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새 연구 제 11 장 세상역사의 세 번째 대요(단 10, 11장)
 그런데 14절15절에서 마지막으로 언급된 이래, 잠잠하던 남방왕과 북방왕이 40절에서 다시 나타난다. 이제까지 연구한 11장에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가운데 두고, 언제나 적대(敵對)해 온 두 세력이 남방왕(king of the south)과 북방왕(king of the north)이었다. 팔레스틴을 기준으로 한 방위(方位)에서, 고대에는 바벨론과 시리아가 이스라엘의 북쪽에서 그들을 괴롭혔고, 이집트는 남쪽에서 괴롭혔다. 11장에서도 15절 이전의 남방왕은 이집트였고 북방왕은 시리아였지만, 시리아는 기원전 64년에, 이집트는 기원전 30년에 로마에 합병됨으로서 그 의미도 끝났다. 동시에 택한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도, 70주일의 끝인 서기 34년 이후 버림을 당하고, 서기 70년에는 예루살렘마저 멸망당함으로써 실제로 신약시대에는 그리스도의 참 교회가 영적 이스라엘이 되었기 때문에(롬 9:2, 6, 7, 3:28, 29), 이 곳의 남방 왕과 북방 왕의 싸움은, “마지막 때의 하나님의 참 교회를 대적하여 일어날 두 세력 사이의 싸움”을 가리킨 것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Ford, 275. 그러면 남방왕은 누가 될 것인가. 이스라엘을 영적인 의미로 해석하는 신약적인 관점에서 볼 때, 문자적인 이집트도 영적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이다. 이집트의 속성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겠느냐?. . .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라”(출 5:2)고 부르짖은 바로의 말에서 분명해진다. (216.125)
 이러한 배경을 염두에 두고 마지막 때의 영적인 남방 왕이 누구인가를 성경적으로 확인하기 위해 이러한 예언 해석에 가장 안전한 방법인 것이 입증되어 온 평행적 대조법(對照法)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다니엘서 11장8장의 대조는 이미 끝냈으나 사건의 연대적인 배열에서 가장 정확한 평행 대조를 이루고 있는 요한 계시록 11장을 중심으로 한 평행 대조를 시도해 보자. (216.126)
 가) 계시록 11장의 개요
 ㅇ 11:3-6 -- 중세기 1260년 간 하나님의 말씀이 겪게 될 수난과 사명(538-1798년에 걸친 중세 교황권의 역사) (216.127)
 「로마교는 성경을 존중하노라고 공언하면서 일반 사람들이 알 수 없는 언어로 그것을 가두어 버리고 숨겨버리는 일을 그들의 정책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로마교의 지배 아래 그 증인들은 “베옷을 입고” 예언하였다. 그런데 이제 또 하나의 다른 세력, 곧 무저갱에서 올라온 짐승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항하여 공공연히 싸우고자 일어났다」(각 시대의 대쟁투 하, 446). (216.128)
 ㅇ 11:7-13 -- 증거를 마치려 할 때인 1798년 직전에 일어날 성경 말씀에 대한 전쟁(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 (216.129)
 「그러므로 선지자의 말에 의하면 1798년 조금 전에 어떤 극악한 성격의 세력이 일어나 성경을 대항하여 싸우게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두 증인이 침묵을 지킬 수 밖에 없는 그 나라에서 바로의 무신론과 소돔의 음란이 나타날 것이었다」(각 시대의 대쟁투 하, 447). (216.130)
 ㅇ 11:14-19 -- 일곱째 나팔이 불리고, 하나님의 복음의 비밀(계 10:7)을 간직한 지성소 봉사가 시작되고(11:17), 세상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가 됨(1844년 이후 재림가지). (216.131)
 나) 계시록 11:7-13과 프랑스 혁명
 1789년 7월 14일 신문기자 데물랭이 선동한 군중들이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한 일로 시작된 프랑스 혁명은 중세기 교권제도를 끝냈으며 자유, 평등, 박애라는 표방과는 달리, 공산주의를 배태한 무신론과 징집제도에 의한 국가 단위의 전쟁체제를 통한 세계 대전의 기반을 놓았다. 그것은 불길한 전조로 시작된 근세사의 시작이었다. (216.132)
 ㅇ 증오의 대상이 된 국왕 루이 16세와 왕비가 단두대에 처형됨과 동시에 가장 잔인하고 끔찍스러운 유혈의 공포정치가 시작되었다. (216.133)
 ㅇ 교황권에 대한 혁명 세력의 증오는 1798년 2월 15일 버티어(Berthier) 장군을 로마시로 진군케 하여 재위 23년을 맞은 80세 고령의 교황 피우스(Pius) 6세를 압송하여, 1799년 8월 29일 발렌스 감옥에서 죽게 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2천명 이상의 성직자들이 처형되었고 3천명 이상이 추방되거나 국외로 피신했다. (216.134)
 「불행한 프랑스는 그가 심은 씨앗을 피로서 거두었다․․․프랑스는 자기 나라를 치료해 줄 복음을 배척했기 때문에 무신론과 멸망을 자초하는 문을 열었다․․․그리하여 프랑스는 반란과 무정부 상태로 휩쓸려 들어갔다. 성경을 대적한 싸움은 세계역사에서 공포시대라는 뚜렷한 한 시대를 초래하였다」(각 시대의 대쟁투 하, 467). (216.135)
 ㅇ 무신론적인 공산주의의 시작

 「그 증인들이 죽임을 당하여 그 시체가 거리에 놓여있는 그 큰 성은 영적 「비유적」으로 애굽이었다. 성경의 역사에 기록된 모든 나라 가운데서 애굽처럼 대담하게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실존을 부인하고 그분의 명령을 거역한 나라는 었다. “바로가 가로되,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 5:2) 그것은 무신론(atheism)이다」(각 시대의 대쟁투 하, 446). (216.136)
 다) 프랑스 혁명 2백 주년으로 정리된 역사적 의의
 「마르크시스트 역사가들은 1789년 프랑스의 부르조아혁명이 19세기 유럽에서의 연속적인 혁명적 소요를 불러일으켰다고 정리하고 있다. 부르조아혁명은 1848년 3월 프랑스에서 프롤레타리아혁명이 일어나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혁명이 전세계로 퍼져 나가게 했다. (216.137)
 1871년 파리콤뮨은 공산주의 혁명운동의 효시였으며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1949년 중국의 공산화가 뒤를 이었고 쿠바에서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공산혁명은 승리를 구가했다. 혁명에 대한 마르크시스트의 이러한 계보 모델은 최근까지고 프랑스의 역사학자들에 의해 널리 보급되었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 주간 한국, 1987년 7월 22일. (216.138)
 「1871년 3월 18일, 파리의 노동자들은 부르조아 지배자들을 축출하고 그들의 수중에 권력을 장악하였다. 이것은 결코 잊혀 질 수 없는 빛나는 업적이었다. 며칠 후인 3월 28일 그들은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국가인 파리콤뮨을 창설하였다. 이것은 인민에 의해 또 인민을 위해 지배되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이며 근로 인민 대중, 그중에서도 특히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위한 사회, 정치적 제반 조치들을 수행하는 그러한 국가였다.

 콤뮨은 72일 간이나 지속되었으며, 내외의 반동세력의 공격에 영웅적으로 저항하다가 붕괴되었다. 그러나 콤뮨의 경험들과 거기서 얻은 교훈들은 세계의 혁명운동에 거대한 영향을 미쳤다. 레닌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콤뮨은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들에게 사회주의 혁명의 임무들을 올바로 설정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프랑스 혁명 전집, 13권, 477. (216.139)
 「파리의 대포들이 내는 포성은 프롤레타리아의 가장 후진적인 분자들을 그들의 깊은 잠으로부터 깨어나게 했으며, 또 도처에서 혁명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선전이 성장하는데 커다란 자극이 되었다.」 Ibid., 17권, 143. (216.140)
 「파리에서의 혁명은 전세계를 통해 강력한 반향을 불러 일으켰으며 강력한 국제적 연대운동을 촉진시켰다.」 맑스, 엥겔스, 프랑스 혁명 연구, 3. (216.1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