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공교히 만든 이야기”(벧후 1:16)를 좇지 아니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시대에 혹성(惑星) 지구(地球)를 휩쓰는 의심과 회의주의와 상대성의 폭풍우 속에서도 요지부동(搖之不動)하게 서 있을 수 있다. (116.1)
 그러나 우리가 시인하는 이 예수님은, 비록 참 하나님이실지라도, 어떤 멀리 있는 신이 아니다. 그는 우리 가까이에 오시며, 우리의 상한 마음을 동정하신다—이것이 사도의 두 번째 위대한 사상이다. 이 예수님이 복수하는 신으로서가 아니라, 자비하신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에게 오신다! 그의 지상 봉사의 기간 동안에 예수께서 갈릴리의 고달프고 염려가 많은 남녀들을 동정하셨듯이, 이제는 위에 있는 하늘에서 고통과 외로움에 싸여 있는 우리를 그의 팔을 벌려 받아들이신다. 그는 우리를 이해하시며, 돌보시며, 우리와 하나가 되신다. (116.2)
 왜냐하면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께서는 인간의 감정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는 고난 당하는 것, 악의 세력들과 싸우는 것이 무엇임을 아신다. 그는 죽음 자체에 대한 경험이 어떤 것인지도 아신다. 그가 아시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지식에 이를 수 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인간으로 사셨고, 그리고 죽으셨기 때문이다. 그의 존재가 실제이신 것같이(우리에게는 크신 대제사장이 계신다), 그의 인간적 경험도 사실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쉬운 답을 주지 않으셨고, 쉬운 출구도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시험에 굴복하지 않도록 그의 생애의 각본을 쓰신 것이 아니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는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것을 경험하셨다. 그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에게 지금 제공하시는 도움은 그가 견딘 고난만큼이나 참된 것이다. (116.3)
 우리는 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한 확증들을 깨닫기 위해 애쓴다. 우리는 이렇게 묻고 싶어한다: 그는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이신데, 어찌 시험을 받으실 수 있는가? 그는 다른 시대, 다른 장소에서, 오래 전에 사셨는데, 어떻게 한결같이 우리처럼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는가? (116.4)
 사도는 우리의 질문들에 대한 대답들을 열거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신앙 고백의 기초를 형성하시는 분, 곧 우리의 하늘 대제사장이신 분이 우리와 유사한 경험들을 통과하셨기 때문에, 상처받고 갈등하는 우리를 동정하신다는 것을 단지 확증할 뿐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잘못된 결론을 내리지 않게 하고, 또한 신-인(神人)이신 예수님의 수수께끼를 풀어 나가게 하는 부가적인 정보를 어딘가에서 제공해 주신다. (117.1)
 예를 들면, 그는 우리의 대제사장은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신다”(7:26)고 말한다.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과는 달리, 예수님은 자신의 죄를 위해 제물을 드릴 필요가 없었다고 그는 말한다(27절).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주님께서 죄를 동경하고, 빛보다 어두움을 더 좋아하는, 마귀가 그의 유혹물들로써 그것에 호소하였을 타락한 본성을 지니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117.2)
 아마도 우리는 더 넓은 화폭에다 예수님의 시험들을 그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자주 그것들을 개인적인 경건을 위한 우리의 투쟁에 대한 본보기로 묘사한다. 이러한 노력이 고상하다 할지라도,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본질적으로 부정적인 어떤 것-죄들의 목록을 제거하거나 극복하는 것-으로 쉽게 축소시킬 수가 있다. 그러나 주인(Master)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생애, 곧 주께서 우리를 위해 모델로서 보여주신 생애는 죄의 부재(不在, absence)가 아니라 온전한(wholeness) 생애였다. 그것은 하늘 아버지와 일치하는 마음에서 솟아나는 행동과 말의 적극적 유출(流出)이었다. 그러한 삶을 사심으로써 그는 유혹을 대면하셨고, 시험은 실제적이었고, 투쟁은 가혹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아버지의 뜻과 그와의 관계였다. 그가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 것인가, 아니면 마귀가 그에게 제안하는 대로 지름길로 갈 것인가? 그가 거절과 슬픔과 고통의 잔을 마실 것인가, 아니면 쉬운 출구를 찾을 것인가? (117.3)
 그러므로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 같이” 시험을 받으셨다. 시험의 근본 문제는 2,000년 전에 그러했듯이 오늘날도 동일하다. 즉, 우리가 하나님의 계획을 따르면서 계속 그를 신뢰할 것인가? 이다. 우리가 그와 그가 고수하시는 것을 첫째로 삼으면서 그를 존귀히 여기는가?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가 직면하는 유혹의 어떤 영역에 노출되지 않았다거나 우리가 결코 부닥치지 아니할 어떤 것을 맞부닥치셨다거나 하는 문제가 아니다. 예수님은 진실로 사람이셨으며, 우리의 인간적인 경험들을 하셨다. 그러므로 그는 고난과 시험에서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 (117.4)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와 달리 죄악과의 모든 대결을 통하여 죄없이 사셨다. 그는 죄가 없으셨으며, 그는 죄를 짓지 않으셨다.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은 흠이 없으시므로, 후에 히브리서의 논증에서 보게 될 것이지만, 그가 드리는 희생 제물—자신—은 완전한 희생 제물이다. (118.1)
 우리에게는 그러한 대제사장이 있으므로, 하늘 성전의 문들이 활짝 열려서 우리를 환영한다. 우주의 사령부는 우리를 위하여 더 이상 두려움이나 불확실함을 간직하고 있지 않다—우리의 소속은 그곳이다.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제임스왕역」: “담대히[boldly]”) 하나님의 면전으로 나아간다. 이것이 이 놀라운 구절에 있는 마지막 강조점이다. 16절“나아가다(approach)”로 번역된 말은 헬라어의 프로스에르코마이(proserchomai)로서,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때 사용되었다(히 10:22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사용되었다). (118.2)
 이렇게 전개됨으로써 우리는 처음으로 히브리서의 핵심 사상인 “접근(access)”을 대하게 된다. 이 책의 신학적 정점(頂點)인 9:1-10:18에서, 우리는 이 사상이 설명되고 확대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118.3)
 히브리서 4:14-162:18“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을 반향한다. 두 구절은 우리와 나눈 그의 경험 때문에 이해하시며 돌보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의 매력적인 초상(肖像)을 나타내 보인다. 그리고 이 두 절은, 우리가 궁핍할 때, 곧 우리가 시험을 받고 있을 때, 그가 능히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는 사상으로써 끝마친다. (118.4)
 그러므로 우리의 대제사장이 제공하시는 도움은 일차적으로 극복하게 하는 도움이다. 바울이 용서를 배제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2:17에서와 같이 4:16자비가 언급되어 있는 것은 그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이것은 그의 논리적 결론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불같은 시험을 이겨내신 그는 우리도 성공할 수 있게 하시고자 같은 종류의 시험에 처한 우리를 도우실 태세를 갖추고 계신다. (118.5)
 그리스도와 아론
 5:1-4에서 사도는 아론 계통의 대제사장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간략한 서술로써 시작한다: (119.1)
 1. 대제사장은 하나님에 의하여 그 직임에 임명된다—아무도 그 존귀를 스스로 취할 수 없다(1, 4절). (119.2)
 2. 그는 “사람 가운데서” 나온다. 즉, 그는 이 직임으로써 인간을 대표한다(1절). (119.3)
 3. 그는 인간을 위하여 행동하기 때문에 중보의 역할을 한다(1절). (119.4)
 4. 그는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린다-즉, 그는 그의 백성들을 위하여 희생하는 배경 가운데서 봉사한다(1절). 학자들은 습관적으로 이 희생하는 배경에 대하여 제의(祭儀, cult 또는 cultus)라는 말을 사용한다. 이 말이 이런 식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사이비 기독교 분파들과는 무관한 것이다. (119.5)
 5. 희생 제물은 “죄를 위한” 것이므로, 대제사장은 죄를 제거하는 기능(속죄)도 수행한다(1절). (11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