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의자들은 민족적 이스라엘을 새 언약의 교회를 비역사적으로 동일시하거나 같이 보는 것은 제대로 반대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스라엘과 교회는 둘 다 근본적으로 다른 목적과 약속으로 분리된다고 결론을 내렸다. 세대주의는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교회 사이의 어떤 표상적 연결도 고려하지 않는다. 비록 세대주의는 그리스도와 교회와 관련하여42 구약에 나타난 메시아적 표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옛 언약이 새 언약의 표상이라는 것과 교회의 표상으로서 이스라엘을 거절한다. 라이리(Ryrie)는 교회를 “새로운 영적 이스라엘”해석하는 것은 문자주의와 충돌되기 때문에 “인위적인 표상적 해석”43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스라엘이란 개념을 교회 신자들 위에 놓아서 전달하는 것은 신약이 인정하지 않는다 ∙∙∙ . 한 그룹으로서의 신자들은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지 않는다”44고 주장하였다. (56.2)
 그러나 세대주의자 찰스 베이커(Charles F. Baker)는 스코필드와 라 이리에 반대하여 교회와 사도들(바울 제외)은 신약교회로서의 이스라엘(마 16:18; 18:17; 행 2:47) 이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는 그것을 사도 바울에 의해 시작된 “몸 된 교회”(엡 3:9)와는 전적으로 분리되는 “왕국 교회”라고 불렀다.45 베이커는 (마 16:18의) 왕국 교회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때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수천의 새 신자들이 단지 그리스도의 교회에 ‘더하였기’(행 2:41, 47)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왕국 교회는 “예언상의 이스라엘 교회”이다. 이는 사도 베드로가 성령에 충만하여 선포한 바, 이는 그 교회와 관련하여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일은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행 3:21) 모든 것의 성취이기 때문이다.46 우리는 라이리에 대한 베이커의 대답에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그러나 베이커가 그리스도의 “왕국교회”를 바울의 “몸 된 교회”와 날카롭게 구분한 것은 전혀 지지를 받을 수 없다. (56.3)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진리는 이전 모든 세대에는 감취어진 비밀이었다(엡 3:9). 그러므로 모든 옛적 예언들의 주제와는 다른 어떤 것이어야 하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진정한 세대 구분은 예언 상의 이스라엘 교회와 신비한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의 구분이다. 이 둘 모두 신약이라 불리는 책에서 발견된다.47
(57.1)
 이와 같은 세대주의의 구분과 딜레마는 정당한 근거가 없는 추론과 문자주의의 결과이다. 그것은 모든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유일하고 지속적인 구원 계획안에 있는 하나님의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의 교회 사이의 신학적 표상을 상실하게 한다. 세대주의는 메시아적 표상학을 가능하면 축소하여 사용하려고 애쓴다. 즉 구약 표상의 기독론적 적용은 받아들이지만, 이스라엘의 사명과 명령에 대한 교회론적 적용은 부인하고 부정한다. (57.2)
 신약의 표상학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이스라엘 사이에 이러한 이분법을 만들지 않는다. 신약 복음의 중심 문제와 그 예언적 희망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스라엘 선민의 거룩한 목적, 즉 이방을 위한 구원의 빛이 되는 일을 성취하도록 지명되었다는 것이다. 사도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이 위임받은 복음 사명을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표현된 것으로 이해하였다(행 13:47; 사 49:6과 비교하라). 신약 표상학의 전체적인 범위는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57.3)
무엇보다 먼저 구약 표상의 원형을 제공하는 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분에 이어 우리는 또한 고린도후서 3:7의 사도 직분, 고린도전서 10:1의 성례, 그리고 베드로전서 1:5, 9; 요한계시록 1:6; 그리고 고린도전서 10:6에 언급된 새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은혜와 심판의 경험에 대해 언급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경우들은 부속적인 것이거나 덜 중요한 것들이 아니라 구원의 실현에 있어서 중심적인 요소들이다.48
(58.1)
 성서적 표상학에서 원형은 그리스도만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구원 계획안에서 깨어질 수 없는 유기적 통일성으로 연합된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이다.49 (58.2)
 예언적 종말론에서의 표상학
 비록 이스라엘 선지자들이 전체 구속사의 작은 부분밖에 보지 못하 였을지라도, 원칙적으로 표상학적 일치는 그들에 의해 이미 선포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은 자신과 당신의 언약에 충실하시기 때문에(신 7:9)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 행위는 본질적으로 되풀이 될 것이라는 확신 속에 자신들의 예언을 기록하였다. 그분의 행위는 과거의 어떤 것 보다도 더 크고, 우주적인 규모로, 더 영광스럽게 반복될 것이다. 50 (58.3)
 선지자들은 지상에서의 미래의 하나님의 왕국을 낙원에 있었던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로부터 끌어낸 모티프와 이미지로 묘사하였다(창세기 2장사 11:6-9; 35; 65:23-25; 겔 34:25-30; 52; 11:15과 비교하라). 덧붙여서, 이사야는 새롭고도 더 큰 출애굽이라는 개념으로 앗수르 바벨론 포수에서의 이스라엘의 미래 구출을 예언하였다. 더 나아가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은 이스라엘과 이방들을 의와 평화로 다스릴 다윗가문의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했다. 그 왕은 다윗과 같은 왕이지만, 다윗 보다 훨씬 더 위대할 것이다(사 9:1-7; 11:1-9; 55:1-5; 렘 23:5-6; 30:9; 33:14-18; 겔 34:23-31; 37:24-28). 이것들 외에도 구약에는 표상학적 예언의 예들이 더 많이 있다. 즉 새 멜기세덱(시 110), 새 모세(신 18:15-19), 새 엘리야(말 4:5), 새 성전(겔 41-48), 새 언약(렘 31:31-34), 그리고 새 백성의 재창조(사 65:17; 66:22; 겔 36:26; 37:11-14)의 도래가 선포되었다. (59.1)
 구약의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과거 하나님의 행위에 의거하여 미래에 대한 그들의 희망을 표현하였다.51 그리고 그것은 과거에 그들이 경험한 어떤 것보다도 훨씬 더 영광스러울 것이다. 선지자들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미래에 있을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를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위대한 과거의 행위를 회고하였다. 그러므로 구약의 예언들은 “확실하게 기.. 념적이면서 동시에 예언적이다.”52 (59.2)
 요약하면, 구약의 예언적 미래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특징적인면을 가지고 있다.

   (1) 하나님은 그의 과거의 행위의 원칙에 따라 미래에도 행동하신다.

   (2) 하나님은 다가올 메시아 시대에 메시아를 통하여 전례 없는 영광스러운 스케일로 그렇게 하실 것이다. (59.3)
 하나님의 과거의 행위를 “전형적으로” 강조하는 문학적 스타일에 의한 하나님의 미래 왕국에 대한 예언적 묘사는 “엄격한 문자주의”(스코필드)의 세대주의 해석학이 예언 해석을 위해서는 부적합하고 부실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세대주의의 문자주의의 문제는 이스라엘 예언의 실제적인 역사적 가시적 성취에 있어서 자리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문자주의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이루어지는 미래 예언 성취의 그 놀라운 탁월성과 영광스러운 변화를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하다. 예언이 묘사하는 미래를 문자적으로만 투사하는 것은 다만 사람의 눈이 이미 바라본 것일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고전 2:9; 사 64:4 적용)한 것이다. (59.4)
 다시 한 번 우리는 모든 추상적인 영해와 우화해석을 반대하면서 구약 예언에 대한 문자적 역사적 성취를 확인하는 바이다. 그러나 우리는 마치 문자주의와 우화주의의 두 극단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된다는 그런 거짓된 딜레마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한다. 표상학적 구조는 성서적 희망과 예언의 스타일이다.53 (60.1)
 사실, 표상으로부터 그것을 초월하는 원형에 이르기까지의 그 역사적 진보를 포함하는 표상학적 사고의 전체 개념은 “(구약)의 예언적 종말론에 처음으로 나타난다.”54 구약 예언에 나타나는 초기 ‘표상학’은 널리 퍼진 주변 이교 나라들의 순환적 사고에 뿌리를 둔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주적 과정에서의 마지막 시대는 자동적으로 처음 시대와 대응한다고 기대한다. 미래에 과거가 문자적으로 재발생한다는 개념은 이교적 모티프이다. 그것은 구약 예언에 대한 표상학적 접근으로 극복되었다. (60.2)
 미래의 갱신에 대한 이스라엘의 약속은 저주아래 있는 모든 지상 가족들을 축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택하신 그분의 신실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창 12:2, 3; 사 42-53; 특별히 45:22). 하나님의 목적은 과거에 있었던 그분의 구속 행위에 의해 계속 성취되는 것만이 아니다. 도래할 회복은 “이전 것과 꼭 같은 것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뛰어난 것이다. (Goppelt).”55 마치 신약의 원형이 구약의 표상보다 그리스도 안에서 더 높은 영광의 차원에 있듯이 이스라엘의 예언적 표상학은 철저한 새로움을 강조하는 새 창조의 더 높은 음조로 거룩한 역사를 예언한다. 구약의 선지자는 나중에 예언된 대로 실제 사건이 정확히 일치하였는지에 대한 조건으로 그 진실성이 확인되는 정해진 기별을 가진 점쟁이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역사와 예언의 주심으로 그분의 성취를 통해 그분의 약속을 해석하실 권한을 가지고 계시다. “그리고 그 해석은 심지어 선지자 자신에게도 깜짝 놀라운 것이 될 수 있다.”56 (60.3)
 표상학적 성취에 있어서 ‘초월’‘변화’의 개념은 이스라엘의 예언적 종말론에 나타나는 ‘새로움’이라는 범주에 해당되는 것으로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표상학과 예언은 둘 다 여호와의 큰 날, 하나님의 모든 언약의 약속이 영광스럽게 완성되는 날을 가리키는 쌍둥이 자매이다. 그들의 내적 연결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엄밀히 말하면 표상학은 다만 예언의 수단에 있어서 예언과 다를 뿐이다. 예언은 주로 말로 하고, 표상학은 제도, 행위, 그리고 인물로 한다.”57 (61.1)
 성서학자들은 진정한 표상은 “예언적 상징”(B. Ramm), “행위 예언”(J. B. Payne), “일종의 예언적 예언”(predictive prophecy), “예언적 예언의 모든 말”(S. N. Gundry)등이라고 진술한다.58 표상학은 약속된 미 래의 실제적인 역사적 성질을 강조한다. 반면에 예언은 “종종 표상학에서 막연하고 상징적이기만 하던 것을 분명하게 만들고, ‘반복’ 개념이 이교의 역사 도피적 순환주의로 빠지지 않게 한다.”59 램피(Lampe)는 “믿음으로 미래를 내다보는 자는 표상론자이다”60 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그가 자신의 믿음을 하나님의 과거행위(예를 들어, 출애굽 구원)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이다.61 (61.2)
 예언(prophecy)은 미리 말한 것(prediction)과 성취를 서로 연관시킨다. 덧붙여서, 표상학은 최초의 실현에서부터 더 큰 성취로 나아가는 부단한 과정을 표현한다. 그러므로 표상과 원형 사이의 표상학적 상호 연관성은 구약 종말론의 일부이다. “표상학은 원칙상으로 예언에 속한다. 그것은 종말론적 희망과 극적으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예언으로서 근본적으로 같은 의미들로부터 설명되어야 한다.”62 메시아 시대에 대한 예언적 묘사를 마치 조각 퍼즐63이나 스냅 사진 맞추기나 되는 양 “절대적인 문자주의”의 이성적 원칙으로 해석하려는 것은 원형의 영광들(예를 들어, 메시아, 사도적 남은 무리, 이스라엘의 최후의 모임)을 구약의 표상만을 가지고 해석하거나 그림자로부터 실재를 상세히 추론하려는 것과 마찬가지로 부적합하다. (62.1)
 단편적인 이스라엘 표상들과 예언들의 거룩한 성취는 항상 놀라움과 경이로 충만하다. 왜냐하면 여호와는 그의 뜻이 실현되는 모든 길에서 주님이시기 때문이다. 이러한 놀라운 새 길이 신약에 드러나 있다. 신약의 메시아적 역사에 대한 구약의 이러한 직접성에 대한 인식이 구약에 대한 문자주의적 주석과 기독교적 주석을 구별하게 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성경을 신구약으로부터 “입체 음향적으로” 듣는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계시는 기본적으로 신구약에서 하나로서 일관되기 때문이다. 기독교 표상학은 역사는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약속들의 영광스러운 절정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확신의 표현이다. (6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