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히브리서 연구) 제 9 장 양심을 온전하게 함
 “시므이가 저주하는 가운데 이와 같이 말하니라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 16:7).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 왕을 저주하리이까 청컨대 나로 건너가서 저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왕이 가로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저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저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아비새와 모든 신복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날 그 저주 까닭에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삼하 16:9~12). (191.2)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 년 일 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히 9:7) (191.3)
 [구약의 대속죄일의“속죄의 날”(yom hakkippurim)이 복수로 쓰여 위대함이 강조됨]1 (191.4)
 “칠월 십일은 속죄(복수 형태)일이니 너희에게 성회라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며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고 이 날에는 아무 일도 하지 말 것은 너희를 위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 속죄할 속죄(복수 형태)일이 됨이니라”(레 23:27~28) (191.5)
 대속죄일은 히브리어로 ‘욤 하킵푸림’으로 문자적으로는 ‘속죄의 날’이라는 뜻이다. 여기에 사용된 ‘욤’(yom)은 날을 뜻하고, ‘키푸림’(kippurim)은 ‘속죄들’을 뜻한다. 히브리어에서 때때로 복수형을 취할 때는 절대적이고 영원한 것을 강조한다. 대속죄일은 ‘절대적인 날’‘위대한 날’로 지켜져야 하였다. 복수 형태를 사용함으로 의미가 강조된 실례들로는 ‘엘로힘’(하나님), ‘샤먀임(하늘)’, ‘코데쉼’(성소는 코데쉬, 지성소는 코데쉼)과 같은 것들을 들 수 있다.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은 우리가 죄 용서와 죄의 도말을 받는 것이다. (192.1)
 대속죄일의 속죄가 복수형으로 사용된 또 다른 이유는 이날의 속죄가 ‘지성소’‘회막’‘단’에서 공동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지성소를 위하여 속죄하며 회막을 위하여 속죄하고 또 제사장들과 백성의 회중을 위하여 속죄할지니”(레 16:33). (192.2)
 또한 이 날에는 성소의 향단 뿔에도 “속죄”의 피가 뿌려짐으로 향단을 정결하게 하였는데 이곳의 “속죄” 또한 ‘일반명사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그 위대함과 영원함이 강조되었다. “아론이 일 년 일 차씩 이 향단 뿔을 위하여 속죄하되 속죄2(히, 키프림, 복수 형태)제의 피로 일 년 일 차씩 대대로 속죄 할 지니라 이 단은 여호와께 지극히 거룩하니라”(출 30:10). (192.3)
 “성령이 이로써 보이신 것은 첫 장막이 서 있을 동안에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히 9:8) (192.4)
성소에 들어가는 길
 사람이 죄로부터 구원받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소에 들어가는 길”이다. 이 길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9:25)는 길이다. 이 길에 있을 때만 사람이 완전히 구원받는 것이 가능하다. (192.5)
 첫 장막 아래서는 오직 제사장 외에는 성소에 들어갈 수 없었다. 지성소의 무거운 휘장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 언약의 성소에서는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속죄의 공로를 힘입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렸다. (192.6)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것이라
 두 가지 뜻으로 번역되었다. 첫째,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KJV; ASV; YLT; 현대인의 성경), 둘째, 다소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아직 열리지 않은 것이라’(NIV; NASV; RSV; NRSV; NLT)는 뜻으로 번역되었다. (193.1)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히 9:9) (193.2)
 9장의 가장 핵심이 되는 아주 중요한 말을 보라!
 예물과 제사를 드리는 목적은양심을 온전하게 하는 것(make perfect the conscience)이었다. 레위 제사장직은 사람의 양심을 온전하게 할 수 없었다(7:11). 또한 율법 자체도 아무것도 온전하게 하지 못했다(7:19). 그러나 새로운 제사장직 아래서 그리스도의 피의 효능은 ‘양심을 깨끗하게 한다’(9:14, clear the conscience). (193.3)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히 9:10) (193.4)
먹고 마시는 것
 소제와 전제를 가리키는 것이다(출 29:40-41; 레 2:1-15, 23:13, 18, 37; 민 6:15). (19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