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누가는 논쟁을 불러일으킨 두 가지 다른 치유 사건을 기록한다. “십팔 년 동안을 귀신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눅 13:10-17)와 고창병 걸린 남자(14:1-6). 이 치유와 관련하여 예수께서는 또 다시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눅 14:5)라고 말씀하셨다. (588.2)
 c. 요한복음에 기록된 안식일 치유
 안식일 치유 기사 두 개가 요한복음에만 기록돼 있다. 하나는 5:2-9에 기록된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이고 다른 하나는 9장에 나오는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에 관한 기사이다. 첫 번째 경우엔 예수께서 그 사람을 고쳐주시면서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 5:8)라고 명하셨다. 그 사람이 명함을 받은 대로 일어나서 걸어감으로(9절) 그의 치유가 사실이고 완전하다는 걸 입증했다. 이 일로 유대인들과 논쟁이 일어났는데, 고침을 받은 사람이 안식일에 짐을 나르는 것에 관한 율법(미쉬나에 성문화된 노동과 관련된 39개 주요 조항 중 하나)을 어겼기 때문이었다. 예수께서는 이런 치유 행위에 대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절)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우주를 지탱하기 위해서뿐 아니라 인간들의 구원 사역을 위해 끊임없이 활동하고 계셨다. 예수께서는 간단하지만 매우 설득력 있게, 자신도 이렇게 계속되는 하나님의 구원 활동 곧 안식일의 의도와 완전히 조화되는 활동(참조 창조 II. C)에 동참하고 있다고 주장하셨다. (588.3)
 그분이 후에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14절)고 하신 말씀을 보면 거기에 육체적인 치유 이상의 것이 포함돼 있었음이 분명해진다. 그 사람의 회복에는 육체적인 면뿐 아니라 영적인 면도 포함돼 있었다. 동일한 역학관계가 예수께서 가버나움에서 중풍병자를 치유한 데도 나타난다(마 9:1-7; 막 2:1-12; 눅 5:17-25). 거기서 그분은 그의 죄를 사하심으로 “인자가 세상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다(마 9:6)는 증거를 주셨다. 이것은 베데스다 연못의 병자를 치유하실 때 주신 기별과 동일하다. 그러므로 이 이적들은 예수의 신성과 메시아 되심을 선포하는 것이었다. (588.4)
 소경으로 태어난 사람을 치유하신 경우에도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을 어겼다는 이유로 예수를 비난했다(요 9:16). 그러나 이번에도 예수께서 어기신 율법은 바리새인들의 안식일 준수 규정이지 성경의 계명은 아니었다. 예수께서는 이 이적을 “하나님의 하시는일”이라고 일컬었다. 이 치유를 행하시기 직전에 예수께서는 베데스다 연못에서의 치유 사건과 관련하여 하신 말씀과 의미상 매우 유사한 말씀을 하셨다. 그분은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4절)고 말씀하셨다. 이 이적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신다는 걸 나타냈고, 따라서 여기서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이 베풀어지는 통로인 메시아로서 자신에 게 주의를 돌리셨다. (589.1)
 3. 예수의 안식일 치유 사건이 지닌 의의
 a. 안식일에 치유하신 이유
 예수께서는 그분의 치유 기적을 안식일 말고 다른 날들에 국한시킬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복음서는 유대인들과의 논란을 유발시킨 안식일 치유 사건을 특별히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런 치유들을 통해 예수께서는 참된 안식일 준수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셨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분은 이런 기적들을 통해 그분의 신성, 아버지와 그분의 하나 됨 그리고 그분의 구원 사역에 관심을 모으셨다. 안식일 치유를 놓고 벌인 논쟁으로예수께서는 그분의 구원 사역에 대한 중대한 진리를 가르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었다. 더욱이 요한이 언급한 두 번의 안식일 치유가 연례 절기들에 예루살렘에서 일어났는데, 그것은 예수께 인류의 구원에 중요한 진리들을 선포할 적기를 주었다. (589.2)
 b. 예수의 사명 선포로서의 치유
 요한이 기록한 두 번의 안식일 치유 사건은 그 후 이어진 토론 때문에 그리고 그 치유들은 예수의 사명을 확인해 주는 사건들이 펼쳐지는 과정과 연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주목할 만하다. 예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의 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자신과 아버지가 안식일에도 일하고 계시다고 선포했을 때, 유대인들은 이 말을 그분이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주장으로 여겨 “더욱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요 5:18). 예수께서는 몇 가지 의미 있는 사실을 제시하신 것이다.

   (1)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과 동일한 일을 하고 있다(19절).

   (2)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실 것이다(20절).

   (3)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절).

   (4)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다(26절).

   (5) “아버지께서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22절).

   (6)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한다(23절).

   (7)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그분께 오는 자들은 영생을 얻는다(24절; 참조 39, 40절). (589.3)
 이어지는 장들에서처럼 여기서도 예수님의 가르침은 참된 생명 곧 “영생”을 인간이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그분을 통해서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자신의 복음서 허두에서 말한 기본적인 메시지이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589.4)
 그리스도가 그 유일한 근원이 되는 “영생”이 예수의 안식일 치유를 통해 참으로 가르치고자 한 점이었다.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하신 예수의 강론 가운데 “영생”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며(요 5:24, 39) 뒤에서도 계속 나타난다(요 6:27, 40, 47, 54, 68; 10:28; 17:2, 3). 예수께서는 이 풍성한 생명(요 10:10) 곧 충만하고 온전하고 부요한 생명이 그분과 그분의 구원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지금 질적으로 시작된다는 점을 분명히 하셨다(참조 요 5:24).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날에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실 때 이 생명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이라는 보증을 주신다(요 6:40; 5:28, 29; 6:39, 40, 54: 고전 15:51-54; 살전 4:16, 17). (589.5)
 B. 사도행전, 편지서, 요한계시록
 1. 사도행전
 사도행전의 증거를 살펴보면, 예수의 부활 후에도 사도들이 계속하여 안식일을 지켰음이 드러난다.(소아시아의)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두주 연속 회당 예배에 참석했다(행 13:14, 42-44). 몇 년 후 제2차 선교여행을 하는 동안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강가에서 만난 여인들의 무리와 안식일에 모임을 가졌다(16:12, 13). (590.1)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당도하자 그는 “자기의 규례대로”(17:2; 눅 4:16에서 예수께 적용된 유사한 구절과 비교하라) 회당에 들어갔다. 데살로니가에서 세 안식일에 그는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였다(행 17:2-3; 〈개역표준역〉은 2절의 헬라어 삽바타“주”[weeks] 번역했지만, 회당에서 펼친 바울의 활동에 비추어 볼 때 “안식일”이라는 번역이 정확함). (590.2)
 후에 바울은 고린도에서 1년 반동안 일했다(18:1-18). 그는 주 중엔 장막 만드는 직업에 종사했지만(3절)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였다(4절). 그러나 고린도에 머무는 동안 회당에서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히는 일 때문에 어떤때는 “디도 유스도”의 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6, 7, 11절). (590.3)
 따라서 사도행전은 바울과 그의 일행이 지킨 안식일 준수 사례를 여러 번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이 첫째 날을 예배일로 준수했다는 기사는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일요일 예배를 지지하는 증거로 제안된 두 개의 언급(행 20:7; 고전 16:2)도 전혀 그런 것이 아니다. 사실 앞의 경우는 특별한 저녁 행사 모임(성경적 계산에 따르면 토요일 저녁)을 언급하는 것이고, 뒤의 경우는 후에 구제 헌금을 드릴 목적으로(교회나 회당이 아니라) 돈을 집에 따로 떼어놓으라는 말이다. (590.4)
 2. 편지서
 신약의 편지들에서 단 두 개의 언급만이 “안식일”(헬라어로는 다른 단어이지만)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골 2:16; 히 4:9). (5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