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름 아름다워라 7. 엘 엘리온—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그러나 사람이 되신 하나님)
 성경은 참된 신자를 하나님의 “아들들” 또는 “자녀들”이라 부른다. 실제로 예수님은 그런 뜻으로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셨다: “내가 말하기를 ‘너희는 신들이며, 너희 모두는 지극히 높으신 이 (엘리온)의 자손들이라’ (시 82:6). 주님은 그 말씀에 이어 이렇게 질문하셨다: “[하물며] 하나님의 말씀이 임한 그들을 신들이라 불렀으면, 성경은 폐기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성결케 하시어 세상에 보내신 그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했다 하여 나더러 ‘네가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요 10:35, 36). (116.2)
 이 태고적 진술의 뜻은 무엇일까? 해답을 찾아보자. 그리스도인이 거듭나면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된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되고 예수는 그의 맏형이 되신다. 신자는 이제 “하나님의 본성에 동참하는 자”(벧후 1:4)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를 우리는 “그분의 자손이라”(행 17:28) 하였다. 거기에 일보 더 전진하여 하나님은 “너희는 신들이라”(시 82:6) 말씀하신다. 기막힌 말씀이다! (116.3)
 이와 같이 이방인과 나그네의 신분이 동료 시민과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바뀌게 되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통해서 가능해 진 것이다. 그는 우리가 그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기 위해 우리의 인성에 참여하셨다. 이런 신비스런 신성과 인성의 혼합을 통해 구세주는 당신의 신성을 당신의 아버지의 가족들에게 나누어주신다. 인성을 쓰신 그분은 하나님께서 “신들”이라 부르시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 중에 “가장 높으신 신”이시다.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어진 복음의 약속은 분명하다: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이라 불리게 하셨는가? 그러므로 세상이 우리를 알지 못하는 것은 세상이 그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이라. 우리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것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그분이 계신 그대로 그분을 볼 것이기 때문이라”(요일 3:1, 2). (116.4)
 영원하신 아버지 예수(사 9:6)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다. 그는 비록 사람이 되셨으나 영원히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으로 남아 계신다. 그러므로 엘 엘리온 이란 이름 뒤에서는 그분이 타락한 인류를 구원하여 당신의 신성에 참여하게 하시기 위해(벧후 1:4), 심히 놀랍도록 크고 소중한 약속을 성취하신 이해하기 어려운 이념이 온 우주에 공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를 양자로(롬 8:15), 또는 자기의 형제 자매로 받아 주실 뿐 아니라 당신의 영원한 보좌까지 우리와 함께 나누시려고 준비하고 계신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의 독자들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과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그분께서는 미리 아신 자들을 자기 아들의 형상과 일치하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를 닮은 형제 가운데서 첫 태생이 되게 하심이니라”(롬 8:28, 29)고 하였다. 하늘 아버지께서는 돼지우리 냄새가 나고 말못하게 비천해진 당신의 탕자 아들을 포옹하실 준비를 갖추고 계심을 비유로 설명하실 때 예수님은 온 우주를 향해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또 잃어버렸다가 찾았느니라”고 선언하신 것이다(눅 15:20-24). 탕자는 아무리 멀리 갔어도 하나님이 그의 아버지이심에는 변함이 없다. (117.1)
 지극히 높으신 이의 비밀
 랍비들 중의 어떤 이들은 시편 91편을 모세의 작품으로 믿었다. 저자 모세는 이 시에서 마지막 날에 어떤 특별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것인지 설명한다. 그들은 재앙이 내리기 시작할 때(시 91:6-10),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은밀한 곳”[엘리온 의 비밀]에 거하는 자들이다(시 91:1). 저자가 “은밀한 곳”이라고 말한 것 같으나 실은 “은밀” 또는 “비밀”일 뿐 “곳”이란 말은 원문에 없는 것을 역자들이 첨가한 것이다. 그리고 “은밀”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사타르(saṯar)인데 이는 “숨기다,” “감추다”의 뜻을 가진 어원에서 파생한 말이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치기를 “감춰진 일들은 주 우리 하나님께 속하나 나타난 일들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의 자손에게 속하나니 이는 우리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라” 하였다(신 29:29). 사타르(saṯar)는 또한 “보호,” “은신처”를 의미하기도 한다(신 32:38; 시 32:7; 91:1; 등). 이 비밀, 즉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은밀[감춘 것]”은 성육신(成肉身)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 우리에게 계시되었다. (117.2)
 바울의 설명을 주목하라: “그리스도의 신비[은밀, 감춘 것] ... 그것이 성령으로 그의 거룩한 사도들과 선지자들에게 지금 계시된 것처럼 다른 시대에서는 사람들의 아들들에게 알려지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이방인들이 복음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공동 상속자가 되고 한 몸이 되며 그의 약속에 동참자가 되는 것이라. 이로써 그분의 능력이 효과적으로 역사하신 대로, [곧]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따라 내가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안에서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감취어 있던 신비의 사귐이 무엇인지 모든 사람으로 알게 하려는 것이니, 이는 이제 교회를 통하여 천상에 있는 정사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다양한 지혜를 알게 하려는 것이라.... 그분에게서 하늘이나 땅에 있는 모든 가족이 이름을 부여받았느니라”(엡 3:4-7, 9, 10, 15).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는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니 사람들의 속임수와 교활한 술책으로 그들이 속이려고 기다리는 온갖 교리의 풍조에 밀려 이리저리 다니지 아니하고, 오직 ... 모든 일에 성장하여 그에게 이르리니, 그는 머리 곧 그리스도시니라”(엡 4:14, 15). “그러므로 너희는 사랑 받는 자녀들로서 하나님을 따르는 자가 되라”(엡 5:1).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가족의 머리시다. 그는 엘 엘리온, 즉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요 하나님의 가족 중 가장 존귀하시고 당신의 본성을 나누어 받은 “인간 신들” 중 가장 높은 신이시다.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그러므로 “그의 자손”이 되며(행 17:28, 29), 따라서 주님은 그들을 “너희는 신들이라” 하신다. (118.1)
 하나님은 누구에게 “너희는 신들이라” 하시는가?
 다시 물어 보자. 본성과 성품이 하나님 같은 사람들은 누구일까? “하나님의 아들들”이다(욥 1:6; 2:1; 38:7; 시 29:1 난외주). 루시벨은 “지극히 높으신 분 같이” 되리라 주장했으나(사 14:14; 겔 28:11-17) 그것은 허황한 주장이었다. 심지어 그는 주장하기를 “나는 신 ()”이라 하였다(겔 28:2). 사람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이다(시 89:6). 이 사상을 더 깊이 알아보기로 하자. (118.2)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창 1:27). “창조”란 말의 히브리어 바라(bará )는 “아들을 만든다”는 뜻으로 확대 해석될 수 있다. [예: 시몬 바르(bar) 요나=요나의 아들 시몬 ]. 아들은 그의 아버지가 “만든” 것으로 이해되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은전처럼 인간은 비록 잃어버린바 되긴 했으나 그 돈을 만든 왕의 모습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다. 물론 세상이라는 장터에서 돌고 도는 동안 좀 마모되긴 했지만 말이다. (118.3)
 예수께서 오신 목적은 이 하나님의 형상을 원상대로 회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분은 “신들의 신”(시 136:2)이시며, “만왕의 왕, 만주의 주”(계 19:6)이시다. “지극히 높으신” 그분은 자기를 닮은 아들딸들이 있음을 실제로 주장하신다.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자녀이다(행 17:28). 우리의 행실이 어떻든지 그는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사랑하신다. 볼품없이 돌아온 아들을 붙잡고 “이는 내 아들이라”고 말한 탕자의 아버지를 생각해 보라! 자기 위신의 추락을 개의치 않는 아버지가 아니신가! 지극히 높으신 이는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우리와의 관계를 결코 부인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우리를 변화시켜 당신의 본성과 성품을 완벽하게 들어내는 자녀로 만들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러한 그분의 감정을 몸소 깊이 체험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내가 원하는 것은 너희의 물질이 아니라 너희니라”(고후 12:14)고 말했거니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마음이다. 실로 하나님께서 보시는 것은 지금의 우리 형편이 아니고 당신께서 하실 일을 마치신 이후의 우리인 것이다. (118.4)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은 이상적 관계를 만들고 유지한다. 사랑은 주고, 사랑은 희생한다. 희생이 있는 곳에는 희생할 것(제물)과 그것을 다룰 사람(제사장)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신성을 나누어 받은 모든 사람을 이 일에 초대하신다. 그들이 해야 할 희생과 봉사가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은 희생할 자원이 주어진 왕과 제사장들이 되라는 요청을 받고 있는 것이다(출 19:5, 6; 벧전 2:5; 계 5:10). 그래서 그분은 아브라함 당시에 당신의 희생적 부성(父性)을 나타내시기 위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을 등장시키셨다. 예수께서는 오늘날 친히 제물이 되시고, 또 친히 제사장이 되셔서 하늘 성소에서 당신의 직임을 수행하시는 한편 낮고 천한 인간의 마음에 성령으로 오셔서 도우신다. (120.1)
 그리스도에 관해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하시고 또 다른 곳에서 말씀하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계열을 따른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다(히 5:5, 6). 히브리 사상에 있어서 그들의 민족적 상속권과 제사장 역할은 가장 중요한 천부의 권리를 구성하는 요건이었다. 이를 성경은 장자권이라 한다. 이 지고한 유업을 받기 원하는 자들은 믿음의 가문에 속한 제사장으로서 격조 높은 성직을 은혜로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120.2)
 만일 우리가 중생을 통한 이 “아들 됨”의 특권을 주장하고 하나님의 후사(後嗣)가 되었음을 믿는다면, 그 특권에 수반되는 “하나님께 관련된 일들”로 남에게 봉사하는 제사장의 책임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히 2:17). 멜기세덱의 계열에 따르는 제사장이 되는 근거와 서약은 세습이 아니고 “끝없는 생명의 능력”(히 7:16)이다. 이것은 오직 우리 속에 예수께서 주시는 “보다 풍성한 생명”(요 10:10)이 부어질 때만 가능하다. 아들 됨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침례 의식을 통해 그 부활을 받아들인다. 오직 우리 속에 작용하는 그분의 영원한 생명의 힘(요 1:9)에 의해서만 우리는 남에게 봉사할 자격을 구비하게 된다. (120.3)
 요약: 장자권에 수반되는 제사장의 특권은 아론의 제사장직처럼 어떤 육체의 후손 됨이나 “육신적 계명의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우리 속에 작용하는 그리스도의 중생시키는 생명의 힘에 근거한 것이다. 우리는 그 장자권을 오직 그의 본성을 나누어 받음으로 얻는다. 우리는 성령으로 거듭 나야 한다. (121.1)
 영원하신 하나님, 이 참된 개심의 경험을 날마다 우리에게 허락하소서. (121.2)
 그런 제사장은 오직 아들이기 때문에 될 수 있고, 아버지의 특성인 “의와 화평”을 나누어 받게 된다(히 7:2). 이 두 낱말에서 우리는 야훼 치드케누[여호와 우리의 의(義)-렘 23:6]와 실로 엘로힘(화평의 하나님)이란 두 이름의 결합을 본다. 이 언약의 화평은 우리와 하늘과의 단절 없는 관계를 지켜 주고 전쟁과 적대감을 말살한다. 사실상 우리 대제사장의 봉사를 통해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다”(시 85:10). 우리는 생애에서 이 두 특성을 하나로 묶어 강력한 전인적 인품을 키워야 한다. (121.3)
 멜기세덱은 동시에 살렘의 왕이었다. 살렘은 저주 아래 병들어 있는 가나안 지방의 예루살렘을 말한다(창 9:25). 그러나 그 저주는 하나님의 선민의 대표 아브라함을 위한 축복으로 변했다(창 14:19). 그래서 그는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우리도 우리의 저주를 담당하고 그 대신 축복을 확보하신 분 앞에 빚진 자들이 되었다(갈 3:13). 저주의 땅 가나안과 멜기세덱의 집 시온은 마침내 약속의 땅과 축복의 산지(山地)가 되었다(시 105:11). 죄의 권세에 묶였던 자들은 잡혀갔던 롯과 그의 가족이 풀려나듯 누구나 아브라함보다 크신 이의 공로를 힘입어 풀려나고 멜기세덱보다 위대한 제사장의 축복을 받는다(창 14:17, 18; 롬 8:21). (121.4)
 거룩하신 하나님, 우리의 발걸음을 지키사 항상 우리로 주께서 택하신 길을 가게 하옵소서. (122.1)
 하늘과 땅의 소유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