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은 기독교의 성경이다. 구약성경도 기독교의 성경이지만 신약성경은 기독교에 더 특별한 의미와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안식일 신앙에 있어서도 신약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다. (90.1)
 안식일은 대다수의 그리스도인들의 통념 그대로 예수님과 사도들이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제정한 일요일로 대체된 고대의 유대적인 제도에 불과한 날인가? 아니면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의해서도 변경되지 않았고 변경될 수도 없는 하나님의 계명의 날이고 예수님의 날인가?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이 사실을 확인해야 할 것이다. (90.2)
 “안식일”(sabbata)이 뜻하는 희랍어 단어 삽바톤(sabbaton)은 희랍어 성경에 67회에 걸쳐 등장하고 있다. 희랍어 삽바톤의 복수인 삽바타(sabbata)는 아람어 “삽베타”(아labbeta)를 음역한 것으로서 아람어 “삽베타”는 안식일을 뜻하는 단수 명사의 강세를 나타내는 단어이다.1 그런데 이 단어의 희랍어 음역에서는 이 단어가 분명히 복수로 간주된 것 같다. 단수 삽바톤이 그것에서 연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수 “삽바톤”(sabbaton)은 히브리어 삽바드(shabbath)를 음역한 것이고, 복수 “삽바타”(sabbata)는 아람어 “삽베타”(Shabbeta)를 음역한 것이라는 설명도 있다.2 (90.3)
 사전 편찬자들은 신약 성경의 “삽바톤”(sabbaton)에 대하여 두 가지의 분명히 다른 의미를 인정하고 있다. 즉 안식일은 첫째로 주간의 일곱째 날(제칠일)을 뜻하며 둘째로 안식일은 안식일과 안식일의 사이인 한 주간 전체(영어로 Week)를 뜻한다는 것이다.3 이 두 번째의 뜻은 “삽바톤”이나 “삽바타”가 숫자와 함께 소유격으로 사용될 때 그렇다. 그 분명한 사례의 하나가 누가복음 18:12이다. 바리새인이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한다”고 자랑한 경우이다. 이때 “이레에 두 번씩”이라는 희랍어 본문이 “디스 투 삽바투”(dis tou sabbatou)이다. 이 본문은 분명히 “나는 안식일에 두 번씩 금식한다”는 뜻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월요일과 목요일에 금식하는 습관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신약성경의 일곱구절에서 한 주간의 첫째 날은 “삽바톤(sabbaton)”의 복수 형태의 소유격에 “하나”란 숫자를 합하여 표시되고있다(마 28:1; 막 16:9; 눅 24:1; 요 20:1, 19; 행 20:7; 고전 16:2). 한 주간이란 뜻의 일반적인 희랍어 단어는 “헵도마스”(hebdomas)인데 이 단어는 구약성경의 희랍어 번역인 70 인역에는 사용되었으나 신약성경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90.4)
 주간의 날들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된 관용어구는 희랍어로 번역된 시편의 몇몇 구절의 희랍어 제목들 속에 나타나고 있다. 시편 24편(70인역에는 23편)은 “주간의 첫째 날을 위하여”“테스 미아스 삽바톤”(tes mias Sabbaton)이라 표시되었고 시편 48편(70인역에서는 47편)은 “주간의 둘째 날을 위하여”“듀테라 삽바투” (deutera sabbatou)라고 표시되어 있으며 시편 94편(70인역에는 93편)은 “주간의 넷째 날(수요일)을 위하여”“태트라디 삽바톤”(tetradi Sabbaton)이라 표시하였다. 즉 안식일 후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이 란 뜻이다. 그러나 금요일의 경우에는 프로삽바톤(Prosabbaton) 즉 안식일의 전날로 알려졌다. 이 제목에 의하면 시편 92편(70인역에는 91편)은 금요일의 성전 예식에서 사용되었다. (91.1)
 신약성경에서 삽바톤이 안식일을 뜻하는 경우의 40회는 단수 형태로 그리고 19회는 복수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삽바톤이 복수형 태로 등장하는 대부분의 경우는 문맥으로 볼 때 단수의 뜻을 가지고 있다(마 12:1, 5, 10, 11, 12; 28:1; 막 1:21; 2:23, 24; 3:2, 4; 눅 4:16; 6:2; 13:10; 행 13:14; 16:13). 사실상 신약성경의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구절중에 “삽바타”가 복수를 의미한 유일한 경우는 사도행전 17:2절이다. “바울이 자기의 규례대로 저희에게로 들어가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강론했다”는 구절이다. 삽바타에 셋이란 숫자를 합해서 사용되었다. 그런데 영어 “개혁 표준 번역”(R.S.V) 성경에는 이 구절의 “삽바타”를 아예 주간(Weeks)으로 번역하였다. “바울이 세 주간에 걸쳐 성경을 가르쳤다”는 것이다. “삽바톤”이 분명히 안식일을 뜻하는 신약성경 구절들에서는 한 안식일을 뜻하면서 일관성 없이 단수의 형태로도 또 복수의 형태로도 사용되고 있다.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먹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마태는 12:1절에서는 복수로 그리고 그 다음 구절인 12:2절에서는 단수로 사용했다. 예수님께서 한쪽 손 마른 남자를 치료해주신 이야기를 전하는 마태복음 12:10-12절과 마가복음 3:2-4절에서는 안식일이란 단어가 복수의 형태로 사용되고 있는데 같은 이야기인 누가복음 6:6-9절에는 단수의 형태의 “삽바톤”이 사용되고 있다. (91.2)
 70인역에서도 히브리 원어는 단수인데도 불구하고 희랍으로 옮길 때 분명히 단수의 의미를 복수형태로 번역된 곳들이 있다(출 16:25, 26; 20:8, 10; 35:3; 민 15:32; 신 5:12). 수전절(요 10:22), 무교절(막 14:1), 혼인잔치(마 22:2), 생일잔치(막 6:21) 같은 축제일들에는 희랍어 복수를 사용하는 관례가 안식일의 경우에도 나타난 것일지 모른다.4 (91.3)
 복음서에 나타난 안식일
 희랍어 신약 성경에 “삽바톤”이 나타내는 경우는 모두 67회에 이른다. 그 중에서 56회가 복음서에 나타나 있다. 마태복음에 11회, 마가복음에 12회, 누가복음에 20회, 그리고 요한복음에 13회이다. 이 중에 여섯 번은 “삽바톤”이 주간을 뜻하고 있으며 다섯 번은 주님이 부활하신 “주간의 첫째 날”을 말하고 있다. 나머지 50회는 주간의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뜻하고 있다. (91.4)
 나사렛에서의 안식일 봉사. 누가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자신의 갈릴리 봉사를 시작하기 직전에 자신의 고향 마을인 나사렛을 방문하셨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시었다”(눅 4:16). 나사렛은 요셉과 마리아의 고향 마을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이집트로 피난 갔다가 갈릴리의 이 산골 마을로 돌아왔다(마 2:23). 그래서 나사렛은 그들의 “본 동네”라고 일컬어진 것이다(눅 2:39). 나사렛은 예수님이 어려서 부터 30세쯤 되기까지 사셨던(눅 3:23) 고향 마을이었다. 예수님이 공생애를 시작하고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왔을 때, 그때까지 여러 해 동안 예수님을 잘 알고 지냈던 이 마을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나타낸 적대적인 행동들은 여러 가지로 흥미로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92.1)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의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눅 4:16). “자기의 규례대로”란 구절의 뜻에 대하여 성경 주석자들은 대체로 두 가지로 해석하고 있다. 일부는 앞의 15절“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고 하셨듯이 예수님이 유대 회당에 가서 가르치던 “자기의 규례”라고 해석한다(눅 4:15). 그의 규례(습관)는 가르치는 교사로서의 규례라는 것이다. 그가 안식일에 교사로서의 자신의 규례를 좇아 회당에 들어가셨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 구절을 예수님께서 나사렛에서 살아오신 여러 해들에 대한 언급으로 이해한다. 그가 나사렛에 살던 시절에는 매 안식일에 회당에 참석하는 것이 그의 규례(습관)였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회당에 출석하는 것이 그의 평생의 습관이었다는 것이다. (92.2)
 어느쪽 주장이 옳건 간에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이 신실한 이스라엘 사람으로서 안식일의 준수자였다는 것이다. 헌신적인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이 안식일을 지켰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마치 자유의 이름으로 안식일을 철폐시킨 대 혁신가로 묘사하는 것은 예수님을 계몽주의 사상가의 모습으로 고쳐그리는 행위와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누가복음의 이 사건에서 예수님은 회당에서 일어서서 이사야 61장을 읽으셨다. 그리고 그는 자리에 앉으시고 이 구절을 자신과 자신의 사명을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하셨다. 예수님의 활동은 이사야 61장“야훼의 종”이라는 표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성경 말씀의 예언이 “하나님의 종”인 자신의 활동으로 성취되고 있다고 선언하셨다. (92.3)
 안식일 논쟁.신약 성경의 네 복음서는 모두 안식일의 주제가 예수님과 유대인들이 서로 충돌하고 갈등을 빚은 중요한 쟁점의 하나였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어찌하여 이 같은 안식일 논쟁이 발생하였으며 도대체 그들은 안식일의 무엇에 대해 논쟁하였는가? 그리고 어찌하여 네 복음서의 기자들은 안식일 논쟁의 기사를 그토록 중요시하여 신생 그리스도교회를 위하여 이 기사들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는가? (92.4)
 이 논쟁들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논쟁의 쟁점은 안식일을 지켜야 하느냐 말아야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예수님이 하나의 제도로서 안식일을 불신했다고 생각할 이유가 전혀 없다. 예수님 자신이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함이로다”라고 확언하셨다(마 5:17). (93.1)
 그러면 무엇이 문제였는가? 분명하게 그것은 안식일을 지키는 방식의 문제였다. 문제는 안식일을 지켜야만 하느냐 하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어떻게 지켜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바리새인들은 랍비들이 여러 대에 걸쳐 발전시켜 온 구전(口傳) 규칙들에 따라 안식일을 지켜야 한다고 고집하였다. 예수님은 제도로서의 안식일을 배척하지 않았다. 그가 배척한 것은 안식일 준수에 대한 장로들의 유전(전통)이었다. 그는 랍비들이 만든 안식일 준수 규칙들을 거부하셨던 것이다. 사람들이 만든 규칙들 때문에 안식일은 본래의 의도대로 사람에게 축복이 된 것이 아니라 짐이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만약 장로들의 유전이 어떤 것들인지를 알고자 한다면 미쉬나(Mishnah:유대교의 구전 경전인 탈무드의 제1부를 구성하거 있는 부분)의 안식일 관계 규정들을 보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예수님은 이 같은 구전 전통들에 대하여 고의적으로 도전하셨다. 예수님은 인간에게 무거운 짐이 되어버린 인간의 전통적인 규칙들의 멍에로부터 안식일을 해방시켜 안식일을 영적인 자유와 기쁨을 주는 날로 환원시키고자 하였다. (93.2)
 복음서의 기자들은 예수님의 안식일 논쟁을 새로 출발한 그리스도교회에게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보았기 때문에 이 사건을 복음서에 포함시켰다. 교회는 장로들의 유전적인 규칙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지 말아야 했다.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의 모범을 따라 안식일을 친절한 봉사의 날로 지켜야 했다. 안식일을 율법주의적인 요구사항의 하나로 지킨다면 하나님이 안식일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그런 축복을 누릴 수 없다. 교회는 이처럼 제도로서의 안식일을 배척한 것이 아니라 안식일을 준수하기 위하여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여러 가지 비인도적인 규칙들을 배척했던 것이다. (93.3)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문제로 인한 안식일 논쟁. 최초의 안식일 논쟁이라 할 수 있는 이 사건은 세 개의 공관 복음에 모두 기록되었다(마 12:1-8; 막 2:23-28; 눅 6:1-5). 이 사건의 쟁점은 거룩한 안식일에 밀 이삭을 잘라먹은 제자들의 행위가 적법한 것이냐 하는 문제였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고 있었다. 제자들은 배가 고팠고(마 12:1), 그래서 그들은 약간의 밀 이삭을 잘라서 “손으로 비벼”(눅 6:1)먹었다. 바리새인들은 이것을 불법한 행위로 비난하였다. 제자들이 다른 사람의 밭에서 밀 이삭을 자른 것은 논란의 대상이 아니었다. 이미 구약성경이 그러한 일에 대하여 허용적인 규정을 밝혔기 때문이다.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들어 갈 때에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가하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 밭에 낫을 대지 말지니라”(신 23:25).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일을 했다고 하여 그들의 행위를 불법으로 낙인 찍었다. (93.4)
 구약성경은 안식일에 농사일도 금지했다. “너는 엿새동안 일하고 제칠일에는 쉴지니 밭갈 때나 거둘 때도 쉴지니” (출 34:21)라 하였다. 미쉬나(Mishna)는 안식일에 금지된 일의 중요한 종류를 39개로 나누어 규정하였다.5 이 규정들 속에는 수확, 타작, 곡식 까부르기, 맷돌 돌리기 등이 포함되어있다.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자른 것을 수확 행위로, 손으로 비빈 것을 타작으로, 그리고 입 바람으로 밀 껍질을 불은 것을 까부르기로 해석한 것이 분명하다. 즉 제자들은 비록 작은 양의 밀 이삭을 다룬 것이었지만 분명히 안식일에 일을 하였다는 것이다. 미쉬나는 명확하게 언명하기를 “아주 작은 분량의 밀 이삭을 취한”사람도 죄를 지은 것이라 하였다.6 (93.5)
 어떤 서기관들은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 선생이 책임을 져야한다고 주장했다.7 그래서 이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제자들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추궁했던 것이다. “보시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막 2:24). 마태는 바리새인들의 이 도전을 질문 형식으로가 아니라 서술문의 형식으로 “보시오, 당신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다”(마 12:12)라고 기록하였다. 그런데 누가는 바리새인들이 직접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질문한 것으로 기록했다. “어찌하여 하지 못할 일을 하느냐” (눅 6:2). (94.1)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들의 배고픔을 해결한 제자들의 행위에는 죄가 없다고 선언하셨다(마 12:7). 예수님은 제자들을 변호하기 위하여 제일 먼저 다윗의 사례를 인용하였다.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핍절하여 시장할 때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막 2:25).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도망했을 때 대제사장 아히멜렉에게로 갔다(막 2:26에는 제사장 아비아달이라고 되어있으나 삼상 21:1, 2에는 제사장이 아히멜렉인 것으로 나오며 아히멜렉의 사후에 그 아들 아비아달이 그 자리를 계승했다). 그리고 그가 시장하여 무엇이든지 먹을 것을 달라고 아히멜렉에게 요청하자 제사장들만 먹게 된 “거룩한 떡”을 주어 그 함께 한 자들과 먹게 하였다(삼상 21:1-6). 여기에서 핵심은 다윗이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사실이다. 만약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과 배고픈 그의 일행이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거룩한 떡을 먹은 것이 정당한 일이었다면 다윗의 자손의 제자들이 서기관들에 의해 고안된 거룩한 안식일의 규칙들을 어긴 것쯤은 더더욱 정당한 것이 아니겠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윗이 그 일행과 함께 먹은 떡은 성소의 떡상 위에 있는 “여호와 앞의” 떡이 아니라 “더운 떡으로” 교체하기 위해 “물려 낸” 떡이었다(삼상 21:6). 성전에서 “더운 떡”으로 식은 떡을 교체하는 날은 안식일이다. 일부 랍비들은 다윗이 떡을 받아먹은 날이 안식일이라고 주장한다.8 성경은 그 날이 주간의 어느 날인 지에 대해 말하고 있지 않지만 만약 진실로 그 날이 안식일이었다면 다윗의 사례는 더더욱 적절하다고 할 수 있다. (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