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 2세기의 교부들
 매주 그리스도교 예배일로 일요일을 존중하는 것을 드러낸 최초기의 언급이〈알렉산드리아의 바나바의 서신〉(130년경)에 나온다. 바나바는 철저하게 풍유적인 강론으로 안식일을 천년기의 표징으로, 그리고 “제8일”(일요일)을 새 땅의 상징으로 언급한다. 또한 그는 “제8일”이 그리스도인들이 준수하고 있는 날이거나 준수해야 할 날이라고 암시하는 것으로 보인다(Epistle 15). (604.2)
 바나바의 말이 다소 모호하다면 로마의 유스티 노스 마르튀로스(150년경)는 명백한 증거를 제공한다. 그는 로마 황제이자 원로원에게 보낸 〈변증(Apology)〉에서 그에게 친숙한 일요일 아침 예배에 대해 묘사한다(1 Apology 67). 예배는 매우 이른 아침에 있었다. 그러나 근자의 학문적 연구에 따르면, 67부가 후에 삽입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유스티노스는 〈유대인 트뤼폰과의 대화(Dialogue With Trypho the Jew)〉에서 그리스도교가 유대교보다 더 탁월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다. 유스티노스는 이 저작에서 자신의 반박을 통해 안식일을 폄하한다. 다음의 진술을 보라. “그대[트뤼폰]는 그 작자들이 빈둥거리지도 않으면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고 보는가? 생긴 대로 살아라.”(23). (604.3)
 2세기 말경에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는 안식일을 호되게 비판하고 주일 중 첫째 날을 지지했다. 클레멘트는 다양한 논리를 동원하여 주일 중 첫째날을 우위에 놓았다. 또한 그는 매주 일요일을 “주의 날”(Lord’s day)로 일컬은 최초의 교부이기도 하며, 신기하고 대단히 풍유적인 방법으로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BC 428-348년)을 언급하면서 그렇게 했다. “플라톤이 그의〈공화국(Republic)〉제10권에서 예언적으로 주의 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고 본다. ‘그리고 초원에 있는 그들 각각에게 7일이 지나가고 제8일에 그들이 출발하여 4일 안에 도착해야 한다.’(Miscellanies 5. 14). (604.4)
 갈리아의 이레나이우스(175-200년경)는 현존하지 않는 그의 논문〈부활절에 관하여(On Easter)〉서 “주의 날”을 부활절 일요일에 적용했다. 후대의 미상(未詳)의 작가는 이레나이우스에게 “오순절”“주의 날과 동등한 의미를 지녔다.”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이레나이우스가 말한 “주의 날”은 연례적인 부활절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두 가지 연례 축제를 비교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Fragments From the Lost Writings of Irenaeus 7). (604.5)
 c. 2세기의 외경 자료들
 두 개의 외경 자료가 “주의 날”을 언급하고 있는데, 연대가 확실하지 않지만 아마도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보다 2-30년 이른 시기의 것으로 보인다. 베드로 복음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주의 날에 일어난 것으로 말하지만 매년이나 매주 그날을 기념하여 지킨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요한의 행적은 사도 요한이 “일곱째 날이 주의 날이기에 일곱째 날에” 그의 금식을 끝냈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이 자료에서 요한이 죄수로 여행한 것을 알 수 있는데, 여행의 일곱째 날에 그랬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동방 교회가 안식일에 금식하지 않았기 때문에(참조 V. B. 3), 요한이 그날에 금식을 중단했을 것이다. 이 두 가지 외경 자료 중 어느 것도 믿을 만한 가치는 없다. 그러나 요한의 행적과 요한계시록이 모두 로마의 속주인 아시아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요한의 행적과 요한계시록 1:10에 나오는 “주의 날”이 동일하게 제칠일 안식일을 가리키는 용법과 의미임을 시사한다. (604.6)
 d. 3세기 교부들
 AD 3세기에 그리스도교인들의 매주 일요일 준수는 상당히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러나 로마, 알렉산드리아 그리고 로마의 “영향을 받고 있던 카르타고 주변 지역” 같은 몇 곳을 제외하곤 아직 안식일에 대한 본질적인 논쟁은 없었다. 신약 시대처럼 이런 논쟁에 대한 침묵은 그리스도교계 전반에 걸쳐 기존 현상이 유지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표였을 것이다. (605.1)
 로마와 북아프리카에서는 견해 차이가 없었다. 앞선 유스티노스 마르튀로스라는 논객과 달리 3세기초 로마의 힙폴뤼투스는 안식일이나 일요일에 금식하는 것을 강하게 반대했다. 로마에서 매안식일 식하는 관습이 생겨 안식일을 기쁨의 날이기보다는 우울한 날로 만들었다. 그러나 일요일에는 절대 금식하지 않았고, 힙폴뤼투스는 안식일도 그렇게 존중하는 것을 지지했다. (605.2)
 북아프리카에서는 힙폴뤼투스와 동시대 사람인 테르툴리아누스가 처음으로 안식일 준수 자들에게 부정적인 태도를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데, 안식일에는 무릎을 꿇지 않는 그들의 관습이 분란을 일으킨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On Prayer 23).(서로마에서는 무릎 꿇는 것을 기쁨의 날에 적절한 태도가 아니라 부정적인 태도로 여겼고, 따라서 그리스도교 예배자들은 일요일에 무릎을 꿇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후에는 안식일을 옹호하면서 안식일의 금식을 격렬하게 반대했다(Against Mardon 4. 12, 30; On Fasting 14). 따라서 로마와 북아프리카에서는 안식일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나머지 그리스도교계에서 안식일에 대한 논쟁이 없었다는 사실은 어떤 일요일 준수가 존재했든지 그것이 안식일을 방해하는 것으로 여겨지진 않았음을 나타낸다. (605.3)
 3. AD 4-6세기의 안식일과 일요일
 a. 4세기
 4세기 초 321년 3월 7일에 반포된 저 유명한 콘스탄티누스의 일요일 칙령은 안식일 및 일요일과 대단히 깊은 연관이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이 되어 있다. “존경하는 태양의 날에 도시에 거주하는 행정관들과 백성들로 쉬게 하고, 모든 일터의 문을 닫도록 하라. 그러나 농촌지역에서 농업에 종사하는 자들은 자신들의 일을 자유롭고 합법적으로 계속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른 날은 파종하는 일이나 포도나무를 심는데 적합하지 않는 일이 흔히 일어나기 때문이며, 그런 일에 적절한 순간을 소홀히 여김으로 하늘의 자애(慈愛)를 잃지 않기 위함이다.”(9BC 999). (605.4)
 이 칙령은 그리스도교적인 성향이 부족한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일요일을 “존경하는 태양의 날”로 일컫기 때문이다. 더욱이 콘스탄티누스가 오경에서 구체적으로 금지된 노동의 형태인 농사일을 제외시킨 것을 보면 그의 규정은 구약의 안식일의 모본을 따른 것이 아니었다. 같은 해 7월 3일에 반포된 추가적인 칙령은 일요일과 관계된 군대 규정에 대해 말한다. (605.5)
 약 65년 후, AD 386년에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와 그라티아누스 발렌티니아누스는 일요일에 소송과 공사간의 부채 상환을 금지했다. 이들의 후임 통치자들은 제한 규정을 더욱 더 확대하여 그리스도교의 일요일을 점점 “안식일화했다.” (605.6)
 알려진 바에 따르면, 안식일 준수를 거부하고 매주 일요일 준수로 대체한 최초기의 법령은 AD 364년에 개최된 것으로 여겨지는 라오디게아 지역 종교 회의에서 나왔다. 이 종교회의의 법규 39는 이렇게 규정했다.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을 유대화하여 그 날에 빈둥거리지 말고 일하도록 하라. 그러나 주의 날[일요일]은 특별히 존중하고, 그리스도인이라면 되도록 그날 일하지 말라. 그러나 그들이 유대화하는 것이 발견되면 그리스도로부터 끊어질 것이다.”(Hefele 2:316). (605.7)
 제7일 안식일에 대한 충성심은 투쟁 없이 포기된 것이 아니었다. 사실 4세기에 안식일과 일요일에 대한 상당한 논쟁이 있었음을 우리는 안다. 라오디게아 종교회의의 법령과 달리, 4세기에 편찬된〈사도 헌법(Apostolic Constitytion)〉은 이렇게 진술한다. “노예들은 5일간 일하도록 하라 그러나 안식일[토요일]과 주의 날[일요일]에는 그들이 여가를 갖고 경건한 마음으로 교훈을 받도록 교회에 가도록 하라.”(8. 33) “그러나 안식일[토요일]과 주의 날[일요일]을 지키라 왜냐하면 안식일은 창조의 기념일이고 주의 날은 부활의 기념일이기 때문이다.”(7. 23). 이 자료에는 이밖에도 몇 가지 진술이 담겨 있다(2. 36; 2. 47; 7. 36). 거의 동시대에 이그나티우스의 자료 삽입자는 이렇게 권고한다. “너희 각자는 영적인 방법에 따라 안식일을 지키고 율법을 명상하면서 기뻐하도록 하라. ∙∙∙그리고 안식일을 지킨 후에 그리스도의 모든 친구들은 주의 날을 축제로, 모든 날들의 여왕이며 수장인 부활의 날로 지키라.”(Magnesians 9). (606.1)
 b. 5세기
 5세기에 요한 캇시아누스(360-435년)는 안식일과 일요일에 교회에 참석하는 것에 대해 언급하면서,때때로 한 주에 5일을 금식하고 토요일 또는 일요일에는 교회에 가고 그 이틀 동안엔 식사를 위해 손님을 집으로 초청하는 어떤 수도승도 보았다고 말했다(Institutes 5.26). 캇시아누스의 다른 진술들도 안식일과 일요일에 드리는 교회 예배를 언급한다(Institutes 3. 2; Conferences 3. 1). 두 날을 모두 지지하면서 언급한 또 한 사람의 교부는 아마세아의 아스테리우스이다. 400년경에 그는 “이 두 날 곧 안식일과 주의 날이 함께 오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름다운 일이다.” 매주 그들의 교사인 사제들과 백성들이 함께 모이기 때문이다(Homily 5, on Matt. 19.3). (60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