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새 연구 제 11 장 세상역사의 세 번째 대요(단 10, 11장)
 그런데 위의 평행대조(平行對照)를 살펴 보면, 11:23-30까지의 기사는, 7장이나 8, 9장에서, 평행되는 점이 뚜렷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부분(11:23-30)에 대한 해석에는 다소의 신축성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러한 부분의 해석에는 융통성을 가지고, 가장 적절한 성취를 찾아야 함과 동시에, 한 가지 견해만을 유일한 것으로 고수하는 것은 종종 유익하지 못하다. 따라서 본서에서도 이 부분에 대하여는 몇 가지 견해 가운데 가장 적합한 해석을 적용하려고 한다. 가장 자연스러운 것은, 앞에 기록된 로마의 역사가 이 부분에서 다시 강조되면서, 31절에서 교황권이 확립되기까지의 과정을 자세히 설명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앞 부분(11:14-23)에서는 남방 왕국과 북방 왕국이 각축하는 사이를 비집고, 로마가 개입하여 어떻게 승승장구하면서 동방을 정복하고, 마침내 폼페이 때에는 북방 왕국 시리아와 영화로운 땅 예루살렘을 유린하게 되고(16), 그 뒤를 따라 율리우스 케사르가 전권을 인수하여 클레오파트라와의 결혼을 통해 남방 왕국을 어울르는가가 쓰여졌다(17-19절). (216.91)
 그러나 그가 정적(政敵)에게 졸지에 쓰러진 뒤(19절),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즉위하여, 메시야를 탄생시킬 호적령을 내리게 되고(20절), 그 다음의 황제인 티베리우스 때에는, 마침내 “언약의 왕”을 십자가 못박는 일을 함으로써(22절), 다니엘서 8:10, 11 9:26, 27의 예언을 성취시킨다. (216.92)
 이렇게 지상에 오신 메시야를 대적하여 죽이는 중대한 사건을 절정(絶頂)으로 역사를 전개한 다음, 다시 31절에서부터는 승천하셔서 하늘 성소의 대제사장이 되신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로마 교황권을 수립시키기까지의 과정을, 다시 소급하여 단계적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16.93)
 서기 31년에 언약의 왕을 죽인 그 로마야말로, 그로부터 191년 전인 기원전 161년에 메시야의 나라인 유다와 열렬한 우호조약을 체결했었다. Antiquities, XII. ch.10, SDABC, vol. 5, 31. 당시 시리아에 대항하여 독립을 쟁취하려던 지도자 유다 마카비(Judas Maccabaeus)는 로마의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과 이후에 다른 나라들에도 그랬던 것처럼, 유대인에게도 “거짓을 행하여,” 조약을 무시하고 “거짓을 행하여 올”라와(23절), 기원전 63년에는 유다의 독립을 빼앗고 나라를 빼앗은 뒤, 메시야까지 죽인 것이다. 실상 로마는 처음에는 작게 시작된 나라로 8:9에서도 언급되었지만, 여기에서도 “적은 백성을 거느리고 강하게 될 것”이라는 표현을 썼다(23절). (216.94)
 그 후 지중해 세계를 정복하는 과정에서 남방 왕국 이집트의 여왕 클레오파트라 7세와 결혼한 율리우스 케사르가(11:17) 암살당하고 난 뒤, 후계 다툼을 위해 옥타비안(아우구스투스)과 안토니(Antony)가 맞서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레피두스(Lepidus)와 함께 제2차 삼두정치를 연 인물들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 적대(敵對)관계에 있었으나, 이러한 관계를 종식시키기 위해 안토니는 옥타비안의 누이인 옥타비아(Octavia)와 결혼하여 처남 매부 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그 후 안토니가 이집트에 내려 갔다가, 클레오파트라의 미모에 매혹되어 부인인 옥타비아를 오빠인 옥타비안에게 돌려보내고 기원전 32년에는 정식으로 이혼하고 클레오파트라와 결혼한 뒤 그에게 동방 속주(屬洲)의 태반을 넘겨 주었다. (216.95)
 이에 분노한 옥타비안은 이집트 정복에 나서, 기원전 31년 악티움(Actium) 해전에서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의 이집트연합군을 패퇴시키고,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도 차례로 자살함으로써, 마침내 남방왕국의 명맥은 끝나고, 기원전 30년 이집트는 로마의 일개 도(道)가 되고 말았다. 이러한 과정이 25-27절까지의 문맥에 적합하다. 세계사 대사전, 714, 719. (216.96)
 그후 로마는 메시야를 서기 31년 십자가에 못박고, 서기 70년에는 예루살렘과 성전을 파멸시킴으로써, 다시 한번 “거룩한 언약을 거스리”게 된다(28절). 그런데 이렇게 확장일로(擴張一路)를 달리던 로마도, “작정된 기간”까지만 그러한 행운이 주어질 것인데(29절), 이 기간은 아마도 24절에 언급된, 그 “때가 이르기까지”이 곳의 “때”는 히브리어로 “아드”(עַד)인데, 7:25에서의 아람어 “이단”(iddan)처럼 1년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세력이 미치게 되는 한계 시점을 뜻하는 기간이다. 8:17, 9:25, 11:35, 40에도 쓰여진 이 말이, “이단”과 같은 뜻의 “한 때”(for a time)라고 생각하면, 360일(년)이 될 수도 있다. Anderson, 142, 143, Thiele, 141. 연관이 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곳의 기간은 앞뒤 문맥에 비추어, 기원전 31년 남방 왕국 이집트가 파멸되던 악티움 전쟁 때로부터 꼭 360년 후가 되는 서기 330년에 이르게 된다. Anderson, 142, 143, 다니엘서 주석, 279. 바로 이 해에,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는 “영원한 도시”(eternal city)로 알려진 로마시를 로마제국의 수도로 계속 유지하는데 한계를 느끼고, 동쪽으로 옮겨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수도로 정했고, 실상 이 때부터 로마제국은 다시는 이전의 권세와 영광을 회복하지 못한 채(29절), 395년에는 동서 로마로 나뉘었고, 서로마는 476년 게르만민족에 의해 망하고 말았다. (216.97)
 이러한 사실이 30절에 언급된대로, “깃딤의 배들이 그를 칠 것”이기 때문이라는 표현으로 나타나 있다. 깃딤(Kittim)은 본래 키프러스(Cyprus)와 그 주민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후에는 일반화되어, 어디에서 왔든지 파괴를 일삼는 이국인(異國人) 압제자를 가리키는데, 다니엘서 주석, 281, 282, 283. 이 문맥에서는 로마제국을 절단(切斷)낸 게르만민족의 침입을 적절히 가리키고 있다. 게르만 민족 중에서도, 반달족의 겐세릭(Genseric)은, 고대 깃딤처럼 강력한 해군을 가지고, 북 아프리카의 칼다고를 근거지로 삼고 지중해 일대를 위협했고, 455년에는 로마시를 약탈하여 황폐하게 했다. Anderson, 148. (216.98)
 그런데 이러한 로마제국의 수도 이전은, 이제까지 세계 교회들의 머리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써오던 로마교회의 감독으로 하여금 서로마 황제의 이미지를 대신하게 하여, 세계적인 교황이 되게 하는데 가장 중요한 여건을 만들어준 계기와 발판이 되었음은 역사적으로 공인된 사실이다(7장 연구 참조). 이해남, 79. (216.99)
 이러한 배경은 30절 하반의,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길 것”이라는 말씀을 가장 확실히 설명하고 있다. 이 귀절에서,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는 말할 것도 없이 다니엘 7장 25절이나 8장 11-14절에 예언된 로마교황권으로, 새 언약의 성소인 하늘의 성소 대신(히 9:11-12) 미사제도를 시작하고, 화체설(化體說)과 마리아와 성자(聖者)숭배등으로 새 언약의 중보이신 그리스도를 배도한 세력인 것이다. 이제까지의 로마제국의 역할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교황로마의 손으로 스스럼 없이 넘어가고 있는 것이다. (216.100)
 3. 성소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도전(II) (교황권 확립으로부터 세상 끝 날까지)
 가. 중세기 교황권의 역사
 「군대는 그의 편에 서서 성소 곧 견고한 곳을 더럽히며 매일 드리는 제사를 폐하며 멸망케 하는 미운 물건을 세울 것이며, 그가 또 언약을 배반하고 악행하는 자를 궤휼로 타락시킬 것이나, 오직 자기의 하나님을 아는 백성은 강하여 용맹을 발하리라」(단 11:31, 32). (216.101)
 가) 교황로마를 기른 제국로마(30, 32절)
 3세기까지도 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던 수 많은 교회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했던 로마교회가, 중세기를 장악한 로마 카톨릭교회가 되고, 지방 교회의 일개 장로에 불과했던 로마교회의 감독이, 세계 교회의 머리가 되어 중세기를 호령한 것은 자력(自力)에 의한 것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 후의 신성 로마제국(the Holy Roman Empire) 덕분이었다. (216.102)
 그 가운데서도 콘스탄틴 황제(AD 306-337)와 유스티니안 황제(AD 527-565)는 교황권을 양육하여 중세기의 주인으로 성장시킨 양모(養母)이기도 했다. 312년 10월 27일 콘스탄틴황제가 꿈과 환상으로 그에게 나타났다는 “불붙는 광채의 십자가”를 힘입어, 적수였던 막센티우스황제를 밀비안 다리(Milvian bridge)전투에서 이긴 뒤, A. M. Renwick, The Story of the Church, 50,51. 그리스도인에 대한 로마의 태도는 일대 전환기를 맞았다. (216.103)
 313년 3월에는 「밀란의 칙령」이 반포되어 신앙의 자유가 주어졌고, 성직자들에게는 병역, 세금 및 각종 시민의 의무가 면제되고(AD 313), 사법상의 특전도 베풀어져 세상 법정에서 재판을 받지 않게 되었다. J. L. Hurlbut, The 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1970), 60. 그 결과로 성직제도는 졸지에 타락하여 성직매매(聖職賣買)가 성행했고, 민중의 호응과 인기를 얻기 위해 교회의 문지방은 낮아질대로 낮아져 세속과 이교(異敎)의 물결이 넘쳐 들어왔다. 예배는 극도로 이교화하였고, 321년 3월 7일에는 아직도 콘스탄틴황제가 현직 대제사장이었던 페르샤의 태양신 미드라(Mithras)의 예배일인 일요일에 휴업하라는 포고가 내렸다. A. H. Lewis, History of the Sabbath and the Sunday, 2d. ed., rev., 1903, 123, 124. (216.104)
 이러한 틈 새에서 국가의 비위를 맞추며 꾸준히 정치적 기반을 굳혀 온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제의 이러한 종교정책을 열렬히 환영하며, 세계교회의 머리가 되기에 안간 힘을 썼다. (216.105)
 ◦ 326년 콘스탄틴황제는 선동죄로 처형된 것으로 전해지는 황후 파우스타 (Fausta)의 라테란 궁전을 로마교회 감독 실베스터(Sylvester)에게 주어 공관을 삼게 했다.

 ◦ 330년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틴노플로 옮기게 되자, 로마교회의 감독은 황제의 간섭 없이 독자적으로 교권을 확장하게 됐다.

 ◦ 375년 이제까지 로마황제들이 공식명칭으로 쓰고 있던 이교 대제사장의 칭호인 “폰티펙스 막시무스”(Pontifex Maximus)를, 그리스도인인 그라시안(Gracian) 황제가 비로소 포기하자, 자신을 높이기에 급급했던 로마교회 감독은 즉시 이를 채택하여, 자신의 칭호로 삼아 오늘날까지도 교황의 공식 칭호가 되고 있다. F. F. Bruce, The Spreading Flame (Devon: the Paternoster Press, 1970), 322.

 ◦ 476년 서로마가 망한 뒤, 로마교회 감독은 황제의 이미지로 군림하여 정치와 종교의 실권을 장악했다.

 ◦ 496년 게르만 민족의 강자인 프랑크의 국왕 클로비스(Clovis)를 개종시켜, 로마교회의 맏 딸을 삼음으로써 중세기 동안의 정치적 기반을 공고히했다. (216.106)
 특별히 동로마 황제 유스티니안은 로마교회 감독으로 하여금 세계교회의 머리가 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서로마의 잃어 버린 통치권을 되찾고, 이전의 통일된 대제국을 이룩해 보려는 목적으로 황제는 로마교회의 영항력을 십분 이용하려 했다. (216.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