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제시하고 있는 것은 실제적인 상황이 아니라 가능성이다. 우리가 앞에서 본 적용들(2:1-4; 3:1-4:13)에 비추어 그의 강한 어조를 고려해 볼 때, 6:4-6의 시나리오는 그가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보는 영적 경향들에 대한 논리적 결과이다. 그들은 이미 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목표에서 떠내려가서 강퍅케 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들은 이미 주께서 그들에게 의도하시는 분량까지 자라나지 못했다. 그러므로 거룩한 기회들에 대한 현재의 무관심 때문에, 그들은—있을 법하지도 않은 일이라고 할지 모르지만—어느 날 주님을 공개적으로, 공공연히 거절할 시점에 이를 수 있다. (131.1)
 히브리서가 그려내는 그림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계속적으로 직면하는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이탈하는 실수들—우리의 본성의 연약함과 악한 자의 난타(亂打)에서 오는 실수들과 허물들—중 하나가 아니다. 오히려 사도는 고의적인 거절의 장면을 제시하고 있다. 한때 남녀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지만, 이제 그들은 그를 공개적으로 부정한다. (131.2)
 서방에서는 이런 장면이 그렇게 자주 연출되는 것을 보지 못한다. 떨어져 나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교회 출석을 중단하고, 그리스도의 추종자들로 살려는 노력을 그친다.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원치 않는다고 선언하는 일은 거의 없다. (131.3)
 하지만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그 가능성이 실제적이었고 드물지 않게 목격되었다. 4세기경까지 그리스도인들은 로마 제국 내에서 아무런 법적 지위가 없었다. 그들은 예배 장소를 짓도록 허용받지 못했고(그 때문에 가정 교회를 가졌다), 단순히 예수님을 믿는다는 표방 때문에 체포되고 심문받고 처형될 수 있었다. 간헐적인 박해의 물결이 이 세기들 동안에 그들을 휩쓸었으며, 시험의 때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가이사를 신으로 여겨 그에게 분향하거나, “가이사는 주님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공개적으로 그리스도를 부인하였다. (131.4)
 나는 인도(印度)에서 이것과 거의 비슷한 상황을 목격하였다. 인도의 8억 인구 중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극소수이다—약 2퍼센트에 불과하다. 문화는 주된 종교인 힌두교의 축제들과 다소의 이슬람의 축제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크리스머스와 부활절이 캐럴이나 트리도 없이, 형형색색의 전등이나 메시야, 스크루지, 또는 호두까기 인형 조곡(Nutcracker Suite)도 없이 왔다가 간다. 더 나아가, 힌두교의 호전파(好戰派)는 그리스도교의 확장을 방해하며, 그리스도인들을 힌두교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하여 일한다. 신문 기사들은 이전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그분에게서 등을 돌리고 힌두교인들이 조직한 공공 모임에 가는 것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다. (131.5)
 이런 종류의 시나리오가 히브리서의 신랄한 경고의 배후에 놓여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도 용서하실 수 없는 죄를 지적하는 예수님의 교훈과는 다른 흐름을 이루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막 3:23-27)은 그분이 베푸신 이적들과 귀신을 쫓아내신 일을 사단의 권세로 돌리는 종교 지도자들을 배경으로 하여 나온 말씀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구주의 봉사에 기름부은 성령을 거절하였으며, 그것에 의하여 죄의 깨달음과 회개와 구원의 근원이신 분으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킨 것이다. (132.1)
 히브리서를 연구하는 학도들은 종종 이 책의 급격한 대조(對照)에 놀란다. 여기서 우리는 가장 강한 어조(語調)의 그리스도인의 확신과 가장 강한 어조의 그리스도인들에게 하는 경고가 함께 나오는 것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두 가지는 병행한다. 우리가 예수님이 얼마나 뛰어나신 분이며, 우리를 위한 그분의 구속의 죽음과 봉사가 얼마나 귀중한 것인지를 알게 될 때, 그 때—오직 그 때에만—우리는 그의 은혜를 경히 여기고 그것에 침을 뱉는 일이 얼마나 가증스러운 일인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132.2)
 천연계에서 따온 6:7-8의 예증은 이러한 점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땅은 그에 상응하는 열매를 맺어야 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무용지물이다. 그러므로 신령한 특권들을 부주의하게 다루지 말라. (132.3)
 격려하는 말
 히브리서 6:9에서 사도의 기분이 갑자기 변한다. 그는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의 선한 행위를 칭찬하고(9-12절), 하나님의 약속의 확실성으로써 그의 적용을 끝맺고 있다(13-20절). (133.1)
 히브리서 6:11-12는 설교의 목적을 정리해 준다: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부지런함, 인내, 소망, 믿음, 약속—이러한 말들은 이 책의 배후에 있는 실제적 관심사들을 요약하고 있다. (133.2)
 마지막 문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표명하고 있다. 여기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본질과 그것에 대한 적절한 인간의 반응을 예시(例示)하는 본보기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땅을 약속하셨을 때(창 22:16, 18), 그는 당신의 말씀을 이중으로 보증하셨다: 그가 약속하셨고, 그리고 그 약속을 맹세로써 확증하셨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그의 몫을 다했다: “저가 오래 참아”(히 6:15) 그 약속을 받았다. (133.3)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약속의 자녀들이다. 이 세상에서 복음은 우리에게 소망으로 다가온다. 후일에 가서야 우리는 그것의 완전한 면모를 깨닫게 될 것이다(11:1-40을 보라). 그러나 하나님은, 마치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 이중의 보증을 주신다—그는 약속하시고, 그리고 그의 맹세를 더하신다. 이 경우에 그 맹세는 시편 110:4의 맹세임에 틀림이 없다—“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133.4)
 또 다시 저자는 그가 잠시 후에 주석하게 될 사상을 소개하였다. 7:19-22에서 그는 이 맹세를 특별히 언급하게 될 것이며, 또다시 그는 그것을 소망과 결부시킬 것이다. (133.5)
 6장은 분명한 확증으로써 끝을 맺는다. 그리스도인들의 소망은 맹목적인 낙관주의(樂觀主義)도 아니며, 낙천적인 정신(buoyancy of spirit)도 아니며, 어둠 속에서의 속삭임에 불과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소망은 사실들실제에 근거하고 있다. 예수께서 우리의 소망의 닻을 내리신다. 그분의 위격(位格)과 그분의 사업(事業)이 우리의 구원을 절대적으로 확실하게 한다. (133.6)
 오래된 천년기의 끝을 향하여 행진하고 있는 이 냉소적이고 비관적인 몇 년 동안, “우리는 이 소망을 지니고 있다(We have this hope)!” 그것은 지속적이고 확실하고 일관적이고 확고한 소망이다—왜냐하면 예수께서 우리의 닻이시기 때문이다. 오! 그의 구원은 얼마나 위대한가! 그가 우리의 앞에 가장 좋은 것이 아직 오고 있다는 약속과 함께 지금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은 얼마나 귀한 것인가! (134.1)
 바울은 우리의 소망이 바로 하나님의 면전에까지 이른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으로 봉사하시는 하늘 성소 자체에 근거를 두고 있다. 우리는 이 말씀들을 붙들고, 그것들은 생애의 폭풍들 속에서도 우리를 단단히 붙든다. (134.2)
 휘장 안으로
 「새국제역」에서 “휘장 뒤의 내부 성소(the inner sanctuary behind the curtain)”(6:19)로 번역된 바울의 표현은 특히 재림신자에게 새롭고도 특이한 문제들을 야기시킨다. 우리는 재림신자들과 그 반대자들이 왜 그토록 많은 에너지를 이 구절에 쏟아 부었는지를 알려고 노력하면서, 바울의 말들을 주의 깊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결과를 편벽되게 하는 일을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보다 문자적이고 따라서 중립적인 번역인 「제임스왕역」으로 돌아가 보면, 이 말은 “휘장 안으로(within the veil)”라고 되어 있다. (134.3)
 약 80년 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위하여 쫓겨나다(Cast Out for the Cross of Christ)라는, 주의를 끄는 제목의 책이 사적(私的)으로 출판되었다. 그 책의 저자인 앨비언 포스 밸린저(Albion Foss Ballenger)는 약간의 영향력을 지닌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의 목사였다. 그 때 그는 목회직에서 떠나 재림교회의 울타리 밖에 있었다. 밸린저는 히브리서로부터 광범위하게 논쟁을 펼치면서, 이 책은 십자가를 실체적인(antitypical) 대속죄일로 보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밸린저의 이론의 열쇠는 휘장 안으로라는 구절이었다. (13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