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 6에서 아들 되심에 초점을 맞추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그 다음 네 절은 한 번 더 예수님의 인성을 취급하고 있다. 그것은 2:5-18의 기술(記述)과 평행하며,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는 4:15의 설명으로 볼 수도 있다. (123.2)
 바울은 여기서 생생한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기도, 간구, 큰소리, 눈물. 그의 묘사는 예수님의 겟세마네의 고뇌를 상기시키며, 복음서에 나오는 동산 안에서의 예수님의 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예수님에 대한 표현이 가장 절실한 광경이다. (123.3)
 여기에는 가장(假裝)이나 연기(演技)나 사지(死地)의 둔감하고 냉랭한 고요가 조금도 없다. 예수님은 탄원과 큰 간구로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하셨고, 하나님은 그를 들으셨다. (123.4)
 한 유명한 학자인 아돌프 폰 하르나크(Adolf von Harnack)는 5:7에서 혼란을 느껴 한 단어가 본문에서 빠진 것이 틀림없다고 결론지었다. 예수님이 죽음에서 구원해 주시도록 기도하셨으나 그가 아직 죽지 않으셨기 때문에, 그의 기도는 응답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폰 하르나크는—고대 사본의 지지를 받음이 전혀 없이—아니(not)라는 말을 삽입하였다: “그[의 기도]는 들으신 바 되지 않았다.” (123.5)
 그런데 폰 하르나크는 핵심을 놓쳤다. 겟세마네에서 예수님은 세 번 다음과 같이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참으로 들으셨으나, 그의 응답은 “아니(No)”였다. 십자가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써만이 아들이 우리의 구원을 이루실 수 있었다. (123.6)
 「새국제역」도 5:8에 대하여 핵심을 놓치고 있다. 이 절은 5절에 비추어 “그가 한 아들(a son)이었을지라도”라고 번역되어서는 안 되고, “그가 그 아들(the Son)이었을지라도”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새영어성경」은 사도의 생각을 정확히 포착하고 있다: “그가 아들(son)이었을지라도.” 비록 . . . 일지라도(although)는 우리가 외관상 어떤 대조를 다루고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아들이신 한 분-즉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는 순종을 배우신다. 만일 우리가 「새국제역」과 같이 번역한다면, 비록 . . . 일지라도라는 말은 그 의미를 상실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든 “아들”(모든 인간)이 순종함을 배우기를 기대하기 때문이다. (123.7)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을지라도, 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굴복을 배우셨다—그는 “순종함을 배”우셨다. 시험과 고난을 통하여 그는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는 자격을 갖추셨다—그가 “온전하게 되”셨다. (124.1)
 그가 영원히 아들이셨으나 성육신을 통하여 우리 인간의 운명을 나눠 가지셨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신—인이신 그분을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으로 임명하실 수 있었다. (124.2)
 우리는 이제 5:5-10의 예수님에 대한 기술(記述)에 비추어 5:1-4의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의 일곱 특성을 복습할 수 있다. 우리가 몇 가지의 유사점을 발견하는 한편, 압도적인 특성은 대조를 이루고 있다. 우리에게는 더 좋은 대제사장이 있다. (124.3)
아론 그리스도
1. 하나님이 임명하심. 1. 하나님이 임명하심—그러나 그가 아들이시기 때문에!
2. “사람 가운데서” 나옴. 2. 아들이 사람이 되셨음.
3. 중보적 역할. 3. 여기에 언급되지 않음.
4. 희생을 드리는(제의적) 기능. 4. 여기에 언급되지 않음.
5. 죄의 제거(속죄) 기능. 5. 여기에 언급되지 않음.
6. 인간의 연약함을 용납함. 6. 자비롭고 동정적임.
7. 자신을 위한 희생 제물을 드릴 필요가 있음. 7. 여기에 언급되지 않았으나 7:26-28에서는 특별히 부인됨.
(124.4)
 일곱 가지의 강조점들 중에서 특별히 하나가 부정되고(죄됨), 세 가지는 대폭 수정되고(아들에 대한 하나님의 임명, 단순히 사람이 아니라 성육신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가 극한 인간의 경험들을 통과하셨기 때문에 동정적이심), 그리고 세 가지는 발전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세 가지—인간의 대표자로서의 그리스도, 그의 희생(제사), 그리고 그의 속죄 봉사—는 하늘 성소에 계시는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에 대하여 뒤에 있을 토론(8:10-18)의 배경을 형성할 것이다. (125.1)
 ■ 말씀에 들어감
 히브리서 5:11-6:20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주의 깊이 두 번 읽으라. 읽을 때 아래의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 보라: (125.3)
 1. 본 구절은 히브리서의 원래의 독자들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125.4)
 2. 바울은 히브리인들의 영적 나태함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125.5)
 3. 6:4-6에 묘사된 그리스도인들은,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간다면 소망이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같은 비상한 축복들을 받았는가? (125.6)
 4. 히브리서 6:4-6이 처음 몇 세기들로부터 그리스도인들을 괴롭혀 왔다. 그것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이 구절과 평행하는 듯이 보이는 두 구절을 찾아 보라: 10:26-3112:15-17. 배도하는 사람들은 결코 그리스도께로 되돌아올 수 없다고 히브리서는 가르치는가? 그대의 대답을 설명해 보라. (125.7)
 5. 하나님의 백성을 격려하는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은 무엇인가(18절)? (125.8)
 6. 히브리서 6:19는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가 주장하는 성소론에 관한 논쟁의 중심이 되어 왔다. 주요 문제는 “휘장 안으로(within the veil)”(「제임스왕역」)의 의미에 관한 것이다. 「새국제역」의 번역—“휘장 뒤의 내부 성소(the inner sanctuary behind the curtain)”—은 문자적으로 “휘장의 안쪽(the inner of the veil)”으로 되어 있는 헬라어 원문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목하라. 이 핵심 절을 다루면서 다음의 사항들을 파악하도록 노력하라: (12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