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서 새 연구 제 11 장 세상역사의 세 번째 대요(단 10, 11장)
 이렇게 남방 왕국 이집트와 북방 왕국 시리아가 팔레스틴을 사이에 두고 혈전을 계속하는 동안 이탤리 반도에서 서서히 힘을 기른 라틴민족의 나라 로마가 점점 세력을 뻗고 있었다. 먼저 서부 지중해의 해양(海洋) 왕자였던 칼다고와 118년 간(264-146 BC) 세 차례의 포에니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두어 서부 지중해의 여왕이 되었다. 그런데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218-201 BC) 때, 칼다고를 지원했음을 계기로 헬라반도의 마케도니아와도 47년 간(215-168 BC) 세 차례나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였는데, 기원전 168년 피드나(Pydna) 전투에서 결정적 승리를 거둠으로써 헬라 반도의 주인이 되었다. (216.74)
 로마는 또 다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200-197 BC) 동안 마케도니아를 지원했던 북방 왕국 시리아의 안티오쿠스(3세) 대왕과도 맞부딪혀 기원전 190년 마그네시아 전투에서 패배시킴으로써, 소아시아를 빼앗고 팔레스틴을 정복한 시리아를 배후에서 견제했다. 로마에게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던 시리아는 팔레스틴에서 더 많은 세금을 염출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예루살렘 성전의 보물고(寶物庫)까지 손을 댔다. 이 때의 시리아왕은 셀루쿠스 4세 (Philopater. 187-175 BC)였다. (마카비 2서, 3:6-39). (216.75)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4세는 남방 왕국인 이집트를 침공하여 거의 점령하려 했으나, 방금(168 BC) 마케도니아를 정복한 로마는 특사를 보내 로마와 동맹관계에 있는 이집트에서 철수하라는 통첩을 보냈다. 로마의 위력을 잘 아는 안티오쿠스 4세는 할 수 없이 이집트에서 철수하면서, 분풀이로 기원전 168년 예루살렘을 짓밟아 앞서 언급한 최악의 사태를 연출했다(마카비 1서 1장, 2장 참조). (216.76)
 안티오쿠스 4세의 잔학한 박해와 성전 모독에 견디다 못한 유대인들은 마침내 경건한 제사장 가문의 마타디아스(Mattathias)와 그의 다섯 아들이 앞장 선 독립투쟁을 벌여 승리함으로써, 기원전 165년 성전을 다시 정결케 하고 재봉헌(再奉獻)하여 이를 기념하는 수전절(修殿節․Hanukkah․Feast of Light)이 제정되기에 이르렀으며(요 10:22), 기원전 161년에는 로마와 우호조약을 체결했고, 마침내 기원전 151경(151/150 BC)에는 값비싼 독립을 쟁취하여 마카비왕조(the Maccabean)가 출범하기에 이르렀다. SDABC, vol. 5, 32. 그러나 이 값 비싼 독립도 오래 가지 못하고, 보수적인 바리새파와 자유주의적인 사두개파의 거듭된 충돌과 마카비왕가 내부의 왕위 다툼에 로마가 개입함으로써, 기원전 63년 고귀한 독립을 상실한 채 기원전 40년에는 로마의 결정에 따라 에돔 사람인 헤롯대왕을 저들의 왕으로 맞아들이게 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께서 탄생하신 것이다. (216.77)
 이렇게 복잡하지만 참으로 중대한 역사적 사건이 뭉뚱그려진 것이, 바로 11장 14절을 중심으로 한 예언인 것이다. 즉 북방 왕국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3세와 마케도니아왕 필립 5세의 연합 세력에 시달리고, 잇달아 안티오쿠스 4세(시리아)의 재침에 직면한 남방 왕국 이집트는 곤경에 빠져 로마의 도움을 구하게 되고, 그 결과로 동방에 개입한 로마는 시리아를 비롯하여(64 BC), 팔레스틴(63 BC)과 이집트(30 BC)를 삼키게 되어, 마침내 지중해 전체를 장악하게 된다. (216.78)
 “네 백성 중에서도 강포한 자”(the robbers of your people)는 히브리어 문법으로 “네 백성들의 파괴자”라는 뜻도 가능하다. “강포한 자가 스스로 높아져서 이상(vision)을 이루려” 한다는 표현에서 “이상”(vision)은 8장 10-14절에 연관된 것으로 생각되어 그것이 박해와 파괴의 세력인 로마를 의미하게 된다. 로마는 역사에서도 “세계의 강도(强盜)”라고 자주 불리워지고 있다. 로마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서 왕좌와 성전과 보화와 독립과 땅을 빼앗아간 강탈자(强奪者)로 여겨지는 것이다. “네 백성 중에서도 강포한 자”일 경우에는 시리아와 로마의 침입에 대해 민족과 종교를 수호하는 대신 파괴적인 활동에 가담한 많은 배역자들을 가리키게 됨. Ford, 257. (216.79)
 이렇게 남방 왕국과 북방 왕국이 맞붙어 싸우는 틈 새로 개입하게 된 로마가 14절에 소개된 뒤, 15절에는 13절의 상황을 계속 설명하면서, 북방 왕국을 더 이상 막아낼 수 없게 된 남방 왕국 이집트가 로마를 구원자로 불러들이는 내용이 16절에 소개되고 있다. 이 때의 이집트왕은 프톨레미 7세였고, 이 때에 로마의 명령으로 시리아의 안티오쿠스 4세가 168 BC에 이집트에서 철수하였다. (216.80)
 나) 팔레스틴을 차지하는 로마
 16절에는 마침내 그 로마가 “영화로운 땅”, 즉 팔레스틴에 나타나는 모습이 소개되고 있다(단 8:9와 비교). 여기서의 “와서 치는 자”는 제1차 삼두정치(三頭政治)의 60 BC에 원로원을 지배하기 위해 율리우스 케사르, 폼페이, 크라수스(Crassus) 세 사람이 결성한 지도 세력. 최고 실권자였던 폼페이(Pompey)를 예언으로 돋보이고 있는데, 그는 동방 정복에 나서 기원전 64년에는 북방 왕국 시리아를 끝냄으로써, 이후부터는 로마가 북방 왕국의 위치에 서게 된다. 그는 즉시 팔레스틴으로 내려와 내란(內亂) 중인 마카비왕조의 왕위 다툼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3개월 동안 예루살렘을 포위한 후 기원전 63년 이를 함락시켜 유대의 독립을 끝냈으며, 유대인 12,000명을 살해한 뒤 그의 지휘관들과 함께 지성소까지 들어감으로써, 16절의 예언을 정확히 성취시켰다. (216.81)
 17-19절까지의 “그”는, 폼페이를 이어 로마의 실권을 잡은 율리우스 케사르(Julius Caesar․59-44 BC)이다. 처음에는 폼페이, 크라수스와 함께 삼두정치를 했으나 폼페이의 부인인 자기의 딸 율리아(Julia)가 죽고(54 BC) 크라수스도 전사하자(53 BC), 두 사람 사이는 극도로 악화되다가, 파르살루스(Pharsalus)에서 일대 접전을 벌여 폼페이를 패퇴시키고(48 BC), 그를 이집트까지 추격하여 거기서 죽였다. 조의설(편), 세계사 대사전, 1113, 1114. (216.82)
 그러나 이미 50세가 넘은 그는 이집트를 정복하는 대신 프톨레미 11세의 딸로 남 동생(프톨레미 12세)과 왕권 다툼이 한창이던 당시 22세의 미인 클레오파트라 7세(Cleopatra․15-30 BC)와 황홀한 사랑에 빠져, 그를 애첩(愛妾)으로 삼고 이집트의 왕위를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17절“여자의 딸”(the daughter of women)은 “뻬어난 여자”임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바로 세계사의 절세 미인 클레오파트라를 정확히 표현했다. (216.83)
 율리우스 케사르(씨이저)가 지나치게 오래 이집트에 머무는 동안 여러 곳에서 분규가 일어났으므로, 그는 이들을 진압하면서 로마에 개선 입성했다(18절). 그러나 케사르가 황제가 될 것을 두려워한 공화파(共和派)의 부루투스(Brutus)일파는,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元老院)에서 그를 칼로 찔러 죽였다. 이리하여 “그가. . .얼굴을 돌이켜 자기 땅 산성들로 향할 것이나, 거쳐 넘어지고 다시는 보이지 아니하리라”(11:19)는 예언은 놀랍게 이루어졌다. (216.84)
 다)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으심에 관여한 로마
 20절에서 “그 위를 이을 자는 토색하는 자”라고 번역된 말은, 곧 “세금을 거두는 자”(a raiser of taxes)의 뜻인데, 전체의 번역은 “왕국의 가장 영화로운 곳으로, 세금거두는 사람을 보낼 한 사람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American Translation의 번역. 라고 번역된다. (216.85)
 암살당한 율리우스 케사르를 이어, 로마의 황제가 된 것은 그의 조카딸의 아들이요, 양자였던 옥타비안(Octavian)으로 후에는 아우구스투스(Augustus Caesar)가 되는데, 그가 바로 누가복음 2장 1절에서, “천하로 다 호적하라”는 영을 내린 황제인데, 이러한 호적령은 세금을 거두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이 호적령에 의해, 나사렛에 거하던 요셉과 마리아가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에 내려오게 됨으로써 예언된 때(단 9:25, 갈 4:4), 예언된 장소(미 5:2)에서 구주께서 태어나시게 된 것이다(눅 2:1, 4, 5, 7). 얼마나 놀라운 예언의 성취인가? 그는 예언대로 평화로운 통치(Pax Romana)를 하다가, 서기 14년 8월 19일 평화롭게 여생을 마쳤다. (216.86)
 21절에서 아우구스투스의 “위를 이을 자는 한 비천한 사람”이라고 지적되어 있다. 다음에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Tiberius․14-37 AD)는 어머니 리비아(Livia)를 통해 아우구스투스의 의붓 아들이 되는데, 황제 자신도 그를 후계로 삼으라고 조르는 리비아에게, “로마제국의 자주옷을 입기에는 당신의 아들이 너무 비열하다(vile)”고 거절했으나, 결국은 어머니의 간지(奸智)에 의해 로마황제의 위에 오르게 되었다. Anderson, 141. (216.87)
 선왕(先王) 아우구스투스와는 달리, 평온치 못한 안팎의 사정으로 자주 군사를 일으켰던 그의 통치가 22절에 예언된 후, “동맹한 왕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예언되었다. 이 곳의 “동맹한 왕”은 곧 “언약의 왕”(the prince of the covenant)인데, 다니엘 9:25-27에 예언된 “한 이레 동안의 언약을 굳게 정”한,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임에 틀림없다. 다니엘 9:26, 27에 예언된 대로, 침례받으신 뒤 3년반 후인 서기 31년, 티베리우스 치하의 로마제국에 의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것이다. 예수님을 재판한 빌라도는 그리스도께서 무죄하심을 확인하고도, 자기 부인의 숙부로 자신에게 총독의 직분을 허락한 티베리우스 황제에게 충성하기 위하여(요 19:12), 사형을 언도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 누구에 의하여 돌아가실 것이 이처럼 놀랍게도 565년 전(고레스3년-AD31)에 예언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예수께서 구약성서에 약속된 메시야임을 확신하게 된다. (216.88)
 라. 교황권 확립까지의 로마 역사
 앞서 언급한대로 11, 12장의 예언은 8, 9장의 예언을 확대하고 구체화한 것이요, 8, 9장의 예언은 7장의 예언을 또 그렇게 확대한 것이며, 7장2장의 확대이다. 그 중에서도 네째 나라인 로마제국에 관한 예언과 로마제국을 계승한 교황로마에 해당되는 부분에 특히 이러한 반복과 확대가 중점적으로 강조되고 있어 다니엘서의 마지막 장들이 “마지막 때”에 관한 계시임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점을 문맥으로 재확인하기 위해 다음의 도표를 염두에 두는 것이 바른 해석을 위해 요긴하다. (216.89)