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불충실에서 배울 교훈
 3:6b“만일”이라는 말로써 저자는 우리를 적용의 장으로 몰아간다. 하나님의 집의 일원이 되는 것은 자동이 아니며, 인간의 노력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우리는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인내해야 한다. 출발은 좋은 것이나 도착은 목표이다. (93.3)
 긴 적용은 우리로 두 단계를 거치게 할 것이다. 우리는 3:7-19에서 부정적인 본[誤示範]—애굽을 출발하였으나 약속의 땅에 이르지 못한 이스라엘 지파들—을 보게 된다. 우리는 그들이 왜 도달하지 못했으며,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어떤 교훈을 남기고 있는지를 보게 될 것이다. 4:1-13에서 권고가 경고에서 초청으로 뒤바뀐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경험은 사도가 그의 독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들과 목적을 제시할 때 시야에서 사라진다. (93.4)
 이스라엘의 경험에 주의를 끌면서 바울은 성경적 근거를 제시하려고 오경(성경의 첫 다섯 책)으로 되돌아가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가 애호하는 구약의 명상의 샘인 시편으로 가서 그의 호소에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는 구절을 택한다. 시편 95:7-11은 40년 간의 삭막한 사막의 방황 기간(彷徨期間)을 요약할 뿐만 아니라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직격탄을 쏜다. (93.5)
 본 구절을 통하여 성령께서는 수세기를 가로질러 사도의 청중에게 직접적으로 말씀하신다—그리고 우리에게. 그것은 긴급하게 이르러 온다. 오늘날—이것은 우리의 귀를 울리는 핵심 단어이다. 이것은 저자가 경고를 발할 때, 3:13에서, 그리고 3:15에서 다시 사용하는 말이다. (93.6)
 “오늘날”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지금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고와 은혜가 함축된 지금의 순간이다. 그 것은 기회의 이 순간이다. 그것은 재고 조사를 하기 위한 이 순간이며, 우리가 가고 있는 방향이 어디인지를 보기 위한 이 순간이며,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뜻으로 돌아가기 위한 이 순간이다. (94.1)
 기독교는 “오늘날”의 종교이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언제나 전진하기를 요청하신다. 그는 우리를 우리의 무관심과 나태함에서 일깨우신다. 그는 우리가 새로움과 성장에로 나아가도록 촉구하신다. 일찍이 어떤 그리스도인도 자신의 영적 여행에서 “그것을 이루지” 못했다. 순간마다, 날마다,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서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라(3:6)는 거룩한 성령의 부름을 듣는다. (94.2)
 히브리서 3장에 세 번 나오는 “오늘날”은 각각 경고를 수반한 호소를 한다. 매 “오늘날”은 마음을 강퍅케 하는 위험을 말해 주고 있다. 우리는 4:7에서 다시 한 번 “오늘날”을 발견하게 될 것이나, 거기에는 옛 이스라엘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을 것이며, 성령의 호소가 경고로서가 아니라 초청으로 임할 것이다. (94.3)
 고대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배반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을 모독하기 전에 그들의 정신이 먼저 그를 모독하였다. 여호와를 시험한 40년은 영적 상태를 외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영적 상태에서 파생되는 행위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이스라엘과 일세기의 그의 독자들의 영적 상태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아래에서 그가 영적 문제를 어떻게 기술하고 있는지 주목해 보라: (94.4)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8절)
“저희가 항상 마음이 미혹되어”(10절)
“믿지 아니하는 악심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 질까”(12절)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13절)
“너희 마음을 강퍅케 하지 말라”(15절)
“저희가 믿지 아니함으로”(19절)
(94.5)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의 일원으로 있는 동안, 느린 잠행성(潛行性)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나 우리가 그것을 알지 못할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보신다. 주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 성령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관심 못지 않게 공개적인 거절에 의하여 변할지 모른다. 원함이나 계획함이 없이, 우리는 마침내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것—배도와 반역—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95.1)
 야금술(冶金術)은 과정(process)에 대한 하나의 예를 보여준다. 강철은 열을 가함으로써 부드러워져 다양한 형태로 꼴지워질 수 있다. 그것은 반복적으로 가열되면 무한한 가능성을 지녀 재형성될 듯이 보인다. 그러나 강철의 결정체 조직은 마침내 영구히 굳어져 더 이상 재형성될 수 없다. (95.2)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있어서 거룩한 장인(匠人)께서는 당신의 청사진에 따라 우리를 빚으신다. 그는 우리를 위한 큰 잠재력을 보신다. 그는 한 꿈을 꾸신다. 우리는 우리의 완고함 때문에 과정을 느리게 한다. 그러나 그는, 우리가 그로 하여금 일하실 수 있도록 허락할 때, 우리를 빚고 꼴짓는 일을 중단하지 않으신다. 거룩한 과정이 지체되는 것은 오로지 우리가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원하지 않는 것만이 과정을 무효화시킬 수 있다. 만일 우리가 계속적으로 거룩한 손길을 거절한다면, 아무리 노련한 기술공이라도 더 이상 손댈 수 없는 강철처럼, 마침내 우리는 스스로를 강퍅케 하여 영원히 굳어지게 할 것이다. (95.3)
 “강퍅케 하는” 과정은 느리다—어느 누구도 갑자기 반역자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것은 애매 모호(曖昧模糊)하다—죄의 악독함이 우리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도록 우리의 눈을 막아 버린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는 날마다 다급한 “오늘날”을 발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우리의 귀에 “오늘날”을 발하실 때, 우리는 듣고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95.4)
 이 구절들에서의 바울의 경고는 히브리서의 첫 적용을 상세히 설명한다(2:1-3). 양 구절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들에 대한 공개적 거절이 아니라 종교적 무관심을 묘사한다. 마음의 잠행성의 변화를 묘사하는 3:12-152:3“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결과에 대한 이해력을 넓혀 준다. “살아 계신 하나님”(3:12)이라는 표현은 첫 적용(2:3)의 “우리가 어찌 피하리요?”와 병행을 이루면서 심판과 복수(復讐)의 개념을 전달한다. 히브리서의 다른 곳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이 복수와 연관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다(10:31; 12:22, 25). (96.1)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에 대한 사도의 강한 경고는 우리를 영적 불확실의 상태에 내버려두는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할 필요가 있다. 그는 서로를 격려하면서(3:13), 용기와 소망(3:6), 그리고 확실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붙잡을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3:14). (96.2)
 그러므로 여기에 제시된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두려움과 소심함의 생애가 아니다. 하나님과의 조화가 언제나 불확실한 생애가 아니며, 하늘로의 가파른 오르막길로 질질 끌며 올라가는 생애도 아니다. 그렇다. 그것은 우직함을 넘어서서 죄가 얼마나 악독하며 인간의 마음이 얼마나 악한지를 아는 지적이고도 기민한 경험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생애는 우리의 승리에 의지하기보다는 그리스도의 승리에 의지하기 때문에 담대히 확신 있게 전진한다.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에게, 우리의 성취가 아니라 그의 성취에, 우리가 어떠하냐에가 아니라 그가 어떠하시냐에—우리의 생각을 그에게 고정시킴으로써, 우리는 완전한 확신 속에서 산다. (96.3)
 3장의 마지막 문단인 16-19절은 전적으로 광야에서 멸망한 이스라엘 세대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은 출발은 잘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들린 손 앞에서 거룩한 인도와 권능의 증거들에 둘러싸여 애굽을 빠져나왔다. 그들은 훌륭한 지도자를 가졌다. 그들의 실패가 모세의 발 앞에 놓여질 수 없었다. 3:2-6a가 말해 주듯이, 모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위탁하신 임무 수행에 충성하였다. (96.4)
 그러므로 1세기의 하나님의 백성과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그의 백성에게도 중요한 두 가지 교훈들이 부상한다: 출발을 잘하고 위대한 지도자를 가졌다고 하여 영적 성공을 스스로 확신할 수 없다. 그리스도를 믿는 각 사람이 시대에 상관없이 출발은 잘한다. 그리고 각 그리스도인은 우주에서 가장 훌륭한 지도자를 모시고 있다. 그러나 우리 각자는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옛 이스라엘처럼, 우리는 점차적으로 하나님을 떠나 반역하게 되고, 그리하여 우리가 찾고 찾던 “약속의 땅”에서의 우리의 위치를 상실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애에 있어서, 도착하는 것이 막연한 희망을 가지고 여행하는 것보다 더 낫다. 영원한 안식을 얻는 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97.1)
 어떤 주석가들은 시편 95:7-11에서 인용되고 히브리서 3:17에서 다시 언급된 “40년”의 중요성을 주시하였다. 히브리서가 A.D. 60년대 초에 기록된 것과 함께,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사후(死後)의 40년 기간을 환산하여 재림이 몇 년 남지 않은 것으로 다시 기대하고 있었다고 추측하였다. 만일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한 시간 구조를 유의하고 있었다면, 3:6-19의 경고는 특별한 중요성을 띨 것이다. (9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