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그러나 서로마가 망하고, 동로마가 동쪽으로 밀려나 허약해진 때, 서유럽 세계에서 교황권을 키우고 옹호한 것은 신성로마제국인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런데 신성로마제국의 연원(淵源)은 게르만 민족 가운데 최강의 세력이었던 프랑크였으며, 신성로마제국이 로마교황권에 밀착(密着)된 것은, 496년 프랑크왕 클로비스(Clovis)가 다른 게르만 민족인 알라마니(Alamani)와 생사를 건 전투에서 콘스탄틴황제의 경우처럼 소위 그리스도를 힘 입어 승리한데 대한 감사의 표시로 그의 병졸 3천여명과 함께 침례를 받고 로마교회로 개종(改宗)한 데서 기인되었다.
Bainton, 143. 그 당시 다른 모든 게르만 민족은, 로마교회가 적대시한 아리우스파의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넘어 갔고, 당시의 동로마황제 아나스타시우스(Anastasius)도 이단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그리스도의 속성에 관해 일성론(一性論)을 주장한 Eutychian이었다. 의지할 데라고는 아무도 없었던 로마교회에게, 프랑크의 로마교회 전향(轉向)은 획기적 사실이었다. 그래서 프랑크를
“로마교회의 맏 딸,” Bainton, 143. 혹은
“맏 아들”로 부르고 있다.
Archibald Bower, The History of the Popes, vol, I, 296, cited by Uriah Smith, 324, 325. 바로 이 프랑크 계통의 왕들이 대대로 로마교회에게 충성을 다하여, 754년에는 영토가 없던 교황권에게, 롬바드에게서 빼앗은 동로마의 땅을 교황령으로 선물했고,
Qualben, 148. 여러 차례 파멸의 위기에서 건져냈으며, 800년에는 프랑크의 촬스대제에게 관을 씌워 역사적인 신성로마제국을 탄생시켜, 그후 1천년 후인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나폴레옹에게 망하기까지 아합과 이세벨의 배도(背道)를 자행하며, 중세기의 밀월(密月)을 즐겼던 것이다.
Bainton, 164. (24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