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러한 생각이 호소력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나는 히브리서에서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할 만큼 충분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다. 후에 사도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언급한다(9:27-28; 10:37-38; 12:26-27). 그러나 그는 40년에 대하여는 다시 언급하지 않는다. 나는 핵심 구절인 시 95:7-11에서 이미 나온 한 세부 사항으로 40년을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한다. 히브리서 기자가 그 문단에서 보는 오늘날강퍅케 하다와 같은 단어로써 말놀이를 하고 있는 것같이, 40년이라는 말도 그러한 것이다. (97.3)
 어떤 제칠일안식일예수재림교회 설교가들은 히브리서 3:6b-19에서 교회에 대한 강력한 적용이 있는 것을 보았다. 우리가 주목해 온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개인적 인내의 동기와 상관없이, 그들은 광야의 이스라엘과 재림교회의 운동이 크게 병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테일러 B. 번치(Taylor B. Bunch)와 같은 설교가들과 저술가들은 그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운동으로서의 재림교회가 실패하였다고 강조하였다. 이러한 사상의 노선에 따르면, 오래 전에 재림교회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사명(영원한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을 완성했어야 했고, 그리스도께서 오셔야 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적의 주권과 불변성을 강조할 때 다른 방향으로 유도하지만, 엘렌 화잇의 몇몇 진술들은 이러한 견해를 지지한다. 이러한 적용이 다소의 효력을 지닐 수 있겠지만, 히브리서 자체는 그것을 제시하지 않는다. (97.4)
 이 문단(11, 18절)에서 안식이라고 한 말의 헬라어는 카타파우시스(katapausis)이다. 광야 세대에 관한 한, 그것은 분명히 그들의 소망이 집중되었던 가나안 땅을 언급한 것이다. 오경의 두 구절도 반역한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불쾌히 여기심을 표현함에 있어서 시편 95:7-11과 유사한 말을 사용한다. 그러나 안식 대신에 이 구절들은 특별히 약속의 땅을 언급한다. 그 구절들 중의 하나는, “이 악한 사람들 중에는 내가 그들의 열조에게 주기로 맹세한 좋은 땅을 볼 자가 하나도 없으리라”(신 1:34-35; cf. 민 14:20-23). (98.1)
 만일 안식에 대한 사도의 토론이 히브리서 3장으로 끝났다면, 우리는 그의 의도가 지상의 가나안이었다고 하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4장에서 우리는 그가 이 용어를 계속 사용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제1세기의 그의 독자들에게(그리고 연장하여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98.2)
 이스라엘의 실패에 대한 구약의 이야기는 두 가지 예외를 밝힌다.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충성하여 광야의 40년 간을 살아남았다. 아마도 히브리서 저자는 그들을 초기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긍정적인 역할 모델로 삼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오경에서보다 시편 95:7-11의 어투(語套)에서 그의 논의를 이끌어 간다. 시편이 사람에게 일괄적으로 초점을 맞추고 여호수아와 갈렙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도 그들을 지나쳐 버린다. (98.3)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실패에서 얻는 교훈은 그리스도인들의 가슴에 강력하게 와 닿는다. 우리도 간략하게 정의될 약속된 안식에 이르지 못할지 모른다(4:1-13).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사업에 대하여 알았고 보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최상급의 지도자가 있을지라도, 신(新)출애굽의 백성에게 속할지라도, 우리는 약속의 땅에 도달하지 못할 수도 있다. 긴급한 “오늘날”에 주의를 기울임으로써만이, 충성스럽고 인내하는 생애로 하나님의 음성을 순종함으로써만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설정하신 목표에의 도달을 확신할 수 있다. (99.1)
 4장의 최종적인 말은 이스라엘의 실패 원인을 요약한다: 즉, 그것은 「새국제역」에서 불신(unbelief), 그러나 헬라어로는 아피스티아—문자적으로 신앙(unfaith)”—라고 표현한 것이다. 사도는 4:2에서 핵심을 반복한다: “듣는 자가 믿음을 [복음과] 화합지 아니함이라.” 이와 같이 3장이 이스라엘의 믿음의 결여(lack of faith)를 강조하고 있는 반면에, 4장은 그리스도인 순례자들의 가장 중요한 영적 특성으로서의 믿음(faith)을 강조할 것이다. (99.2)
 바울은 11장에서 믿음(피스티스)에 대하여 더욱 많이 말하고 있으나, 우리는 설교 전체가 믿음을 예증하는 것임을 곧바로 볼 수 있다. 믿음의 의미에 대한 중점 연구를 위해 11장까지 기다려야 하지만, 히브리서 3장의 토의는 우리에게 몇 가지 주요한 암시를 준다. 믿음과 그것의 부정적 대응어(對應語)인 불신(unfaith [unbelief])은 하나님과 그의 행위에 대한 두 가지의 반응을 제시한다. 이것들은 두 가지의 사고 형태(mind-sets)를 가리키는데, 이것에서 두 가지 양상의 행동이 나오는 것이다. (99.3)
 불신앙(unfaith, 아피스티아)은 불신(unbelief) 이상의 것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말은 죄의 속임을 당하여 야훼와 그의 목표에서 떨어져 나간 사람, 곧 강퍅케 된 마음을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단지 지적으로 동의하지 않는 것을 훨씬 넘어서서 우리를 멀리 이끌어 가는 변덕의 요소들과 인내의 결핍을 본다. (99.4)
 ■ 말씀에 들어감
 히브리서 4:1-13을 두 번 읽으라. 그리고 그 사상들이 어떻게 함께 흘러가는지를 주시하면서, 3:1-4:13으로 되돌아가 전체를 읽으라. 읽을 때, 4:1-13에서 야기되는 아래의 핵심 질문들에 대한 답변들을 찾아보라. (100.2)
 1. 오늘날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하여 “남아 있는”(4:9) 안식은 무엇인가? 그것은 지상의 가나안이 될 수 없으므로,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100.3)
 2. 4:1-11의 안식에 대한 구절들을 연구해 보라. 그것들이 현재의 안식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미래의 안식을 의미하는지 그것에 따른 목록을 만들어 보라. (100.4)
 3. 안식일이 그 토론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그 안식은 안식일을 말하는가? 또는 그 안식은 어떤 다른 날을 지칭하는가? 이 구절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이 안식일을 준수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제공하는가? (100.5)
 4. 「새국제역」과 「제임스왕역」에 나오는 4:8을 비교하라. 어느 번역이 올바른가? (문맥이 그 대답에 대한 도움을 줄 것이다.) (100.6)
 5. 우리가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갈 때 그치게 될 “일들”은 무엇인가? (100.7)
 6. 4:12, 13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사물인가, 혹은 사람인가? (100.8)
 ■ 말씀을 탐구함
 충실함으로의 초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