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속의 드라마 성소 제 10 장 죄로부터 정결하게 되는 대속죄일의 경험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는 의의 표준이나 완전의 목표에 미치지 못한 것이다. 마치 화살이 과녁에 도달하기 전에 떨어진 것과 같다. 그 실례들은 다음과 같다. (220.5)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롬 14:23) (220.6)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 4:17) (221.1)
 교훈: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하는 모든 것은 죄이다. 믿음, 선행, 품성에 있어서 최선의 것이 아닌 것은 죄가 될 수 있다. 이웃에게 최선의 것을 다하지 못한 봉사는 죄가 될 수 있다. 이외에 불순종, 하나님께 대한 거역 모든 것이 포함된다. (221.2)
 2) 모든 죄는 용서함을 받을 수 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의 사라짐같이, 네 죄(하타아)를 안개의 사라짐같이 도말(마하, 씻다, 닦아내다)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 하였음이니라”(사 44:22). (221.3)
 “만일 하루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얻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눅 17:4). (221.4)
 3) 죄(하타아)는 마음에서 평안을 빼앗아 간다. 죄인에게는 평안함이 없다.
 다윗은 “나의 죄(핫타아)로 인하여 평안함이 없나이다”(시 38:3)라고 고백하였다. 그는 계속해서 “나의 죄악(아온)을 말갛게 씻기시며 나의 죄(하타아)깨끗이(타헤르) 제하소서”(시 51:2)라고 기도하였다. 다윗은 죄악(아온)과 죄(하타아)를 씻어 깨끗(타테르, 정결하다) 하게 되는 경험을 갖기를 원했다. 다윗은 범죄 후에 자신의 경험 속에 대속죄일의 정결하게 하는 경험이 자신에게 이르러 오기를 간절히 기도하였다. (221.5)
 다윗은 자신의 내면의 죄의 개념 — 허물(페샤), 죄(하타아), 죄악(아온), — 을 대속죄일의 성소정결(타헤르)의 경험과 일치시켰다. (221.6)
 허물(페샤)의 사함을 얻고 그 죄(하타아)가리움(카사)4을 받은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아온)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시 32:1~2). (221.7)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페샤)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하타아)를 아뢰고 내 죄악(아온)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하타아)악(아온)을 사하셨나이다”(시 32:5). 이것은 다윗의 회개가 얼마나 철저하고 실제적인 회개였는지를 깨닫게 해준다. (222.1)
 4) 죄에 대한 무지와 급한 성벽은 죄를 쉽게 범하게 한다.
 “지식 없는 소원은 선치 못하고 발이 급한 사람은 그릇(하타아)하느니라”(잠 19:2). 하나님과 멀어진 인생은 선한 지식이 없어 죄를 깨닫지 못하는 상태에 빠져 있을 수 있다. 또한 성격이 급한 사람은 죄를 짓기가 쉽다. (222.2)
 5) 죄(하타아)는 속죄제(sin - offering)로 표현되었다.
 레 4~6장‘죄’‘속죄제’를 나타내는 말(어원)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속죄제를 가져오는 것은 죄를 가져오는 것과 같았다. 이것은 회개 없는 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한 속죄제의 실례들은 모든 속죄제가 필요한 것은 죄를“범하”(레 4:2, 3, 13, 22, 27, 28)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책이 생기고 이것으로 인하여 회개하고 속죄제(죄)를 가져왔던 것이다. 레위기 4장은 구체적인 실례들을 든다. 어떤 신분(계층)의 사람이든지, 그것이 부주의나 무관심으로 말미암는 죄이든지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죄(속죄제)를 가져오라는 것이다. 이장에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는가? 개인의 죄책은 죄를 지어서 발생하는 것이지 인간 본성 자체가 형벌에 놓여있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모든 형벌은 그리스도가 지셨다. 그러므로 회개는 지은 죄에 대해 회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사람을 속량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노력과 연합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하실 수 있었다. 사람은 죄로 인하여 매우 타락하였으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순결하시고 선한 본성을 가지신 분과 조화될 수 없었다. 그러나 율법의 정죄로부터 사람을 속량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노력과 연합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하실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녀’(요일 3:2)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부조, 64). (222.3)
 “사람은 죄로 인하여 매우 타락하였으므로 자신의 힘으로는 순결하시고 선한 본성을 가지신 분과 조화될 수 없었다. 그러나 율법의 정죄로부터 사람을 속량하신 후에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노력과 연합하도록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하실 수 있었다. 이리하여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은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자녀’(요일 3:2)가 될 수 있을 것이었다.”5 (223.1)
 6) 인간의 연약성과 취약성은 그 자체가 죄가 되지 않는다.
 인류는 아담이 지은 죄의 결과인 육체적인 죽음과 죗된 환경, 타락한 본성을 물려받았다. 그러므로 타락한 본성 자체는 죄가 되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육신 속에 있는 타고난 악의 성향(bent to evil, or inclination to evil), 타고난 부정함(bedness), 타고난 손상된 상태(corruption), 연약함(weakness)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구주를 선택하지 않으면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속절없는 상태이다. 죄를 선택할 때 죄책(guilt)과 유죄판결(condemnation)을 받게 된다. 오직 둘째 사망은 자신이 죄를 선택한 결과로 주어진다(겔 18:20). (223.2)
 “우리는 하나님을 죄인을 벌주시려고 대기하고 계신 분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죄인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벌을 불러온다. 그 자신의 행동들은 확실한 결과를 가져오는 일련의 환경을 조성한다. 죄를 범하는 행동마다 죄인 자신에게 반응을 일으키고 그 속에 역사하여 그 품성을 바꾸어 놓고 그가 다시 죄를 범하기 쉽게 만들어 놓는다. 사람은 죄를 선택함으로써 자신들을 하나님에게서 분리시키고 축복의 통로를 스스로 잘라버린다. 그 확실한 결과는 파멸과 죽음이다.”6 (2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