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상학은 구절의 문자적 의미 이상의 것을 취한다. 신약은 그리스도를 구약의 모든 주제와 성취로 보면서 이렇게 하되, 명백한 메시아적 예언에 국한 시키지 않는다 ∙∙∙ . 표상학적 해석은 구약의 부분적, 단편적 계시가 그리스도를 미리 가리켰음을 보여준다 ∙∙∙ 표상학은 역사의 성취의 빛에서 읽는다는 점에서 원래는 없던 의미를 성경에서 읽어 낸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문맥에 새로운 원칙을 주입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문자적 문맥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취급하신 것을 해석한다. 그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어떻게 취급하셨는지를 가리킨다.25
(50.3)
 신구약에 대한 신약의 표상학적 해석은 성경의 신학적 통일성을 파 악하는 주된 열쇠를 제공한다. 그리고 “종종 순수한 역사적 - 문법적 연 구의 결과인 파편화를 피하게 해준다.”26 그것은 온 인류를 위한 하나님 의 구속사적 행위를 좀 더 충만한 의미(sensus plenior)로 이해할 수 있도 록 구약의 역사적 주석에 기초를 두고 있다.27 표상학적 주석이 신약이 가르치고자 하는 “근본적 관점”인 이상 표상학적 개념은 구약의 “문자적 의미의 진실한 확장”28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예리한 분석을 제시하였다. (51.1)
거룩한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이시다. 그분의 권능 안에서 단지 단어만으로 가 아니라 사람도 할 수 있는 — 사물로도 그 의미를 표현하였다. 그러므로 모든 지식 (scientia) 분야에서 그러하듯이 단어로 나타난 사물들 자체가 의 미를 가지고 있다. 단어들이 사물들을 나타내는 그 첫 의미가 문자적 역사 적 개념이다. 단어들에 의해 표명된 사물들에 의한 의미가 영적인 개념이라 고 불린다. 그리고 그것들은 문자적 의미에 기초하고 있고 그것을 전제한 다. 29
(51.2)
 진정한 표상적 개념은 성서 말씀의 문자적 의미에 다른 개념을 첩 놓지 않고, 성서의 언어들로 표현된 사물들과 사건들의 예언적 의미와 관계된 것임이 분명하다. 구약에 대한 진정한 표상학적 해석은 문자적 의미를 넘어 제2의 의미나 우화적 해석을 만들어내지 않고, “신약의 상황에서 본문의 역사적 의미가 계속해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30 듣고자 한다. 헤이그너(Donal A. Hagner)는 그의 유익한 논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51.3)
신약의 기자들에게 표상학적 관계들은 하나님의 계획의 결과이다. 어떤 의미에서 표상은 원형을 “예언하고,” 원형은 표상을 “성취한다.” ∙∙∙ 표상학적 일치를 추적하는 것은 구약 자료의 충만한 의미를 찾아내는 특별한 일이다. 즉 구약은 눈으로 즉시 보는 것보다 훨씬 더 충만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실, 그것은 신약에 나타난 대응의 빛 아래서만 분별할 수 있다.31
(52.1)
 이스라엘 구약 역사의 충만한 신학적 개념은 오직 예수께서 이스라엘의 메시아라는 것과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함께 한 하나님의 언약은 그리스도께서 열두 제자와 맺은 언약 안에서 완성되고 성취되었다(고후 3장; 히 4장) — 연기되지 않고—고 믿는 자들에 의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우리는 “구약에 대한 바른 이해와 사용은 신약에 달려 있으며, 또 한편 구약에 대한 주된 용례가 곧 신약에 대한 바른 이해와 사용의 기초가 되는 것”32이라는 베이커(David L. Baker)의 균형 잡힌 결론에 공감한다. (52.2)
 표상의 한계
 페인(J. Barton Payne)은 그의 성서예언대백과사전(Encyclopedia of Biblical Prophecy, Harper, 1973, 24-26쪽)에서 성서 표상은 다음과 같은 네 가지 근본적인 특징들을 지니고 있다고 가르쳤다.

   (1) 신적인 기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예, 출 25:40; 히 8:5과 비교).

   (2) 구속적인 것이어야 한다(예, 슥 14:16; 요 20:31과 비교).

   (3) 레위기 제사법이나 의식과 같이 상징적 법령이어야 한다.

   (4) 행위 예언(an acted prophecy)이어야 한다(민 21:9; 요 3:14; 골 2:17; 히 10:1과 비교). 간단히 말해, 표상이란 “미래 구속의 거룩한 법제정”이다. (53.1)
 페인은 기독론적 요구에 부응하는 50개 이상의 성서적 표상에 대해 고찰하였는데(백과사전 671-672쪽에 수록), 그 대부분은 이스라엘의 성소 의식과 예전 축제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비록 그 당시 모세와 같이(출 25:40) 아주 소수의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그들의 예언적 디자인을 이해하였지만, 일반적인 대리적 구원 방식과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의 성화의 상징으로 기능하는 것에 관한 그 상징적 의미는 구약 성도들이 잘 이해 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인다. (53.2)
 상징과 표상의 구분이 도움이 될 것이다. “상징은 도덕적 진리를 가르치는 사실이다. 그러나 표상은 도덕적 진리를 가르치고 다소간 그 진리의 실제적 실현을 예견한다.”33 (53.3)
 문제는 아직도 남아 있다. 그것은 표상학에서 공허한 추론이나 우화화를 피하기 위하여 그것을 조절하는 것은 무엇인가34 하는 점이다. 버나드 램(Bermard Ramm)은 신약 표상학의 초점은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에 대한 위대한 사실들 그리고 그리스도인 경험의 기본적, 영적, 도덕적 진리들에 있다35고 강조한다. 신약의 표상학은 상세한 면이나 부수적인 것들은 다루지 않는다. 또한 표상과 원형 사이의 하나하나의 대웅이나 완벽한 일치성을 가르치지도 않는다. 결국, 표상과 원형 사이의 다른 점이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램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중요한 진리는 유사점에 있다. 표상학에서 가장 큰 오류 중의 하나는 표상에 있는 상이한 요소들을 중요하게 만드는 것이다.”36 구약의 구속사의 진정한 본질들을 파악하여 그것들을 단지 외적으로 비슷한 것들로부터 깨끗하게 구분하려는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은 순전한 역사적 주석이 할 수 있는 일 이상을 요구한다. 구약과 신약 사이에서 표상학적 패턴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과 인도가 필요하다. (53.4)
 성경에서 새로운 표상학적 패턴을 발견하는 일은 명백한 신약의 권위에 기초해야 한다.37 그 일을 통해 교회의 묵시적 구원을 위한 우리의 희망은 새롭게 되고 강화될 것이다. 신약 기자는 문헌상 구약에 대한 명확한 언급과 신학적 구조상 이스라엘의 구원사에 관한 명백한 유추에 의해 이스라엘 역사 안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그리스도의 백성들을 위한 미래의 구원에 적용하였음에 틀림이 없다. (54.1)
 세대주의와 표상학
 세대주의의 문자주의 해석학은 구약의 어떤 선별된 역사적 부분에는 기독교적 표상학을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세대주의는 이스라엘의 예언에 어떤 표상적 개념이 나타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이스라엘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교회와 맺은 그리스도의 새 언약에 표상학적으로 적용하는 것도 거절한다. 이것은 그들이 구약에서 표상학을 독단적이고 사변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세대주의자 체이퍼(Lewis S. Chafer)는 기독교 표상학을 받아들 이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유를 제시하였다. “그 자신이 그리스도의 표상인 어떤 사람의 혼인기사가 주어졌을 때, 그 혼인은 표상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합리적이다.” 38 (54.2)
 그래서 그는 신약에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을 표상하는 구약의 혼인 결합에 대한 많은 예들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 “모세는 구원자 그리스도의 표상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형제들을 떠나 광야에 있는 동안 이방인들로부터 선택하여 혼인한 그의 아내 십보라는 초림과 재림 사이에 교회로부터 불러냄을 상징한다”39고 하였다. (54.3)
 체이퍼는 어떻게 “교회는 구약에 전혀 예견되어 있지 않으며, 그 전 후에 나타나는 어떤 하나님의 목적과도 전혀 관계가 없다”40고 하는 자신의 논리를 동시에 붙잡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에 따르면, 표상은 거룩한 목적을 지닌 어떤 진리에 대한 예증”(6쪽, 강조 첨가)이다. 만일 하와, 리브가, 십보라, 아비가일, 룻, 그리고 술람미 여인이 모두 신약 교회에 대한 구약의 표상으로 인정된다면, 그리스도의 교회가 처음부터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과 “관계도 없고” “예견되지도 않았다”고 결론을 내리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더 나아가 여호와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그리스도의 새 언약의 백성의 표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합리적이 아닌가? 그러나 세대주의는 여기서 다시 원칙상 구약에 있는 독신들의 혼인 결합에는 적용되지 않는 근본적인 문자주의 해석학을 기억한다. “어떤 언약, 예언도 그 나라를 하늘의 시민권이나 그리스도와의 결혼 연합으로 이끌어 주지 않는다.” 41 (55.1)
 만일 하늘 도성에 대한 아브라함의 소망과 더 “좋은 것” 심지어 “하늘”나라에 대한 이스라엘의 소망을 고려한다면, 어떻게 이런 판단이 정당할 수 있는가(히 11:10, 16)? 그리스도는 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이 많은 이방인 신자들과 함께 하나님 나라(눅 13:28-29)나 천국(마 8:11; 히 11:39-40과 비교)을 받을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55.2)
 체이퍼가 이스라엘과 그리스도와의 혼인 결합을 거절한 것도 정당하지 않다. 무엇보다 먼저, 네 명의 구약 선지자들이 여호와와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혼인 결합의 용어로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호세아(호 2:7, 16, 19-20, 이사야(사 54:5-8), 예레미야(렘 3:8), 그리고 에스겔(겔 16장) 등 이다. 사도 바울은 혼인 모티프를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와의 관계에 적용하였다. (55.3)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고후 11:2)
(55.4)
 그러나 새 스코필드 주석 성경(NSRB)은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렸다. “이스라엘은 주님의 지상의 아내요(호 2:23), 교회는 어린양의 하늘 신부(계 19:7)이다” (920쪽). 이러한 견해는 신성이 다른 두 곳에서 다른 두 신부를 맞이한다고 본다. 그러나 하늘에서 지상으로 새 예루살렘이 내려오는 요한의 묵시(계 21:2)에 대하여서는 스코필드는 다음과 같이 주석하고 있다. “새 예루살렘은 각 시대 성도들을 위한 영원한 처소이며 하늘 도성을 향한 아브라함의 희망(히 11:10-16; 히 12:22-24 비교)을 성취한다 (1375 쪽).” 이러한 주석은 구속받은 이스라엘과 교회는 모두 한 장소에서 한 목자 아래 한 무리로 모이는 것을 인정한 것이 아닌가요 10:14-16사 56:8을 비교하라)? 영적 이스라엘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영적 이방 인의 유기적 연합은 새 예루살렘의 구조에 12지파와 12사도의 이름이 결 합된 것으로 표현되지 않았는가(계 21:12, 14)? (5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