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는 해독(解讀)하는 데 주의 깊고도 면밀한 생각을 요구하는 자세히 궁구(窮究)된 문단(4:1-11)을 통하여 그의 호소를 발전시키고 있다. 우리가 각 진술을 쉽게 이해할 수 있으나 각 진술이 다음의 진술과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가 이 문단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명상하면서 충분한 시간을 보낸다면, 그것의 의미가 밝혀질 것이며, 우리는 풍성한 보상을 얻게 될 것이다. (100.9)
 안식(rest)은 이 구절들 전체에서 열쇠가 되는 단어이다. 우리는 이 명사를 여덟 번 발견한다(1, 3, 5, 6, 8, 10, 11절). 매 경우에 안식이라는 말은 헬라어 카타파우시스(katapausis)에서 나온 말이며, 우리는 이 동일한 단어를 3:6b-19에서 보았다. 우리는 4:9에서 새로운 단어—안식일 준수자들에게 큰 관심사들 중의 하나인—삽바티스모스(sabbatismos)를 발견한다. 그것이 「새국제역」에서는 “안식일—안식 (Sabbath—rest)”으로 번역되어 있다. 동사 형태의 안식하다(rest)도 두 번 나온다(4, 10절). 이 두 경우들에 있어서 안식하였다(rested)는 말은 카타파우시스에 해당한다. (101.1)
 우리는 4:1-11에 대하여 다행한 해석이 있음을 볼 수 있다. 어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인들은 이 구절을 제7일 안식일에 대한 특별한 명령을 보는 반면, 일요일을 지키는 어떤 이들은 제일일 준수를 위한 논증으로 보았다! (101.2)
 우리의 히브리서 연구에서 일찍이 착안된 논점이 특별한 뜻과 함께 여기에 적용된다. 즉, 저자로 하여금 그가 의미하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내게 하라는 것이다. 그의 논리를 단계적으로 따르라. 그리하면 독특한 진술의 의미가 명백해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문맥을 올바르게 생각하지 않고 이런 저런 논점에 주의를 기울인다면, 우리는 저자의 사상들을 뒤틀리게 할 것이다. 성령으로 감동된 그의 사상은 주의 깊고도 논리적인 단계를 거쳐 그 말씀을 서두르지 않고 연구하는 학생에게 드러나게 될 것이다. (101.3)
 그러므로 우리가 안식에 대한 난해한 문제들을 답하려고 애쓰기 전에, 히브리서 4:1-11의 논증을 단계적으로 추적해 보자. 거기에는 일곱 개의 단계가 있다: (101.4)
 1. 오직 두 그룹의 사람들만이 등장하고 있다—모세의 백성들과 예수님의 백성들. 광야에서 방황하는 하나님의 백성들로부터 사도는 중간 세대들을 침묵으로 지나치고 그가 기록하고 있는 제1세기의 그리스도인들에게로 뛰어넘고 있다. 그에게 있어 성경은, 지나간 세기들에게서 분명한,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102.1)
 2. 그는 안식의 약속이 아직 남아 있다고 논증하고 있다(1절). 시 95:7-11은 이 논증의 근거를 마련해 주고 있다. 마음을 강퍅케 함과 반역에 대한 경고는 하나님의 약속이 아직 실현되지 않았음을 보이고 있다. (102.2)
 3. 그러나 안식에 들어갈 약속이 마침내 성취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 필연성을 강조하면서, “거기 들어갈 약속이 남아 있”다(6절)고 말한다. 성경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만약 처음 약속된 때에 일어나지 않는다 할지라도, 미래의 어느 때에 나타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목적을 성취한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께 텅 빈 채로 돌아가지 않는다. (102.3)
 4.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그 어떤 것이든 사람 때문이지 하나님 때문이 아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공하신 안식은 이미 거기에 있었다. 암시적으로, 만일 그리스도인이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문제는 그에게 있는 것이지 하나님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안식은 하나님 자신의 안식이 보여주듯이(3-5절), 창조 직후부터 언제나 얻을 수 있었다. (102.4)
 5. 광야 세대가 안식을 얻을 수 있었고 하나님께로부터 좋은 소식을 받았을지라도, 그들이 실패한 것은 불신과 불순종에 빠져들었기 때문이다. 유사한 양태(樣態)에서, 그리스도인은 경계해야 하며 이스라엘의 경험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102.5)
 6. 그리스도인도 아직 남아 있는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그들—1세기의 하나님의 백성—과 우리는 마음을 강퍅케 하는 일을 피하고 대신 믿음으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면서(3, 6, 9-11절), “오늘날”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 (102.6)
 7. 안식의 개념이 의미의 전위(轉位)를 갖는다. 3:6b-19에서의 안식은 단순히 가나안 땅에서의 원수들과 시련들로부터의 안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4:1-11은, 시편 95:7-11에 근거한, 아직도 획득되어야 할 안식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사도는 시편 95:7-11에서 이미 약속되고 독자들이 그것을 향하여 감내해야 할 그 어떤 것, 곧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안식의 영적 경험을 말하고 있다. (102.7)
 우리는 이 모든 논리적 단계의 배후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본다. 하나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것은 성취될 것이며,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그의 백성의 일부가 목표를 실현할 것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직접적으로, 즉시로 귀에 대고 말한다. 세기들을 걸치면서 오늘날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이라는 말씀으로 인하여, 그 말씀이 하나님의 목표에 도달하라고 남녀들에게 처음으로 요청하였을 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그것은 실제적이고도 중요한 것이다. (103.1)
 나는 독자 개개인에게 히브리서 4:1-11을 위에 제시된 7 단계에 비추어 읽고 또 읽기를 권한다. 나의 말을 있는 그대로 취하지 말라. 본문으로 나의 분석을 시험해 보라. 본문에서 편안한 감을 느끼기 시작할 때-그것이 옛 친구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할 때-나와 함께 안식이라는 이 핵심 단어의 저변으로 내려가 보도록 하자. (103.2)
 그러나 “안식”이란 무엇인가?
 첫째, 여기에 어떤 시간적 요소가 있는가? 이 구절(4:1-11)의 안식은 현재인가, 미래인가? 여러 진술들은 우리가 지금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103.3)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4:3).
“그의 안식에 들어간(enters) 자는 . . . 자기 일을 쉬느니라”(4:10).
“거기 들어갈 자들이 남아 있거니와 . . . [그러므로 하나님이] 다시 어느 날을 정하여 오늘날이라고”(4:6-8).
(103.4)
 그러나 논증의 다른 사항들은 안식이 아직도 미래에 있을 것으로 가리키고 있다: (104.1)
4:1-11의 초청은 미래 지향적 구절인 3:6b-19의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나온 것이다. 광야의 지파들에게 있어 안식(가나안)의 약속은 결코 성취되지 못했다.
• 안식으로 들어가는 약속이 “아직 서 있”다 또는 “남아 있”다고 하는 것은(4:1, 6) 뭔가 아직 실현되지 않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 게다가 또 “남아 있는” 안식(4:9)
• 그리스도인들은, 옛 이스라엘처럼, 하나님의 안식에 “미치지” 못할까 봐 조심하여야 한다(4:1).
• 그들은 안식에 들어가기 위해 “힘”써야 한다(4:11).
(104.2)
 이와 같이 히브리서가 말하는 안식은 현재와 미래의 요소를 거의 대등하게 균형을 맞춘 것 같다. 이러한 사상에서 우리는 무슨 의미를 찾을 수 있는가? (10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