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아프리카 힙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354-430년)는 그의 몇 편지에서 안식일의 금식에 대한 논쟁을 다룬다(Epistle 36 [to Casulanus], 54 [to Januarius], 82[to Jerome]). 그는 카술라누스와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밀라노에 있는 대형 그리스도교회가 안식일 금식을 지키지 않았다고 적었다(36. 32; 54.3). (606.3)
 또한 아우구스티누스는 안식일 금식이 로마와 기타 서방의 몇 곳에 국한되었음을 분명히 했다(36. 27). 그러나 동방 교회들 및 “그리스도교계의 훨씬 더 넓은 지역”은 안식일 금식을 지키지 않았다(82. 14). 캇시아누스의 증언도 유사하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서방의 몇몇 농촌 지역 및 특별히 도시[로마]에 사는 어떤 사람들”은 안식일에 금식했다(Institutes 3. 10). (606.4)
 5세기의 두 교회 역사가의 기록은 대단히 흥미롭다. 소크라테스 스콜라스티쿠스(440년경)는 이렇게 썼다. “세계 전역의 거의 모든 교회가 매주 안식일[토요일]에 성스러운 신비[성찬]를 기념하지만 알렉산드리아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고대 전통 때문에 그것을 중단했다.”(Esslesiastical History 5. 22). 소크라테스와 동시대인인 소조만은 이렇게 적었다. “콘스탄티노플과 거의 모든 곳의 사람들이 주일 중 첫째 날뿐 아니라 안식일에도 함께 모이는데, 이런 관습은 로마나 알렉산드리아에서는 결코 지켜지지 않는다”(Ecclesiastical History 7.19). 이 시점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는 일찍이 2세기에 유일하게 안식일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낸 두 도시였음을 기억하는 것이 좋다(참조 V.B. 2.b). (606.5)
 c. 6세기
 6세기 동안에는 안식일이 물러나고 일요일 준수를 장려하는 쪽으로 움직이는 주요 조치가 취해졌다. 어떤 신학적인 판단 기준들이 안식일의 중요성을 폄하했지만, 그보다는 교회회의와 통치자들의 법령의 반포가 훨씬 영향력이 컸다. AD 538년 제3차 오를레앙 종교회의는 “사람들이 [일요일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릴 수 있도록” “논밭 일”을 금했다(Hefele 4:209). 콘스탄티누스의 일요일 법은 일요일 준수로부터 농사일은 면제해 주었지만(일요일에 농사일은 허용했지만),m이제 구체적으로 “논밭 일”이 여기에 포함되었다. 이것은 오경의 안식일 요구사항을 일요일에 적용하는데 내딛은 거보였다. 585년의 제2차 마콘 종교회의와 589년의 나르본 종교회의는 매우 엄격한 일요일 준수를 위한 추가 규정을 반포했다(위의 책, 407, 422). 게다가 마콘 법령들을 “585년 11월 10일의 한 칙령에서 군트람왕이 공포하여, 일요일을 주의 깊게 지키라고 강요하였다.”(위의 책, 409). 이렇게 하여 국가 당국이 교회를 지원하였는데, 이런 현상은 이어지는 몇 세기 동안 규모와 영역에 있어서 점점 강해졌다. 6세기 말엽에 거의 유럽 전역에서 일요일이 안식일을 대체했다. 이제 일요일은 “매주 그리스도인의 예배뿐 아니라 안식의 날로”도 기능했다. (606.6)
 d. 에티오피아에서의 안식일과 일요일
 적어도 이 나라의 어떤 지역에서나 어떤 무리들 가운데서는 안식일과 일요일의 다소 다른 관계가 발전되었다. 3세기 초 힙폴뤼투스의〈사도전승(Apostolic Tradition)〉 기초된 것으로 보이는 소위〈이집트 교회 질서(Egyptian Church order)〉에는 다음과 같이 규정하는, 에티오피아 말로 된 법령이 들어 있다. 즉 안식일과 주일 중 첫째 날에는 “집사들이 떡을 떼는 동안 되도록 주교가 자기 손으로 직접 떡을 모든 백성들에게 떡을 나눠줄지니라” 이 문서는 이 두 날을 “다른 날들”과 다르게 여겼음을 나타내며, 사실 이 두 날을 “안식일들”로 일컫는 언급도 있다(Statutes of the Apostles 66). (607.1)
 C. 중세와 종교개혁 시대의 안식일
 6세기부터 계속하여 엄격한 일요일 준수가 유럽에서 발전되었다. 중세 초에 주일 중 첫째 날이 점차 십계명 중 안식일 계명의 특성을 지닌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일요일을 지칭하는 말로 “안식일”이라는 단어를 폭넓게 사용한 증거가 전혀 없다. 유럽에서 “주의 날”이라는 표현은 주일 중 첫째날을 일컫기 위해 통용되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에서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안식일들”로 여기는 전통이 현대까지 계속되었다. (607.2)
 1 .중세
 중세에는 일요일을 안식일 계명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는 가톨릭 신학이 발전되었다. 그 신학적 개념이란 그 계명의 규정들은 그대로 두었으나 구체적인 날짜는 가톨릭교회가 토요일에서 일요일로 변경했다는 것이다. 계명의 내용은 도덕적인 것이며, 따라서 계속 구속력을 지닌 것으로 여겨졌지만 날짜 자체의 선택은 의식적인(ceremonial) 것이므로 잠정적이고 일시적이며 교회가 변경할 수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607.3)
 AD 829년 파리 종교회의의 규정 50 같은 몇 가지 9세기 자료들은 안식일이 일요일로 대체되었다는 인식을 드러내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준다. 그러나 고전적인 신학의 형성은 토마스 아퀴나스와 더불어 이뤄졌지만(1274년 사망), 그는 일요일-안식일을 구약의 안식일처럼 엄격하게 지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문자적인 의미에서 “[계명에서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은 부분적으로는 도덕적이고 부분적으로는 의식적이다.” 즉 도덕적이라는 말은 인간 존재가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집중하기 위해 어떤 시간을 따로 떼 내야 함을 의미하고, 의식적이라는 말은 따로 떼 낸 특정한 시간과 관련된(Summa Theologica 2a2ae. 122.4). (607.4)
 중세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일요일 준수를 강요하기 위해 교회의 당국자들과 세속 통치자들이 열렬한 노력을 기울인 증거가 있다. 그럼에도 유럽에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안식일을 포기하기를 거부했다. 이런 안식일 준수자들을 중세 말에 엿볼 수 있다. 1402년 영국에서 안식일을 준수한 경우 1420년 안식일 준수를 비롯한 신학적인 견해와 관습 때문에 1420년 프랑스 두에(Douai)에서 체포된 16-18명의 무리, 1435년과 1436년 노르웨이에서 안식일을 지킨 사람들 등이다. 이런 경우들에 대한 정보는 안식일 준수자들을 적대한 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그러나 16세기 초에 노르웨이에서 나온 문헌의 증거를 보면, 한편에서는 교회가 토요일-안식일 준수를 금지하고 다른 한편으론 그 정도가 미미하지만 그런 안식일 준수를 성직자들이 독려하는 것도 금지했다는 점을 언급한다. (607.5)
 2. 종교개혁 시대
 a. 주요 개혁자들
 개신교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1483-1546년)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강조하고 로마가톨릭교회의 다양한 예식들 및 “예식적인 엄격성”을 배격했기 때문에 안식일이나 일요일이 거룩한 요구사항이 아니며, 따라서 가톨릭교회가 일요일을 “안식일화하는” 것이 타당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매주 예배를 위해 한 날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는 취지에서 루터는 일요일을 선택했는데, 사람들이 교회에 모이는 데 익숙해 있는 전통적인 매주 예배일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608.1)
 장 칼뱅(1509-1564년)도 루터와 비슷하게, 매주 예배를 위한 하나님의 명령을 이루는 데 필요한 요구조건이라기보다는 편의상 일요일을 준수한다는 견해를 지지했다. 그러나 칼뱅은 루터가 지지한 대로 안식일 계명의 도덕적인 면과 의식적인 면을 구분하는 것을 거부했다는 점에서 루터와 달랐다. 칼뱅은 초기 그리스도교가 안식일을 일요일로 대체했고, 따라서 안식일은 폐지되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안식일의 세가지 주요 기능을 지적함으로 루터보다 안식일 신학을 더 분명하게 이해했다.

   (1) 안식일은 영적인 성장에 중요하다.

   (2) 안식일은 공적인 예배를 위한 닻이다.

   (3) 안식일은 종들에게 휴식을 제공한다는 실제적인 관심에 비추어 사회적 및 인도주의적인 혜택을 갖고 있다. 이런 요소들은 일찍이 1536년판(版) 그의〈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 공표되었다. (608.2)
 스트라스부르의 탁월한 개혁자 마르틴 부처(1491-1551년)는 그의 개방성과 관용의 정신으로 유명했으나 이상하게도 그는 엄격한 일요일 준수를 선포하였다. 그에 따르면, 일요일에는 아무도 “불필요한 신체적인 일”, 심지어는 유용한 일도 해서는 안 되었고, “일체의 육신의 일”(보수를 받는 노동, 빚 갚기, 스포츠 등)에 종사하거나 종교적인 모임에 무단결석해서는 안 되었다(De Regno Christi 2. 10). 1532년에 부처와 그의 동료들은 육체적인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할 수밖에 없는 활동을 제외한 모든 일을 일요일에 금하는 법령을 내리도록 스트라스부르 시 당국에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1534년 시 당국은 그런 요구에 상응하는 법령을 통과시키고 그에 불복할 경우 무거운 재정적 형벌을 부과하도록 했다. (608.3)
 비텐베르크에서 필립 멜란히톤(1560년 사망) 같은 루터와 절친한 동지들은 기본적으로 루터의 입장을 고수하였다. 취리히에서 울리히 츠빙글리(1531년 사망)와 그의 추종자들도 그들의 일요일 준수를 동일하게 다뤘다. 하나의 두드러진 예외는 루터의 이전 친구이자 동지였던 안드레아스 보덴쉬타인 폰 카를쉬타트(1541년 사망)였다. 루터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는 1524년 한 논문을 출판하여 상당히 엄격한 안식일 준수를 주장했다. 그 논문에서 카를쉬타트는 일요일은 “인간이 세운” 날임을 지적하면서 토요일-안식일을 논란이 되는 문제로 언급했다. (608.4)
 16세기 초 영국의 개혁자들 가운데 윌리엄 틴덜(1536년 사망) 같은 사람들은 회중 예배일로 특정한 한 날을 정할 필요성을 폄하하는 데 있어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사실 틴들은 미신을 타파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예배를 위한 주된 날을 10일마다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영국에서도 매주 모임이 주일 중 첫째 날에 있어야 한다고 명시한 통상적인 관례를 따랐다. (608.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