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이처럼 어수선해져서 도덕에는 표준이 없고, 신앙에는 신조가 없고, 예술에는 가치가 없고 정치에는 대의 명분이 없다보니 권선징악(勸善懲惡)의 천리(天理)마저 없어진 줄 아는가.

 — 시편 4편(53.1)
 해 넘어가고
 해가 지고 어두움이 덮이면 사람은 어딘가 허전해져서 외로움과 연약함을 느끼고 때로는 슬퍼지기도 하고 그리워지기도 한다. (53.2)
 해는 져서 어두운데 찾아오는 사람 없어

 밝은 달만 쳐다보니 외롭기 한이 없네

 내 동무 어디 두고 이 홀로 앉아서

 이 일 저 일을 생각하니 눈물만 흐른다. (53.3)
 어릴 때 부르던 옛 노래가 아직도 새삼스러워지는 것은 부질없는 동심(童心) 때문만은 아님을 우리는 안다. (53.4)
 시편에 소개된 첫 번째 해 넘어간 밤의 사연은 무엇인가? 인생의 황혼녘에 접어든 다윗이 배역한 자식 압살롬과 배신한 다수 신민(臣民)의 추격을 받으며 목숨을 위해 도망가는 비창(悲愴)한 밤이었다. 왕위도 빼앗기고, 나라도 빼앗기고, 백성도 빼앗기고, 예루살렘과 성소 그리고 법궤까지도 때앗기고, 낯뜨거운 근친 상간으로 후궁(後宮)들까지 빼앗겨(사무엘하 6장 20~22절 참조), 체면이고 자존심이고 산산조각이 난 채 모진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구차하게 도망가던 그 밤, 다윗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53.5)
 공교롭게도 인간의 첫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 이후 처음 겪은 고통과 탄식도 자식 때문이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자기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반역했을 때 하나님이 겪으신 고통과 탄식이 재연된 것인가? (54.1)
 첫 자식에 대한 첫 부모의 하늘같이 높은 기대는 지어준 첫이름 “가인”(Cain)에서도 엿볼 수 있다. “얻다”(acquire)혹은 “속량하다”(redeem)를 뜻하는 히브리어 동사 “카나”(qanah)에서 나온 “가인”의 뜻은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세기 4장 1절)는 고백에서도 확인된다. (54.2)
 아담과 하와는 그들이 낳은 첫 자식이 “여호와께서 주신 남자”, 곧 자신들을 죄짓게 한 사단의 머리를 부수어 원수를 갚아 줄, 약속하신 메시아인 “여자의 후손”이기를 얼마나 바랐던가(창세기 3장 15절 참조). 그러나 첫 자식을 키우면서 그 기대는 무너져갔다. 둘째 아들이 태어났을 때 이미 그러한 기대는 풀이 죽어 있었음을 지어준 이름 아벨(Abel)에서 엿볼 수 있다. (54.3)
 히브리어로는 “헤벨”(hebel)인 그의 이름의 뜻은 “헛됨”(wnity) 혹은 “무상”(無常)을 뜻하는 명사 “헤벨”(hebel)과 같은 것으로 전도서에서 강조된 그 “헛됨”과 같은 것이다(전도서 1장 2절; 2장 17절; 3장 19절 참조). 터질 듯한 기대를 걸었던 첫 자식이 아우를 쳐죽이는 살인극을 벌였을 때 모든 꿈은 너무나 허무하게, 그리고 깡그리 무너졌다. 노아 홍수가 있기 직전 “사람의 ∙∙∙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창세기 6장 5, 6절)신 하나님의 탄식에 드러난 무너지는 꿈 이야기이다. (54.4)
 시편에 소개된 첫 번째 밤, 다정 다감한 아버지 다윗을 그러한 비탄과 암울(暗鬱)속으로 빠뜨린 것도 히브리어로 “아브솰롬”(Abshalom) 혹은 “아비솰롬”(Abishalom), 곧 “나의 아버지는 화평”임을 뜻하는 이름을 지어준, 기대에 찼던 자식 압살롬(Absalom)이 아니었던가? 그 압살롬이 끝내 아버지의 화평을 빼앗아간 것이다. (55.1)
 어두움이 덮일 때
 첫밤을 요단강 나룻터에서 잠시 눈을 붙여 단잠을 자며 보낸 다윗은(시편 3편 5절 참조), 새벽녘에 일행과 함께 요단강을 건넌후(사무엘하 17장 22절 참조) 동편 길을 따라 북상하여 온종일 피곤한 발을 끌며 성벽이 둘러있는 산간 성읍 마하나임에 이르렀다(사무엘하 17장 26, 27절 참조). (55.2)
마음을 불안하게 하던 산간의 바람 소리는 어느새 평안한 잠을 청하는 자애로우신 하나님의 자장가로 바뀌었다. 이 형편에서 이렇게 평안히 잠들 수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동안 다윗은 어느새 곤한 잠에 빠져 들었다.
(55.3)
 산간 성읍에 어두움이 덮이고 온 누리가 적막에 잠기자 다윗의 마음에도 안식이 깃들었다. 꿈만 같은 현실을 생각하면 기가 막히고 분하여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으나, 다시 생각하니 하나님께 대한 감사가 복받쳐 올라왔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사무엘하 16장 11절)고, 철석같이 믿었던 신하와 백성이 배신한 이 지경에서도 여전히 변치 않는 성실과 더 측은히 여기시는 사랑으로 여기까지 동행해 주신 하나님을 생각하니 너무 고마워서 가슴이 뻐근했다. 그리고 이 원통하고 비창한 심정을 터놓고 싶었으며 간절한 소원을 아뢰고 싶었다. 그의 저녁 기도가 시작되었다. (55.4)
 저녁의 탄원
 “내 의(義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변하여 욕되게 하며

   허사를 좋아하고 궤휼을 구하겠는고”

   (시편 4편 1, 2절). (56.1)
 모든 일에 틀림없이 시시비비(是是非非)를 가려주시는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이번의 이 엄청난 불의를 좌시(坐視)하지 않으시고 사필귀정(事必歸正)으로 결말을 내실 것을 생각하니 모처럼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이번의 반역을 주도한 무리들, 곧 그 “인생들”이 하는 일이 가소로워지고 측은한 생각마저 들었다. 누가 뭐래도 하나님은 경건한 자의 편, 곧 내 편이시다. 나를 반역한 것이 곧 나를 세우신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임을 명심하고 성사(成事)도 안 될 일을 하지도 말라고 외칠 만큼 의기양양해졌다. (56.2)
 “여호와께서 자기를 위하여

   경건하 자를 택하신 줄 너희가 알지어다

   내가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너희는 떨며 범죄치 말지어다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지어다”

   (시편 4편 3, 4절). (57.1)
 소란스럽게 역적 모의를 하고 반역을 변명하려고 나를 악선전한다고 되는 일이 아니다. 의인이 드리는 기도의 위력을 과소 평가하지 말라. 기도를 드리는 나는 약하고 보잘것없지만 내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은 막강하심을 알라. 이 천지가 고요한 밤에 가슴에 손을 얹고 조용히 양심의 소리를 들으라. 그리고 하늘 무서운 줄을 알라.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그럴 수가 있는가? 경거망동(輕擧妄動)하여 더 이상 죄짓지 않도록 이 밤에 잠자리에 누워 자신들의 처신에 대해 심사 숙고하라. (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