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찾을 수 있다! 사실상, 신약 전체를 통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에서 이미 이루어진 것과 아직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 사이의 어떤 균형을 발견한다. 일찍이 복음서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예수님의 교훈에서 이 개념을 직면한다. 예수님의 언행 속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관통(貫通)되었다—그 나라가 임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is)”(마 5:3).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has come)”(마 12:28). (104.4)
 그러나 동시에 천국의 완전한 성취는 아직도 미래로 남아 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10);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마 25:34). (104.5)
 우리는 자주 그 나라를 두 가지 측면에서, 곧 전자를 “은혜의 왕국”으로, 후자를 “영광의 왕국”으로 구분한다. 이 용어들이 그 자체로서는 정확한 반면, 단순히 “그 나라”로 칭하는 성경에서 온 것은 아니다. (104.6)
 신약의 모든 기록들은 왕국에 관한 언어가 그려내는 “이미(already)”“아직 아니(not yet)” 사이의 그러한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예수께서 오심으로써 무엇인가(something)가 일어났다! 구원이 이르렀다. 은혜가 풍성하고, 성령이 부어진 바 되었고, 남녀들이 용서를 받았으며, 지금도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는 자들의 마음을 통치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적의 완전한 성취는 아직도 미래에 남아 있다.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에만이 모든 무릎이 꿇고 그를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시인할 것이다. 오직 그 때에만 창조가 그 원래의 조화대로 회복될 것이다. 오직 그 때에만 하나님의 백성들이 시험, 고통, 그리고 사망에서 구원될 것이다. 오직 그 때에만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그 머리를 상하게 한 사단이 그의 최후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갈바리 상에서 예수께서는 선악간의 긴 세월의 쟁투에서 결정적 전투를 승리로 이끄셨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된다. 그러나 전쟁은 곧 끝날 것이다. (105.1)
 마찬가지로 히브리서도 “이미”“아직 아니”의 진로(進路)를 조종하고 있다. 우리는 서언(序言)(1:1-4)에서 두 요소를 보았다. 하나님의 절정의 말씀이 죄를 결정적으로 정결케 하신 아들 안에서 발해졌다. 하지만 동시에 아들은 하늘의 위엄의 우편에서 우주의 통치권을 완전히 취하실 때를 기다리신다. (105.2)
 히브리서 전체를 통하여 이 종말론적 긴장—“이미”“아직 아니”—이 토론의 틀을 형성하고 있다. 바울이 우리의 크신 대제사장이시며 희생 제물이신 예수님에 대하여 논증할 때, 그는 예수께서 심지어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이미 행하신 것과 마련해 놓으신 것을 강조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아직도 이 땅에서 목표인 하늘로 가는 도상(途上)의 순례자와 나그네로서 소망 중에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즉, 복음이 우리에게 사실과 약속으로 이르러 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4:1-11의 안식도 그와 같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지금도 그 안식에 들어갈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재림 때에 가서만이 완전한 안식을 경험할 것이다. (105.3)
 우리는 이제 이 안식이 수반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더욱 명백히 볼 수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구원의 축복이며, 우리는 그를 믿음으로 이 축복에 들어간다. 이것은 이미 그리스도인의 현실이요 우리의 영원한 본향에서 하나님과 더 깊은 차원에서 누리게 될 기쁨이다. (106.1)
 안식과 안식일
 안식일에 대한 저자의 언급은 안식에 대한 그의 의미에 빛을 더 해 준다. 그는 4:4에서 하나님의 안식에 대한 사상을 최초의 안식일(창 2:2)에서 이끌어 낸다. 그리고 그 사상이 4:9로 이어진다—“그런즉 안식할 때(Sabbath—rest)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4:9). 3:6b-4:11을 통하여, 그는 사막의 방랑 족속들의 구약 목표를 의미했건 하나님의 새 백성을 의미했건 간에, 안식(rest)을 의미하는 동일한 단어—카타파우시스(katapausis)—를 사용했다. 그러나 4:9에서 우리는 신약이나 1세기 문헌의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단어를 발견한다. 즉, 삽바티스모스(sabbatismos), “안식일 안식(Sabbath rest),” “안식일 같은 안식(Sabbath— like rest),” “안식일스러운 안식(Sabbath—ish rest).” (106.2)
 나는 사도가 3:6b에서 시작하여 4:9, 10에서 절정을 이루는 논증을 매듭짓기 위하여 이 말을 만들었다[造語]고 생각한다. 그가 4:10에서 그 단어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보아, 삽바티스모스카타파우시스의 동의어(同義語)로 간주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가 말하고 있는 안식(rest)을 안식일(Sabbath)과 연결시키고 싶어한다. (106.3)
 유대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독자들은 안식과 안식일의 연결을 쉽사리 분별하였을 것이다. 랍비는 안식일은 일을 하지 않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고 가르쳤다. 그것은 메시야 시대를 미리 맛보는 것이었다. 그처럼 하나님이 그리스도인들에게 약속하시는 안식은 지금 들어갈 수 있으나, 그것의 완전한 실현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 하나님의 면전에서이다. (106.4)
 4:1-11에 대한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우리는 안식일 준수자들에게 지대한 관심사인 여러 문제들을 보다 세밀히 조사해 볼 수 있다. (107.1)
 첫째, 본문은 일요일 준수에 대한 아무런 보증을 하지 않는다. 4:8“다른 날”은 안식일이나 일요일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것은 4:7“오늘날”에 대한 논의와 부합한다. 저자의 요점은, 다윗의 때에 시 95:7-11에서 그것이 반복됨으로써 확실히 증거되듯이, 여호수아 때에 그의 백성에게 하신 하나님의 초청이 실현되지 않은 채로 있다는 것이다. (107.2)
 그렇지만, 아마도 4:1-11은 안식과 안식일을 동일시함으로써 안식일 준수를 위한 직접적인 호소를 하는 것 같다. 꼭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 안식일은 그 안식에 대한 하나의 예증이다. 그것은 그 안식의 (質)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안식일스러운 안식(Sabbath-ish rest)이다. 우리는 안식일이 그 안식의 일부분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안식 그 자체는 그보다 훨씬 더한 것이다. 그것은, 그 완성이 만물의 끝인 재림 때에 있게 될, 그리스도인들이 1주일에 7일간 내내 누릴 수 있는 경험이다. (107.3)
 나의 판단으로는, 히브리서 4:1-11이 신약 전체에서 제7일 안식일을 위한 가장 강력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안식일을 준수하라는 요청이나 직접적인 호소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직접적인 호소라면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느 날을 준수해야 한다고 논쟁하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히브리서는 안식일을 간접적으로 소개하되, 방어적인 태도가 아니라 매우 긍정적인 방법으로 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안식은 안식일의 (quality)을 지니고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은 안식일과 같은(like) 것이다. (107.4)
 만일 저자가 그의 논증의 관건인 4:9-10에서 안식과 안식일을 연계시키고 있다면, 두 가지의 결론은 피할 수 없을 것 같다. 첫째, 그와 그의 독자들에게 있어서 안식일은 긍정적인 의미를 지녔다. 만일 그들이 안식일을 부담, 즉 속박의 종교의 마지막 유물로 생각했다면, 이 중대한 순간에 저자는 그의 청중을 잃어 버렸을 것이다. 둘째, 그와 그의 청중은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다. 그들은 다른 어떤 날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안식일 대(對) 일요일의 장단점에 대하여 논쟁을 벌인 것이 분명히 아니다! 그러한 맥락에서만이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안식을 삽바티스모스(sabbatismos)라고 부를 수 있었다. (107.5)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에 비추어, 우리는 4:10에서 자신의 일로부터 안식한다고 한 사도의 진술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다. 이러한 유추(類推)의 요점은 간단히 말해서 중지(中止)한다는 사상이다-하나님이 안식일에 그의 일(work)을 쉬신 것같이, 우리도 그의 안식에 들어갈 때 우리의 일을 쉬는 것이다. 그 일(work)이란 믿음의 길과 반대되는 것이다. 3:6a에서 시작한 토론이 보여주듯이, 그 일은 반역과 불순종과 불충성을 초래하는 죄로 말미암아 강퍅케 된 악하고 불신하는 마음이다. 고대 이스라엘을 특징지었던 이러한 길과 대조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믿음의 길,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와 참을성을 가지고 전진하는 길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108.1)
 그러므로 히브리서 4:10은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와 행함으로 말미암는 의의 체계를 대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다가 쉬는 일(work)은 하나님의 창조 행위와 상응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본문은 언약의 땅(Promised Land)을 향하여 여행하는 순례자를 위한 두 길—믿음이냐, 아니면 불신이냐?—을 요약한다. (108.2)
 4:1-11의 토론을 결론지을 때, 우리는 두 가지 문제를 주시해야 한다. 첫째는 「제임스왕역」과 친숙한 학생들에게 이미 일어나 있을 것이다. 4:8에서 「새국제역」은 “여호수아(Joshua)”로 번역하는 반면에, 「제임스왕역」은 “예수(Jesus)”로 번역한다. 여기서는 확실히 「새국제역」이 맞다. 사도는 3:6b-19에서 방황하는 족속들의 지도자를 가리키고 있다. (108.3)
 둘째 문제는 성격상 실제적인 것으로서, 우리 시대의 삶에 대하여 사도가 가진 사상들의 가치를 가리켜 보인다. 분주하고도 민감한 활동, 근심과 스트레스에 싸인 우리에게 있어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안식—근심의 와중에서 지금 들어가야 할 안식—에 대한 약속은 호소력을 지니고 있다. 예수님도 이와 흡사한 초청을 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이 약속은 우리 모두에게 힘있게 말하고 있다. (10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