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이 구절이 왜 그토록 많은 토론과 논쟁을 일으켜 왔는가?

  b. “휘장(커튼)”은 무엇인가?

  c. 사도가 강조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125.10)
 ■ 말씀을 탐구함
 어떤 점에서 아론과 같지만, 그러나 무한히 더 위대하신 하늘의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한 토론은 갑자기 중단된다. 5:11로부터 6장에 걸쳐서 저자는 그의 청중들에게 배우는 데 느리다고 꾸짖고, 떨어져 나가는 것에 대하여 그들을 경고한다. 그 장의 끝에 가서야 그는 예수님의 제사장 봉사의 주제로 되돌아간다. (126.1)
 이 긴 적용—이 책에서는 세 번째—은 두 부분으로 나눠진다. 5:11- 6:8에서 바울은 견책과 강한 경고를 발한다. 그러나 6:9-20에서 그는 격려하는 말로 돌아간다. (126.2)
 많은 사람들을 당혹케 하고 괴롭히는 구절
 바울은 그의 독자들에게 “설명하기 어려운” 자료를 가지고 있다-그것은 아마도 멜기세덱의 제사장직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곳은 그가 신학적 토론을 갑자기 중단한 곳이며(5:10), 마침내 그가 다시 그 주제를 다루는 곳이기 때문이다(6:20). 그러나 그들은 준비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이해력이 성숙하지 못했으며, 그들이 마땅히 선생이 되어야 할 때 여전히 어린아이다. (126.3)
 그 당시 히브리인들은 이미 한 동안 그리스도인으로 지내 왔다. 그들은 새로운 회심자들일 수 없으며, 어떤 주석가들이 제시한 대로, 그들은 아직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아니한 유대인들일 수는 더더구나 없다. (127.1)
 이와 같이 우리는 앞에서 본 적용들의 배후에 있는 하나의 발전 과정을 보게 된다. 2:1-43:7-4:13이 믿음에서 흘러 떠내려가고, 죄의 기만으로 마음이 강퍅케 되는 히브리인들의 위험들을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이곳에서 우리는 사도의 관심이 그들에게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하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127.2)
 “듣는 것이 둔하므로(slow to learn, 배우는 데 느리므로)”—그는 그들을 이렇게 기술하였다(5:11). 이것의 헬라어는 노쓰로스(nōthros)로서, 그 의미는 “무딘,” “둔한,” “태만한,” “부주의한,” 또는 “느슨한”이다. 우리는 그들의 문제를 “지친 정열(tired blood, 피곤한 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처방은 놀랍게도 현대적이다! 수년간 주님을 따라 온 현대의 매우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영적 생활에서 김이 새 버렸음을 발견한다. 둔하고 무관심한 그들은 거룩한 열정을 수혈할 필요가 있다. (127.3)
 이러한 영적 상태를 다루는 바울의 방법은 매혹적이고 교훈적이다. 히브리인들이 받아들일 준비가 안 되었고, 단단한 식물 대신에 젖이 필요하였기 때문에, 그가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에 대한 신학적 토론을 중단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버리고 . . . 완전한 데 나아”가자(6:1)고 말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그들이 “젖”을 먹을 준비만 되어 있는데도 어찌 그가 “단단한 식물”을 그들에게 줄 것인가? 이것이 영적 소화 불량을 일으키지는 않을까? (127.4)
 나는 그가 의미하는 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히브리인들이 그가 발전되기를 원했던 것만큼 영적으로 발전되지 못하여 그가 주어야 할 것에 대하여 성숙하지 못함이 분명하지만, “단단한 식물”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는 그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준다. 7장의 토론은 신약 전체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것들 중의 하나이다! 나는 바울이 그의 청중을 나누어, 그들 중의 성숙한 자들로 하여금 그가 막 제시하려는 것으로부터 배우게 하려 했다고 (일부 주석가들이 시사하듯이) 생각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그들의 영적 열정이 그가 그들을 위해 제시하는 예수님을 생각함으로써 원기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는다. (127.5)
 때때로 그리스도인들은, 심지어는 일부 설교자들까지도 신학은 비실제적인 것으로 깎아 내린다. 우리 모두가 여기에 보이는 바울의 접근 방식을 심사숙고해 보면 좋을 것이다. 분명히 그는 지적인 자극, 즉 양떼에게 그들의 마음을 팽창시켜 줄 신학적 사상들을 먹여 주는 일이 가능함을 믿고 있다. 물론 이러한 사상들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의 관심은 그들의 영적 에너지를 일깨우는 것으로서, 이것은 매우 실제적인 목표이다. 그러나 우리는 요점을 추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즉, 어떤 영적 필요를 위하여 도움이 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신학적으로 다루는 길뿐이다! 엘렌 화잇(Ellen White)도 유사한 계통의 진술을 하고 있다. 가끔 어떤 목소리들은 지각(知覺) 없는 유형(mindless type)의 그리스도교를 옹호하지만, 화잇은 “지적인 그리스도인들”(부모와 교사와 학생에게 보내는 권면, 361)을 긍정적으로 언급하면서 우리의 지성을 넓히는 일을 옹호하고 있다. (128.1)
 사도는 신랄한 경고와 함께 5:11-14의 견책을 따르고 있다. 이 구절(6:4-6)은 분명히 비타협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점에 있어서 요한계시록 14:9-12의 세 천사의 기별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다. 6:4-6이 침례 후에 범한 죄에 대한 회개를 부정하는 것 같기 때문에, 임종 때까지 침례를 미루는 관습이 생겨났다! 2세기경의 저술인 헤르마스의 목자(The Shepherd of Hermas)는 이 절에 대한 분명한 반응으로서, 그 사상을 수정하여 침례 후에 한 번—그러나 오직 한 번—의 실수를 허용하였다! 같은 세기의 법률가이면서 저술가였던 교부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도 그 절에 대한 비난을 성적 범죄에 적용함으로써 본문의 의미를 제한하려 하였다. (128.2)
 진지한 그리스도인들은 6:4-5와 씨름할 것이다. 학자들과 주석가들은 그것을 이해함에 있어서 여전히 어려움을 느꼈다. 어떤 이들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어렵다(difficult)”라는 의미로 생각하거나(사실은 그렇지 않다), 마지막 절을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고 있는 동안”으로 번역하려고 한다(그러한 번역은 매우 분명한 진술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129.1)
 우리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함으로써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도는 6:2-6의 사상들을 다른 두 곳에서 반복한다: 10:26-3112:15-17. 각 절의 형태가 다양한 반면에, 각 문단은 그리스도를 공개적으로 공공연히 거절하는 것에 대해 같은 신랄한 경고를 담고 있다. (129.2)
   1. 특권들:

   6:4-6—비췸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예한 바 되고, 하나님의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

   10:26—진리에 관한 지식, 새 언약의 피, 은혜의 성령.

   12:15-17—장자권.


   2. 죄:

   6:4-6—배도함.

   10:12-31—고의적으로 죄를 범함.

   12:15-17—장자권을 무시함.


   3. 결과:

   6:4-6—회개하기가 불가능함.

   10:12-31—더 이상 속죄를 위한 제사가 없음.

   12:15-17—장자권을 무시함.


   4.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전망:

   6:4-6—저주, 불사름(7-8절을 보라).

   10:26-31—모세의 율법을 범한 사람들을 위한 것보다 더한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살아 계신 하나님의 손”에 빠져 들어가는 것.

   12:15-17—거절(“소멸하는 불”).


   5. 하나님이 거절하시는 이유:

   6:4-6“하나님의 아들을 밟고 . . .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12:15-17“망령된 자(Godless).” (129.3)
 우리는 세 문단의 각 본문에 동일한 요소들이 있으면서 단순히 강조점이 바뀌는 것을 보게 된다. 6:4-6에서는 영적 특권들에 대하여, 10:26-31에서는 심판에 대하여, 그리고 12:15-17에서는 재생의 불능에 대하여 강조하고 있다. (130.1)
 세 문단에 열거된 특권들을 고려해 볼 때, 사도가 경고한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특유의 축복을 받아 왔다는 암시들은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선택된 무리—즉, 어떤 실수든지 그것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은사들을 식별하지 못하게 하는 중대한 실책이 되는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 개요에 열거된 특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개개인의 장자권(birthright)—성령의 비취심, 천국을 미리 맛봄, 내재하시는 그리스도의 능력, 영원한 영광의 상속권—을 말한다. (130.2)
 그러므로 사도가 경고한 죄는 어느 그리스도인도 범할 수 있는 것이다. 세 문단에 묘사된바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태와 더불어, 이 점에 대한 인식은 그리스도인들을 꽤 당황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였다. 문맥이 이 어려운 말들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진전시켜 주는지를 보기 위해 6:4-6을 택하여 보자. (130.3)
 첫째, 6:4-6은 설교적인 적용의 중간에 나온다. 그것은 신학적 요소를 포함하고 있는 “용서받지 못할 죄”의 본질을 규명하려는 조심스런 논증의 한 부분이 아니다. 둘째, 특별히 바울은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그의 독자들을 배제시키고 있다. 그는 “너희 . . . 는 이보다 나은 것 . . . 을 확신하노라”(6:9)고 말한다. 셋째, 우리는 6절에서 전체 토론을 조건적 바탕 위에 두는 만일(if)이라는 말을 주목한다. (1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