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8. 엘 로이—보시는 하나님 (주무시지 않는 인도자)
 만일 성경에서 오직 한 책만을 연구하라면 나는 창세기를 선택할 것이다. 창세기에는 내가 처음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우리가 연구하는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것도, 그분의 개성과 성품이 어떠하며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보여주는 아름다운 화폭들을 우리는 바로 이 성경의 첫 번째 책 창세기에서 발견한다. (128.1)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구원의 드라마가 진행되는 무대의 배경과도 같다. 창세기는 하늘 나라의 배경과 그 구성에 관해 성경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깊이 있는 통찰을 제공한다. 사라와 하갈, 이스마엘과 이삭의 상호 관계와 또 그들과 아브라함과의 개인적 관계가 어떻게 발전되는지 살펴볼 때 우리는 대 쟁투의 내막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가지게 된다. 작은 무대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해결하셔야 할 대우주 무대의 문제들을 관찰하게 되는 것이다. 거기 작용한 원칙들을 이해하면, 하나님께서 오늘 당신의 백성과 복음의 언약을 체결하려 하실 때 당면하시는 장애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제시하시는 방안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128.2)
 지금 우리가 연구하려는 이름은 엘 로이(Él roí), 보시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놀란 하갈이 “주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나이다!”라고 외쳤을 때 그녀가 말한 이름이다(창 16:13). 엘 로이(Él roí)의 형태로 이 이름이 사용된 것은 유일하게 이 때뿐이다. (Él)은 능하고 강하다는 뜻의 하나님의 칭호이고, 그것이 다른 칭호와 합쳐져서 이름의 뜻을 더 풍부하게 만든다. 로이(roí)는 동사 라아(raáh)에서 파생된 말로 “보다,” “보이다”의 뜻을 가진 말이다. 그러므로 엘 로이 는 보시는 우리의 하나님 또는 우리에게 보이는 우리 하나님을 말한다. 유한한 인간이 전능하신 이를 본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이 도저히 볼 수 없는 당신의 놀라운 영광과 본질을 가리우시고(요 1:18; 요일 4:12),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당신이 원하시는 것만 보여주심을 말한다. 그러면 사래의 애굽인 여종이 어떻게 이런 깊이 있는 통찰을 가지게 되었는지 알아보자. (129.1)
 여종 하갈-세계사 무대에 등장하다
 하갈은 아브라함 집안 생활을 날마다 관찰하면서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과 주인 부부와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어느 정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적합한 자손이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노부부가 당하는 긴장을 그녀는 눈치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여주인의 종용과 합의 아래 주인 영감님의 침실로 안내되는 자기를 발견한다. 이 때는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온지 10년 후였으므로(창 16:3), 그가 85세쯤 되었을 때였다(창 12:4, 5). 정확한 연대 파악은 하나님의 인내와 방법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129.2)
 다행히도 하갈의 임신은 그녀로 하여금 주변의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에 대해 무엄한 태도를 보이게 만들었다. 그녀는 “교만하고 자랑에 찬 정신으로 여주인을 멸시했다. 한때 평화롭던 가정이 그들 상호의 질투로 어지러움이 말이 아니었다”(PP 145). 사실상 하갈은 “자기가 임신한 것을 알고는 그녀의 여주인을 멸시했다”(창 16:4-6). 영감의 붓이 기록한 이 “멸시”(qalal, 칼랄)란 말은 하갈이 자기는 중시하고 사래는 가볍고 사소하고 악하고 사납게 보았음을 나타낸다(참고 욥 40:4; 나 1:14). 어떤 역자들은 모멸, 멸시, 경멸 등의 어휘로 그녀의 태도를 수식했다. 얼마 가지 않아 상황은 당사자 모두가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태로 악화되었다. 하갈의 거만한 정신은 자기의 건방진 행동이 불러온 가혹한 반응을 참을 수 없었다. “사래가 그녀를 심하게 다루자 그녀는 사래의 면전에서 도망하고 말았다”(PP 145; 창 16:6). (129.3)
 홀로 “사막으로 달아난 그녀가 어느 샘 곁에서 외로이 쉬고 있을 때 사람의 모양을 한 하나님의 천사가 그녀 앞에 나타났다. 그는 하갈을 ‘사래의 여종 하갈’이라 불러 그녀의 위치와 책임을 상기시킨 후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녀의 수하에 복종하라’ 하였다. 그러나 그의 책망에는 위로의 말이 섞여 있었다. ‘주께서 네 고난을 들으셨느니라.’ ‘내가 네 씨를 심히 번성케 하리니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되리라.’ 그리고는 당신의 자비를 영원히 생각나게 하기 위해 아이의 이름을 ‘하나님이 들으시리라’는 뜻으로 이스마엘이라 하라 하셨다”(PP 145-146). 이것이 하늘이 사람의 이름을 지어 준 첫 번째 사례이다. (130.1)
 그녀는 문뜩 마음에 느낀 바가 있었다. 머나먼 타향에서 종살이하다가 주인에게 버림받았으니 이제 홀몸도 아니고 정말 고생 밭에 들었구나 생각했으나, 하나님의 자비가 함께 하심을 깨닫는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음을 느꼈다. 그녀는 아브라함의 하나님께서 자기를 지켜보심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래서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창 16:13, 「개역한글판」). 영문 토라(Torah) 성경에는 이 구절이 이렇게 되어 있다: “You are El-roí. (참고 삼상 16:12; 욥 7:8; 33:21; 나 3:6). (130.2)
 하나님의 아들이 하갈을 권고하시다
 하갈에게 말씀하신 이는 바로 신격의 제 2 위이신 분이었다. 그는 창조의 능력을 가졌음을 비치셨다: “내가 네 씨를 심히 번성케 하리라.” 이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 것인데, 예수는 그 힘을 발휘하시는 당사자이다(요 1:3). 그는 또 하갈이 낳을 아들의 장래를 예언하였는데, 이것도 예수께서 발휘하신 능력이다(벧전 1:10, 11). 그 예언은 이러했다: “그는 들 나귀 같은 사람이 될 것이며, 그의 손은 만인을 대적하고, 만인의 손이 그를 대적하리니, 그는 그의 형제들과 원수를 맺고 살리라”(창 16:7-12, Torah, NAB, NEB). (131.1)
 책망과 격려를 동시에 받은 하갈은 그녀와 그녀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식을 돌보시고 감찰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지고 장막으로 돌아온다. 그분은 그녀의 이름을 아실 뿐 아니라 그녀가 낳을 아들의 이름까지 지어 주실 만큼 관심을 가지신 분이다. 후일 예수님은 우리의 머리칼까지 다 세어 아신다고 말씀하셨다(마 10:30; 눅 12:7). 황송하게도 그는 그녀가 앉아 있는 곳에까지 찾아오셔서 말씀하셨다! 그뿐인가? 그는 타락한 인류와의 대화를 위해 자기를 낮추어 인간의 본성을 쓰고 오시기까지 하신 분이다. 그래서 하갈은 그분을 엘 로이 라 불렀다. 나를 보고 계시는 하나님. 이 이름은 하나님의 가장 깊은 관심사를 강조한다. (131.2)
 그러다가 드디어 이스마엘이 출생하자 장막 촌에서 하갈의 위치는 한 층 더 올라간다.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존경과 대접을 받는다. 그녀는 자기가 낳은 아들을 대단한 부자 족장의 상속자로 알고, 그 때문에 자기의 사회적 지위가 완전히 굳어진 것으로 믿는다. 그녀는 이제 자기는 팔자를 고쳤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는 일에 크게 기여하게 된 줄로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131.3)
 그러나 하갈을 대모(代母)로 이용하여 약속된 씨를 받으려던 아브람과 사래의 결정은 오히려 그들과 또 온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지연시켰을 뿐이다. 잘 진행되던 구원의 드라마가 몇 해 동안 정체 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잘못은 어디까지나 잘못으로 남는다. 잘못한 것이 잘한 것이 되는 법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하갈을 권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첩살이하는 집안의 분위기는 점점 악화되어 갔다. (131.4)
 이스마엘이 14세 되던 해에 이삭이 태어났다(창 12:4; 16:3; 21:5). 이삭의 출생은 하갈의 꿈과 이스마엘의 장래에 말할 수 없는 타격을 주었다. 어려서부터 아브라함의 상속자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씨”라고 자타가 공인했고 또 그렇게 믿어 온 이스마엘은 이제 만만치 않은 경쟁자가 장막 촌에 나타나자 자기의 위신과 세력이 영원히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하갈의 절망과 분노는 점점 머리를 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남편인 주인과 그의 본처인 주모가 자기와 자기 아들을 대수롭지 않게 보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하갈은 이삭을 향해 분노를 불태웠다. (132.1)
 이삭이 다섯 살 되던 날 베풀어진 젖떼는 날의 잔치에서 질투와 분노를 참다 못한 이스마엘은 만장한 사람들 가운데서 이삭을 조롱(모독, 조소)했다(창 21:8-11). 젖떼는 나이는 1,500년이 지난 B.C. 175년경 마카베오 시대에는 3세로 줄어들었다(마카베오하 7:27). 이것을 목격한 사라는 하갈 모자를 더 이상 장막에 둘 수 없다고 느끼고 그들을 내어쫓도록 아브라함에게 압력을 가했다. 이 때 이스마엘의 나이는 19세 정도 되었을 것이다.1) 그 정도면 어머니를 모시고 어디 가던지 살 수 있는 나이였다. 엘 라이 는 이스마엘도 보고 계셨다. (132.2)
 모든 것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은 무엇을 보나?
 하나님께서 보신 상황과 하나님께서 쓰신 방법, 그리고 거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품을 살펴보기로 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장래를 미리 내다보시고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과 어떤 실수를 주의할 것을 경고하셨다. 그분은 또 하갈이 아브라함의 가정에서 어떤 입장에 빠질 것을 보시고, 그녀에게 어떻게 처신할 것을 말씀해 주셨다. 이스마엘이 너무 어렸을 때 하갈이 아브라함의 집을 나올 경우 그들 모자가 당할 어려움을 아신 하나님은 하갈의 아들이 14세 될 때까지 이삭의 출생을 미루셨다. 이삭이 난 후 다시 5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은 그들이 아브라함 슬하의 안일한 생활을 떠나 생소한 곳으로 가도록 하셨다. (132.3)
 “하늘과 땅을 당신의 명령 아래 부리시는 우리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가 무엇인지 아신다. 우리는 앞날을 조금밖에 보지 못하나 그분의 눈에는 ‘만물이 ... 적나라(赤裸裸)하게’ 있는 그대로 드러난다”(히 4:13).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앞에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다.... 심지어 작은 참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져도 그분 모르게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새들이 보존되어 기쁜 노래로 우리를 즐겁게 하는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TC 8:272-273). (133.1)
 하갈 모자가 아브라함의 집을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허락된 것은 이스마엘이 어머니를 도와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성장한 후의 일이었다. 하갈이 아브라함이 장만해 준 밑천과 아들을 의지하고 살 수 있게 해주신 이는 하나님이셨다.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은 그 모든 진행을 분명히 보고 계셨다. 그분은 언제 무엇이 필요할 것을 아신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을 내다보시고 만사를 조정하여 인류를 복되게 하시려는 당신의 전반적 계획을 가장 적당한 때에 성취하신다. 그분은 단순히 만사를 “보실” 뿐 아니라 모든 결과가 당신의 뜻대로 되도록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133.2)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낸 후 하나님의 계획은 본 궤도를 달리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모자가 광야에서 외로이 죽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셨다. 비탄에 빠진 하갈은 자기의 신세를 한탄하며 모든 의욕을 잃고 다만 땅에 펄쩍 주저앉아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을 불러 묻기를 “웬 일이냐?”고 하셨다(창 21:17, 「70인역」). 그녀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시는 그는 그녀에게 아들의 손을 잡고 미래를 향해 걸으라고 격려하셨다. 그리고 그는 당신께서 그들의 자립을 돌보실 것과 이스마엘의 후손이 큰 민족을 이룬다는 약속이 성취될 것을 확언하셨다. 이렇게 엘 로이 는 결코 인생의 필요를 못 본 체하지 않으심을 보이셨다. (13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