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에 있어서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의 사상사(思想史)는 밸린저가 돌출시킨 문제에 대한 논쟁으로 가득 차 있다. 일찍이 1846년에, O. R. L. 크로지어(O. R. L. Crosier)는 문제의 심각성을 깨달았고, 1877년에 유라이아 스미쓰(Uriah Smith)는 그에 대하여 깊이 고찰하였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를 그만두다(Seventh-day Adventism Renounced)라는 책에서 D. M. 캔라이트(D. M. Canright)는 예수님이 1844년이 아니라 그의 승천시에 지성소로 들어가셨다고 주장하였다. 역시 교회를 떠난 호주의 한 교회 지도자였던 W. W. 플레처(W. W. Fletcher)는 그가 이탈한 주요 원인들의 하나가 바로 이 문제라고 했다. 근년에 데스먼드 포드(Desmond Ford)가 이와 비슷한 해석을 주장하고 나섰다. (135.1)
 이와 같이 히브리서는 재림교회의 해석자들 사이에서 자주 태풍의 눈으로 떠올랐다. 여기서 우리는 신약의 다른 어떤 기록보다도 더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에 대한 자세한 토론을 보게 된다. 1844년에 예수께서 그의 봉사의 최종적(둘째 칸) 국면으로 들어가신 것과 함께 하늘 성소를 믿기 때문에, 우리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에게는 위험 부담이 실로 크다. 그런데 만약 히브리서가 갈바리를 신약의 대속죄일로 제시한다면, 1844년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면 우리가 우리의 가장 독특한 교리를 지지해 주도록 호소하였던 히브리서가 우리의 신학적 워털루(Waterloo)가 되는 것이다. (135.2)
 히브리서의 신학적 정상(頂上)이요 희생 제도의 논증의 핵심이기도 한 히브리서 8:1-10:18을 취급할 때, 우리는 중심 구절들을 충분히 다룰 것이다—그것만이 해답을 제공할 수 있다. 우리는 쉬운 출구를 찾으려 하지 않고 정면으로 난관들을 직면하면서 그 말씀에 정직하려고 애쓸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님께서, 만일 우리가 진지하게 그 것을 찾으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를 그분의 빛으로 인도하실 것을 믿고, 진실로 확신하기 때문이다. (135.3)
 더 큰 문제는 후에 토론하기로 하고(제7장—“더 좋은 피”), “휘장 안”에 관한 밸린저의 논리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자. 문제를 자세히 다루기를 원하는 독자들은 각 장의 끝에 열거되어 있는 부가적인 자료들을 참고할 수 있다. (135.4)
 밸린저는 휘장에 대한 다양한 단어들을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고찰하였고, 또한 휘장과 연관된 표현들도 그렇게 하였다. 그는 그의 결론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였다: (136.1)
만약 히브리서 6:19의 성경절이 그리스도께서 “첫 휘장”으로 들어가신 것을 말한 것이라면, 문제는 해결될 것이다. 그러나 그[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단순히 “휘장 안으로” 들어가신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가 지칭하는 장소가 어디인지를 독자들이 이해하고 있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그가 이 어휘를 설명 없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문제가 야기된다: 즉 독자들은 “휘장 안”이라는 말을 어느 장소—첫째 휘장 안인가, 둘째 휘장 안인가?—에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했을 것인가? 만일 “휘장 안”이라는 말이 첫째 칸에 적용된다면, 우리는 그것이 구약 성경에서 보편적으로 그렇게 적용되어 왔으며, 독자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것을 첫째 칸에 적용하였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주의 깊이 연구하게 되었을 때, 나는 “휘장 안”이라는 말이 구약에서 회막 문 안의 장소나 첫째 칸에 적용되지 않고,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휘장 안, 곧 지성소에 언제나 적용된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히브리 성경은 절대로 회막 문에 있는 막(curtain)을 “한 휘장(a veil)”으로 부르지 않으며, “그 휘장(the veil)”이라고 부르는 일은 더더욱 없다. 또 한편으로, “휘장”이라는 용어는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는 막에 적용된다. 그리고 “휘장 안”이라는 말은 지성소에만 적용된다 (Ballenger, 20—21).
(136.2)
 히브리 성경과 그것의 헬라어 역본(譯本)인 「70인역」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그것은 밸린저가 주장하는 것만큼 그 증거가 명료하지 않음이 드러난다. 일반적으로 언어적 데이터가 그의 주장을 지지하는 면이 있기는 하지만, 그는 그 사례를 과도(過度)하게 진술하였다. 예를 들면, 적어도 히브리 성경의 두 곳(레 21:23; 민 18:7)에서, 휘장의 의미가 의문시된다. 마찬가지로 휘장에 대한 헬라어 카타페타스마(katapetasma)도 「70인역」의 비수식(非修飾) 용례(출 26:37)에서, 적어도 한 차례는 첫째 휘장(curtain)을 지칭한다—여기서 밸린저가 주장하는 것이 결코 발견되지 않는다. 휘장 안이라는 실제적 어구(語句)는 「70인역」에서 오직 네 번 나오며, 둘째 휘장을 지칭한다. (136.3)
 휘장 안에 대한 밸린저의 연구는 약간의 가치 있는 통찰력을 담고 있으나 궁극적으로는 흠이 있다. 그는 히브리서 6:19-20을 이해하기 위한 시도로서 구약을 부지런히 탐색했으나 히브리서 자체의 논증을 따라가지 못했다. 학도들에게 촉구하는 해석의 첫째 원칙은 그가 연구하고 있는 자료의 문맥을 고려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6:19-20은 예수님의 대제사장 봉사와 희생에 대한 전체적 토론에 비춰 볼 때에만 그 의미가 밝혀진다. (137.1)
 우리가 8:1-10:18을 두루 연구하게 될 때, 우리는 희생 제물들과 성소들과 대속죄일을 다루는 전체 논증이 모두 합쳐져서 기독교의 장엄한 핵심—우리의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을 단번에 드려진 완벽한 희생 제물과 함께 묘사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종결(finality)과 접근(access)이라는 두 개의 위대한 사상들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희생 제물의 종결(終結)은 자신을 드리신 그리스도의 희생 제물이 완전하고 반복될 수 없기 때문이고, 접근(接近)은 그의 죽으심으로 그가 하나님과 우리를 분리하는 모든 장벽들을 허물었으며, 그리고 그를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늘의 문을 활짝 여셨기 때문이다. (137.2)
 이것이야말로 밸린저가 히브리서에서 보지 못한 큰 그림이다. 그는 세부적인 것, 휘장 안과 구약의 표상들(types)에 근거한 관심사에 너무 몰두해 있었기 때문에 히브리서 자체의 기별을 놓쳐 버렸다. (137.3)
 ■ 말씀을 적용함
 1. 예수께서 하늘의 대제사장이시라는 말은 무슨 의미인가? 본 장의 연구를 통하여 그 사상이 나에게 얼마나 매력적인 것이 되었는가? (138.2)
 2. 나는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가, 또는 두려움으로 나아가는가? 담대히 나아간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나는 하늘 궁정(宮廷)에 속한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런가? (138.3)
 3. 나의 영적 성장은 어떠한가? 나는 자라났는가, 또는 아직도 아이인가? 나의 답변에 대하여 어떤 이유들을 댈 수 있는가? 나는 히브리서의 “단단한 음식”이 맛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나를 실망시킨다”고 생각하는가? 왜 그런가? (138.4)
 4. 주께서 제공하여 주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권들—성령, 하나님의 말씀, 능력—은 나의 영적 생애를 어떻게 돕는가? (138.5)
 5. 하나의 충격적인 질문: 내가 주님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떨어져서 주님을 공공연히 부인할 지경에 이를 정도까지 나를 바꾸는 잠재 요인들은 어떤 것인가? 그런 것으로부터 나를 보호하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138.6)
 6. 한때 주님과 동행했으나 지금은 영적 사물에 거의 무관심한 듯한 사람을 알고 있는가? 무슨 일이 있었는가? (138.7)
 7. 나에게 있어서 무엇이 하나님의 약속을 절대적인 것으로 확신하게 하는가? (138.8)
 8. 나의 생애의 닻은 무엇인가? 또는 누가 나의 생애의 닻인가? 어떤 의미에서 내가 닻을 붙들고, 어떤 의미에서 닻이 나를 붙드는가? (13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