부여하고 있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 성경절은 그 날에 교회에 출석해야 한다거나 또는 주간의 연보를 교회로 가지고 와서 바치라든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이 구절은 단지 주간의 첫째 날이 돈 액수를 계산하고 한 주일의 수입에서 일정한 기부금을 따로 떼어놓기에 적합한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첫째 날을 언급한 것은 교회 예배일로 언급한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개인적으로 이행할 실천 사항과 관련하여 언급한 것이다. 첫째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는 대로 때에 저축해 두라”는 것이 바울의 지시였다(고전 16:2). (124.1)
 「미국 표준 성경」(The American Satandard Version)은 이 구절을 “너희 각 사람이 이익을 남기는 대로 따로 떼어 저축토록 하라”(Let each one of you lay by him in store, as he may prosper)고 번역했다. “lay by him”(par heautõ tithetõ 파르 헤아우토 티테토)는 “집에 따로 떼어 놓다”는 뜻이다.4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신뢰했다. 그래서 그는 고린도 교인들에게 일주일 단위로 그들의 모금을 내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들에게 모금을 집에 보관하고 계속 모금을 키우도록 장려한 것이다. 바울은 일요일에 교회로 충실히 출석하기를 권고했던 것이 아니라 규칙적으로 구호금을 저축하도록 권고했던 것이다. 만약 고린도 교인들이 첫째 날에 정규적으로 공공 예배를 드렸다면 왜 바울이 구호금을 교회로 가져오라 하지 않고 집에 개인적으로 떼어 저축하라고 권면 했을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124.2)
 주간의 첫날에 구호금을 저축해 두어야 하는 이유는 제시되어 있지 않다. 혹시 로마 제정기에 첫째 날은 주급이 지불되는 날이었는지 모른다.5 만약 그렇다면 그 날을 모금의 날로 선택한 것은 일요일의 어떤 신성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다. 물론 일요일에 주급을 계산하면서 지난 일주일 간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사랑의 섭리를 회고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일도 깊이 있는 종교적 경험이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날이 거룩한 날이라는 뜻일 수는 없다. (124.3)
 뿐만 아니라 헌금을 우선적으로 고려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주간의 첫날을 특별히 지목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일상의 필요 때문에 재정이 모두 소비되기 이전에 먼저 특별한 헌금을 위해 돈을 떼어놓도록 하라는 지시일 수도 있는 것이다. (125.1)
 문제의 이 성경절은 조직적이고 규칙적인 모금을 위한 좋은 제안을 내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예배일의 변경을 위한 증거를 이 구절에서 추출하려는 것은 성경을 너무 억지로 해석하려는 것이 아닐 수 없다. (125.2)
 〈요한 계시록 1:10절의 “주의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