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16세기의 안식일 준수자들
 종교개혁 시대 동안 유럽에서는 그리스도교 예배를 위한 날로 일요일이 지배적이었으나 어떤 무리들은 토요일을 그들의 주된 예배일로 삼았다. 비교적 소수의 경우에만 토요일과 일요일을 함께 지켰다. (609.1)
 16세기에 유럽에서 제칠일 안식일 준수의 가장 두드러진 예는 소수의 재침례파이다. 이들의 신조에 관한 상세한 증거는 이들을 비방한 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이들의 적대자들은 재침례파를 불신하게 할 목적으로 재침례파의 주장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드러냈던 것이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1527년과 1528년경에 토요일을 안식일로 받아들인 재침례파 오스월드 글레이트와 안드레아스 피셔가 안식일에 관해 쓴 현존하지 않은 글들에서 대해서 그렇게 했다. 구약과 신약에서 끌어낸 이들의 성경적 주장은 현재 제칠일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제시하는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 또한 이들은 첫째 날인 일요일 법령이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 발령되었다는 점도언급했다. (609.2)
 스페인에서 콘스탄티노 폰세 데 라푸엔테(Constantino Ponce de la Fuente, 1560년 사망)가 이끈 개혁 운동에서도 제7을 안식일을 포함시켰다. 또 하나의 개혁 운동이 16세기 말 트란실바니아에서 안드레아스 에외시에 의해 시작되어, 1610년대 동안 융성하였다. 그러나 에와시를 뒤이어 트란실바니아의 안식일 준수자들의 지도권을 이어받은 시몬 페치(Simon Pechi)는 그리스도교적이라기보다는 유대교적 운동을 벌였다. 북유럽 지역에서는 1544년 노르웨이에서 안식일 준수자들을 반대하는 법령이 반포되었고, 10년 후에는 스웨덴과 핀란드를 통치하던 구스타부스 1세 파사Gustavus I Vasa) 왕이 핀란드의 안식일 준수자들을 반대하는 법령을 공포했다. 16세기가 끝나갈 무렵 스웨덴에서 안식일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다는 증거가 있다. 또한 네덜란드, 프랑스, 러시아 기타 유럽 지역에서도 토요일 준수자들에 관한 기록이 있지만, 어떤 경우엔 안식일 준수자들이 그리스도교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을 것이다. (609.3)
 D. 청교도와 침례교도의 안식일
 1. 청교도 일요일-안식일 준수자들
 개신교가 일요일을 “그리스도교 안식일”로 강조한 것은 16세기 말 영국의 청교도들 사이에서 나타났다. 청교도들은 그날을 예배일뿐 아니라 매우 엄격한 금지 사항을 가진 날로 존중했다. 그러나 이런 엄격성은 영국, 특히 “[국법으로] 확립된 교회”(영국국교)인 영국 성공회가 지닌 전반적인 태도와 맞지 않았다. 여왕 엘리자베스 1세가 세운 종교적인 타협안에는 종교적인 신조나 관행에 대해 상당한 자유를 허용하는 안이 들어 있었고, 이런 요인 때문에 청교도들의 엄격성이 더욱 혐오스럽게 보인 것이다. 예컨대, 1585년에 여왕은 더 엄격한 안식일(일요일) 준수를 위한 법안을 통과시키려는 의회의 시도에 반대했다. (609.4)
 일요일—안식일은 청교도들과 영국 성공회 사이에 불거진 논란의 핵심 쟁점이 되었다. 1595년 니콜라스 바운드(Nicholas Bownd)가 출판한〈안식일 교리〉는 “거룩한 연방국가”로서의 영국을 위한 “성경적 안식일”(일요일—안식일)의 타당성을 명쾌하게 천명한 것이었다. 바운드는 일요일을 안식일로 만들기 위해 “변경 이론”을 이용하여, 사도들이 직접 안식일을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했다고 주장했다. (609.5)
 청교도들의 일요일 준수는 1618년 국왕 제임스 1세의 대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스포츠의 책〉에서 영국 성공회의 입장을 제시하고 지지했다. 그 후 격론이 이어졌고, 시간이 더 지나 국왕 찰스 1세가〈스포츠의 책〉을 재출판했다. 영국 성공회는 일요일을 매주 주요 예배일로 주장했지만, 교회 참석 후에 교인들은 사업이나 스포츠나 기타 오락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청교도들의 관행은 이와 날카롭게 대조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일요일-안식일이 구약의 안식일 규정과 일치되게 하려고 열렬하게 노력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1620년대와 163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오면서 매우 엄격한 일요일 준수라는 태도를 함께 가지고 왔다 (609.6)
 2. 영국에서의 토요일—안식일
 영국 청교도주의 계열 안에서 몇몇 무리가 일어났는데, 거기에는 성인 침례를 믿는 무리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침례주의자들도 대부분 엄격한 일요일 준수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지하는 몇몇 두드러진 옹호자들이 일어났다. 이들은 일요일을 안식일로 만들기 위한 기준들을 연구하면서, 그 다음 논리적인 단계로 성경에 안식일로 제시된 바로 그날(토요일)을 받아들였다. (610.1)
 초기에 토요일을 참 안식일로 강하게 옹호하고 변증한 자들 중에 존 트레스크(John Traske, 1636년경 사망)와 씨오필러스 브래본(Theophilus Brabourne, 1661년경 사망)이 있었다. 이들은 성경 어디에서도 “변경 이론”을 발견하지 못했다. 이들이 발견한 것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예배일이 토요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브래본은 1628년에 한 출판물을 시작으로 약 30년간 안식일에 관한 주요 저작을 네 권이나 저술했다. 브래본은 교회의 압력으로 결국 영국 성공회의 입장으로 돌아가긴 했으나 그의 출판물들을 통해 끝까지 제7일 안식일 준수를 꿋꿋하게 옹호했다. (610.2)
 3. 신세계에서의 토요일—안식일
 신세계(서반구)에서는 유대인 이민자들이 첫 번째 토요일-안식일 준수자들이었다. 최초기에는 유대인 이민자들이 1502년 포르투갈에서 브라질로 이주했다. 또 다른 무리는 1521년에 멕시코로 들어갔다. 16세기 말엽에 유대인들은 아르헨티나에도 정착했다. 또한 17세기 중엽에는 네덜란드의 안틸레스에 유대인 신앙공동체가 세워졌다. 후에 미합중국이 된 지역에서 첫 유대인 신앙공동체의 창립자들은 1654년에 뉴 암스테르담(현재 뉴욕)에 셰리트 이스라엘을 설립한 자들로서 브라질에서 이주해 온사람들이었다. (610.3)
 신세계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교 안식일 준수자들이 된 자들은 제칠일침례교도들이었는데, 문헌에 기록된 최초의 토요일—안식일 준수자는 1664년에 영국에서 로드 섬의 뉴포트로 이주해 들어온 스티븐 멈포드였다. 거기서 그는 침례교에 입교하여 그 교회교인들 가운데 몇몇에게 영향을 끼침으로 성경적인 안식일을 받아들이게 했고, 그리하여 심각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마침내 그와 그를 따르는 자들은 그 회중에게 정죄를 받게 되었다 16기년 12월에 예닐곱명과 함께 뉴포드 침례교회에서 탈퇴해 나와 처음으로 미국 땅에 제칠일침례교 신앙공동체를 설립하기에 이른다. 이 안식일 준수자들은 멈포드의 추종자 가운데 한 사람인 윌리엄 히스콕스를 초대 목사로 선출하였다. 이윽고 제칠일침례교도들은 뉴 잉글랜드의 다른 지역들과 서부 먼 지역으로까지 퍼져나갔다. (610.4)
 제칠일침례교도들은 토요일—안식일의 강력한 옹호자들이 되어 이 주제에 관한 문서를 출판하고 보급하였다. 침례교회의 교인수가 늘어나면서 이 안식일 준수자들은 마침내 19세기 초에 교단으로 조직되기에 이른다. 1818년에 이들은 “제칠일침례교”(Seventh Day Baptists)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채용하였다. 이들은 선교 잡지(Missionary Magazine)〉 〈개신교 파수꾼(Protestant Sentinel)〉 1821년과 1830년에 각각 창간했고, 1844년에는 <안식일 기록자(Sabbath Recorder)〉이 잡지들을 대신하였다. 이 저널들의 주된 목적은 제7일 안식일에 관한 자료를 전하는 데 있었다. 1835년에는 ‘소책자 회’가 세워졌고(1844년부터는 ‘미국 소책자 회’라는 명칭을 지님), 1850년에는 안식일에 관한 17개의 소책자 시리즈와 6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거기에는 1724년에 조지 칼로우(George Carlow) 펴낸〈진리를 옹호함〉이라는 책을 증쇄한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610.5)
 19세기 초에 아르헨티나의 애국자 라모스 메히아(Ramos Mexia, 1773-1825년)는 성경을 연구한 후, 제7일 안식일의 타당성에 대해 확신하게 되었다. 그는 부에노스 아이레스 남쪽에 있는 그의 농장에서 매 안식일 모든 일을 중단했다. (611.1)
 E. 현대 유대인과 안식일
 유대인들은 미쉬나와 탈무드에 성문화된 제한 사항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2,000년 이상 동안 기꺼운 마음으로 열렬하게 안식일을 준수해 왔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안식일을 묘사하기 위해 상징으로 사용한 여왕이나 신부를 방문하는 것처럼 안식일을 환영하고 소중히 여겼다. 그러나 현대 유대교의 다양한 분파마다 전통적인 안식일 준수에 대한 엄격성에 차이가 있다. (611.2)
 19세기와 20세기의 어떤 유대인 저술가들은 안식일에 관한 신학적 사상을 발전시키는 데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들 가운데서 삼손 히르쉬, 헤르만 코헨, 레오 배크, 마르틴 부버, 프란츠 로젠츠바이크 등이 두드러진 인물인데, 이들은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윤리 및 전반적인 도덕과 안식일의 관계를 제시하였다. 예를 들어, 코헨은 안식일을 노예제를 폐지하기 위한 첫 계단으로 보았는데, 그것은 안식일이 주인과 종 모두를 자유인으로 동일한 기반 위에 놓는다고 본히르쉬(Hirsch)의 주장과 유사한 개념이다. (6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